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25
226. 마음의 발명(The Invention of Heart) (23)
***
차원 #42-000은 엘프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세계다. 그곳 거주민들은 오늘밤 단체로 불면에 시달리게 되었다. 가뜩이나 예민한 엘프들 심기를 잔뜩 건드려 놓은 외부인들 때문에.
이미 경제적으로 위원회에 완전히 복속된 이 행성의 정부는 갑작스러운 통보에 군소리 없이 복종했다. 고대 종족의 요구는 이곳을 전함의 중간 기착지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함대의 최종 목적지는 차원 #42-000과 맞닿은 광신도들의 차원이었는데, 여기가 진군하는 길목으로 선정된 것이다.
그 결과 차원 #42-000의 엘프들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투 함대를 터미널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함들은 재정비 후 바로 터미널을 통해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는 대신 고도를 높이더니 대기권을 돌파하여 우주로 이동해버렸다.
대체 왜?
그 이유로 짐작되는 장면이 밤하늘에 펼쳐졌다.
“저길 좀 봐!”
“월식인가?”
“아니, 달은 그대로야. 대체 뭐지? 그림자가 달 대신··· 별자리를 가리고 있어!”
본래 아름다운 별빛이 가득해야 할 하늘 곳곳에 검은 얼룩이 맺혔다.
부정형으로 꽃핀 그것은 밤을 구멍 내는 어둠이었다. 알 수 없는 물체들이 대기권 밖에 나타나더니, 인공위성처럼 태양광을 반사하는 대신 그대로 흡수해버렸다. 지표면에서는 검은 얼룩이 별을 지우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시민들은 그걸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사람 못 믿기로 소문난 엘프들 입장에서는 애초에 정부도 못 믿을 놈들이고 위원회는 더 못 믿을 놈들이다. 정부 지침을 어기고 몰래 정령을 저 위로 보내 봐도 결계에 막혀 나아가지 못했다.
정보를 일절 못 받은 정부 입장에서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라고 위원회를 신뢰해서 받아들였을 턱이 없다. 힘에 억지로 굴복했기에 염려는 고스란히 남았다.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엘프를 동요시킨 주범들. 위원회로부터 파병된 그들은 우주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함장님, 저들입니까? 엔델리온이 갈아탈 몸으로 준비했다는 자들 말입니다.”
카바이트의 전함 지휘통제실. 질문한 이는 젊은 부관이었다. 곁에 선 함장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그래. 평범한 촉수라면 이런 먼 차원까지 자진해서 나올 리 없지. 가뜩이나 강제 징병 개념도 통하지도 않는 차원이잖나. 우리에게도 비자발적 노동은 죄인의 것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촉수들은 더 심하지. 그래서 저들을 대신 보낸 거야.”
그들이 보는 영상에는 우주의 풍경이 펼쳐졌다.
검은 허공에 백이 넘는 촉수 괴물들이 무기력하게 떠다닌다.
부관은 저들이 엄밀히 말하면 엔델리온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생김새는 똑같다. 유전 정보가 동일하니 그럴 수밖에.
굳이 가시적인 차이점을 찾자면, 그들이 찬 족쇄를 꼽을 수 있다. 엔델리온이 동족에게 가할 리 없는 야만스러운 장치.
부관은 갈색 솜털을 살짝 떨었다.
“어쨌건, 고대 종족과 똑같이 생긴 자들이 저런 꼴을 당한 걸 보니 좀 섬뜩합니다.”
그들의 스물여섯 가닥 촉수에는 무거운 구속구가 빠짐없이 채워진 상태다. 그것들은 금속 섬유 재질의 사슬로 엮여, 방사형 촉수와 몸 중심부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인간으로 치면 팔다리와 목에 부목을 댄 것과 비슷했다. 이대로는 촉수 한 올도 자유로이 휘두르거나 꿈틀댈 수 없다. 사람보다는 짐승이나 괴수를 다룰 때 쓸 법한 고삐다.
저들은 고향을 출발해서 이 차원에 도달할 때까지 폴리모프 상태로 화물칸에 수납되어 있었다. 그들을 인계받은 카바이트와 토드 연합군은 우주 공간에 방출한 뒤 폴리모프를 해제해 주었다.
엘프들이 목격한, 별빛을 가린 얼룩의 정체가 바로 그들이었다.
=살려줘··· 무서워. 돌아가고 싶어.=
=답답해. 움직일 수 없어. 누가 제발 이것 좀 풀어 주세요!=
=엄마··· 아빠··· 보고 싶어. 나 좀 구해 줘···!=
구속구는 촉수 말단을 기괴한 형태로 꺾었다. 함장과 부관은 그 구속구의 브릿지가 전함과 도킹하여 고정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촉수 괴물이 위에서 감싸듯 전투함과 접촉한다. 지구인이 목격한다면 크라켄이 빨판투성이 다리로 어선을 포획하는 걸 연상할 광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붙잡힌 것은 배가 아니라 저 괴물이다.
강제로 배에 묶인 저들 역할은 주입된 차원 도약 마법을 읊는 것이다. 구속구는 그들이 임의로 함선 표면에서 몸을 못 떼게 고정하는 기능도 있었다.
촉수들은 계속 애원하며 흐느꼈다. 눈가에 흐른 액체는 우주의 초저온 속에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우박과 같은 부스러기가 그들 주변을 떠돌았다.
“이상한 정신파가 들리는군요. 저들에게도 부모가 있습니까? 인공수정으로 배양되었을 텐데요.”
함장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둘의 외모는 얼핏 비슷한 연배로 보였지만 함장 쪽의 나이가 부관의 몇 배에 달했다. 이미 젊은 몸으로 몇 번이나 갈아탔기 때문이다.
“우리와 비슷한 방식이라면, 소수의 봉사자, 진짜 엔델리온이 부모를 연기하면서 저들 다수를 양육했을 걸세. 기계 보모를 쓸 경우 뇌 발달이 느려지거나 장애가 생기는 게 검증되었거든. 갈아탈 몸에 작은 하자라도 있으면 당연히 신경이 쓰이지.”
“아, 그렇습니까?”
“원래 종족을 불문하고 갈아탈 몸으로 키워진 자들의 유년기는 평범한 고대 종족과 크게 다르지 않아. 단지 남들과 격리되어 키워질 뿐이야. 뇌 기능 향상을 위해 고난이도의 교육까지 받는다네. 그들은 자기들이 사는 곳이 진짜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지.”
몇몇 사람들이 상상하는 공장형 사육 같은 건 없다.
수혜자들은 그들의 새 몸이 최대한 자연스럽고도 건강한 방법으로 양육되기를 바랐다.
극복할 만한 (주로 고난이도 교육에 기인하는) 적당한 스트레스 속에서 행복하게 자라며, 부정적 사고와 광기에 물들지 않기를. 그 결과 깨끗한 뇌와 신경계를 유지하길 희망했다.
그러다가 정해진 날이 오면, 공여자들은 잠든 채 출하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공포와 고통은 없다. 그들 영혼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육신에서 분리당한다.
– 167기 전(全) 함선 도킹 완료.
인공지능이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두 종족 병력을 합해 동원된 우주 모함은 167대였다. 그것들을 하나씩 들고 차원 도약을 할 ‘몸’도 167개체다.
카바이트 함장 앞에 화면 하나가 새로 생겨났다. 토드 쪽 지휘관이었다. 양 종족을 대표하는 함장은 해묵은 감정을 내려놓고 사무적 언어를 주고받는다.
잠시 후, 두 명이 동시에 인공지능을 향해 지시했다. 둘의 재가를 모두 득해야 실행되는 명령어였다.
– 약물을 주입합니다.
구속구와 촉수들 피부가 맞닿은 지점에서 뾰족한 드릴이 돋아난다. 그것들은 빠르게 회전하며 살점을 갈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매질이 없는 우주에서 비명은 울리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정신파로 절규했다. 안락한 낙원에서 키워지던 아이들이 상상 못 한 고통이었다. 생살이 찢기고 온몸에 수천 개의 구멍이 뚫리며 약물이 주입된다.
167개체가 동시에 뿜어내는 텔레파시는 정신 공격에 가까웠다. 부관은 버티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비명은 잦아들고 괴물들의 눈동자는 흐릿한 빛을 냈다.
함장이 웃으며 말했다.
“귀관은 오늘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구경을 했군.”
“······아, 그렇습니까?”
부관은 두려운 듯이 읊조렸다.
“고대 종족에게도 저 약이 통한다는 게 사실이군요.”
“그래. 촉수들은 자기 자신들에게도 통하는 기술을 개발한 거야. 그 사실은 이미 그들 공주를 통해 입증되었지.”
“아!”
방금 본 것은 본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수형자들에게 처해지는 조치였다.
“전 대대, 도약을 준비하라.”
저 괴물들 피에도 지독한 겁쟁이에다가 극단적 보신주의자인 엔델리온의 유전자가 심어져 있다. 맨몸으로 차원을 넘는 두려움 앞에, 어지간한 협박은 통하지 않을 터다.
하지만 지금 약물을 투입한 순간, 그들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울림이 공포를 잠시 가렸다.
촉수들의 몸에서 서서히 빛이 번진다. 그 섬광은 지휘통제실까지 스며들었다. 의자에 몸을 고정한 채, 카바이트 함장은 이번 작전의 목표를 복기한다.
‘아시프-666 검거를 위해서는 토드와 협조하되, 아시프-1의 조각을 발견하면 최대한 비밀리에 빼돌린다. 일단 조각을 하나라도 손에 넣으면 그게 나머지 조각을 찾는 열쇠가 될 수도 있어!’
분열되었던 아시프-1이 이미 완전체에 가깝게 부활했다는 사실은, 이들로서는 아직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파아앗!
함대는 이지를 반쯤 잃은 촉수 괴물에 고정된 채 차원을 넘었다.
***
차원 #77-102, 엘라후-프라가 교단 본부.
부활의 성당에 모인 군중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 머리 위에는 거기 있어서는 안 될 물체들이,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될 상태로 나타났다. 심지어 그 수가 너무도 많다.
푸른 섬광이 사라진 뒤 하늘을 덮은 것은 각각의 크기를 묘사하는 데 킬로미터의 단위가 필요할 것 같은 거대 전함들이었다.
위원회의 기술력은 이곳의 문명 수준을 아득하게 초월한다. 그들의 힘으로는 싸워 봤자 필패. 신도들은 가슴 속에 요동치는 공포를 느꼈다. 곳곳에서 기도 소리가 흘렀다.
“오, 신이시여. 나의 빛이자 진리, 나의 구원이시여. ”
“굽어 살피소서, 화신이여! 이 불안의 풍랑이 잔잔해지게 하소서.”
“당신의 그림자 아래에서, 번뇌를 내려놓은 행복한 꿈을 꾸게 하소서, 신이시여!”
“기도하라. 신께 기도를!”
그들 경전에 이런 장면은 기록되지 않았다. 선지자는 이런 날을 예언하지 않았다. 신도들은 그저 무력하게 무릎 꿇고 기도할 뿐이었다.
“아니, 저건!”
한편, 그들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델의 심장 속에 끓어올랐다. 그녀는 분노에 복받쳐 포효했다.
“어머니, 당신은 대체!”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전함에 붙들려 고정된 동족들이었다.
다른 엔델리온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델은 그 무자비한 분류에 반대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똑같은 사람이다. 그들의 몸집을 본 델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격노를 느꼈다.
“전부, 아직 성인도 못 된 아이들이야!”
그들은 출하 직전까지 키운 성숙한 개체보다 매몰 비용이 적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근시일 내 출하되기엔 아직 어리지만, 도약 마법을 주입시키기엔 충분히 나이를 먹은 개체들. 그들이 십자가에 박힌 죄인처럼, 전함에 몸이 묶인 채 끌려와 있었다.
그 무기력한 눈동자를 본 델은 아이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델은 그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었다. 저들은 방금 맨몸으로 차원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건 성인도 버티기 힘든 고통이었다. 몸이 으스러지는 압력이었다. 델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것을 겪었다. 본능적인 공포를 극복하고, ‘카인’을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럼, 저 아이들은?
“미쳤어. ···미쳤어!”
아이들의 동공에는 암시의 흔적이 미처 덮지 못한 공포의 잔상이 있었다. 그들은 방금 지옥을 경험했다. 몸이 덜 여문 탓에 델보다 더 끔찍한 고통을 느꼈을 터다. 그럼에도 반항하지 못한 것 같다.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그 아픔을 상상한 델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전함에서 음성이 울려 퍼졌다.
– 차원 #77-102의 주민들에게 고한다. 그대들이 은닉한 범죄자를 즉시 위원회에 인도하라! 불응할 시 물리력 행사에 돌입하겠다!
말로 그치는 위협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선두의 전함 앞에 푸른 빛의 파동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교인 중 누군가 그것을 알아보았다.
“광자포!”
그들의 최우선적 목표는 아시프-666의 회수다. 그렇기에 성당을 대뜸 공격하는 대신 범죄자의 인도를, 혹은 자수를 먼저 종용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협박에 응하지 않았다. 무아지경에 빠져 기도문을 읊고 찬송을 불렀다.
총대주교들은 떨리는 눈동자로 발코니의 교황을, 그리고 첨탑에 선 화신을 보았다. 그들의 신은 분명 말했다.
저 짐승들은 너희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때.
파앗!
부활의 성당에서 강렬한 빛기둥이 터져 나왔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그날과 같은 섬광이었다.
“오오, 신이시여!”
“우리를 인도하소서. 고난을 이겨낼 길을 열어 주소서!”
그 직후, 곳곳에서 기도 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사제들의 몸 위에 영혼이 겹쳐서 흔들렸다. 힘이 풀린 그들은 똑바로 서지 못하고 휘청거리거나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이 역시 부활축일 당시와 비슷한 현상이었다.
신혈을 태우는 저 빛은 주변의 영혼을 끌어당긴다. 그 현상에 생령(生靈)까지 휘말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또 누구를 부르는 것인가? 사제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완전히 말려 들지 않도록 조심을!”
흡입력에 휘말린 그들 영혼은 몸과 분리되어도 연결고리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육신은 태어날 때부터 영혼과 함께한, 온전히 쌍을 이룬 동반자였다. 몸은 든든한 닻이 되어 혼을 다시 끌어당겼다. 유체이탈에 익숙한 사제들은 능숙한 솜씨로 자기 몸을 찾아 다시 다이빙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이들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
“저건 뭐야?!”
전함의 지휘통제실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함장들은 성당의 섬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공지능이 경고했다.
– 계량이 불가한 대규모의 달란트 반응! 주의하십시오!
카바이트 함장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미친 놈들이··· 여기에 달란트 실물을 모아놨던 건가? 대체 어떻게?!”
영문은 알 수 없지만, 판단은 빨랐다.
분명한 반항 의사다.
“젠장! 지금 당장 저기를 통째로 날려 버려···!”
함장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함장님?!”
부관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그는 융모와 더듬이를 뻗어 바닥에 쓰러진 함장을 일으켜 세웠다.
자신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고령이지만, 이미 몇 번이나 몸을 갈아치운 그는 외관상 자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정신을 잃기에는 너무도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부관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함장님! 함장님!”
그의 더듬이를 타고 분명한 감각이 전달된다. 부관은 상대에게서 당연히 느껴져야 할 반응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오감을 의심케 되는 현상이었다.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한 후에야, 부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죽었어?”
숨을 거두고, 맥이 멈추고, 전신의 미세한 전기신호까지 모두 사라진 함장의 육신.
하지만 눈으로 보기에는 상처 자국 하나 없다.
부관은 곧 깨닫는다. 자신은 함장에게만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지만, 통제실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함장, 부함장, 항법장교, 통신장교, 입자포장교, 운영장교, 전산통제장교를 비롯한 윗선들이 전부 쓰러져 있고 이변을 알아차린 인공지능은 함내에 경고음을 울리는 중이다. 시스템은 방금 쓰러진 이들 전원의 생명 반응이 사라졌음을 알렸다.
‘전부 죽었다고? 이렇게 갑자기, 아무 전조도 없이?’
부관 본인을 비롯하여 아직 살아있는 이들은 한 줌의 소수였다. 주위를 급하게 둘러보던 부관은 그들의 공통점을 알아차렸다.
‘······전부 내 또래야!’
생존자들은 고대 종족 기준으로는 청년으로 분류되는 이들이었다.
얼마나 어리냐면, 아직 한 번도 몸을 갈아탄 경험이 없을 정도다.
‘왜 우리만 살아남은 거지?’
그때, 부관 앞에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인공지능이 그에게 말했다.
– 함내 지휘권을 귀관에게 양도합니다. 명령을!
“뭐라고?!”
부관은 기겁했다.
아무래도 이 집단 돌연사는 통제실 내부에 국한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배를 탄 이들 중 베테랑들은 전부 방금 전 죽어버린 것이다.
갑자기 함장 역할을 대신하게 된 카바이트는 온몸이 공포와 긴장으로 굳는 것을 느꼈다.
“아니, 대체 우리 배에 이런 일이···!”
그는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
이 현상이 지금 다른 전함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
일정 연령 이상의 고대 종족들이 상처 하나 없이 죽어 나가던 그때.
지상은 광란의 도가니였다.
“오오, 신이시여! 태초의 종족이여!”
방금 전까지 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들은 완전히 달라진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사제들 시선에 담긴 그 장면은, 얼핏 보면 백여 척의 전함으로부터 미사일과 광선포 따위가 긴 궤적을 남기며 수천 가닥이나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선명한 빛이 만들어내는 소나기.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긋는다. 하늘을 수천 개의 조각으로 쪼개며 내려온다.
“쏟아진다! 쏟아진다!”
하지만 그건 물질적 시야와 비물질적 시야를 혼동한 착시였다. 사제들은 안다. 그 한 가닥 한 가닥의 궤적을 만드는 것은, 영혼이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교인들은 열광하며 피부를 쥐어 뜯었다.
신혈은 영과 육의 관계에 관여한다. 그것을 태우며 만든 빛기둥은 영혼을 부르는 등대다.
그걸 달리 표현하면,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상대의 혼을 강제로 몸에서 뜯어낼 수 있는 무기다.
전함이 아래로 쏟아내는 영혼의 폭우는, 회오리처럼 소용돌이치며 물결을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부활의 성당, 그중에서도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있었다.
그 꼭대기에 선 채, 신은 영혼의 폭풍우를 받아들였다.
민준은 영혼들을 빨아들이며, 불타오르는 달란트의 용광로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알렉스트가 하은성에게 경고한 현상이 일어났다. 감당 못할 대량의 달란트에 닿은 정신은 그대로 붕괴한다. 영혼이 망령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함을 지휘하고, 조작하며, 전투 준비에 임하던 고대 종족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 왔다가 이성을 잃고 무너졌다.
민준은 이 순간, 미친 귀신을 생산하는 화로 같은 것이 되었다.
=저들 중에는 카바이트도 있군요.=
멀쩡했던 영혼이 망령으로 재처리되는 공정을 지켜보던 아시프-1이, 의문을 감추지 못하며 묻는다.
=왜 그 방법을 안 쓰시구요? 카바이트의 유전자 속에는 ‘폭탄’이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걸 터뜨리면 더 간단할 텐데요.=
왜 굳이 교단에서 모은 달란트를 소모하냐는 질문.
창조주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지금 여기에 모든 카바이트가 모인 게 아닌데, 놈들이 그걸 벌써 알게 하면 안 되지. 다급하게 유전자에서 흔적을 지워내면 곤란해.’
이어서 창조주는 아시프-1에게 명령한다. 아직 전함 내 모든 적들의 영혼이 뽑힌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배 안에 생존자들이 조금씩 남아있다.’
카바이트와 토드, 양쪽 다 처음보다 수를 많이 줄였지만 전멸은 아니다.
몸을 갈아탄 적 없는 이들 영혼은 육신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하나같이 생명력이 잔뜩 남은 건강한 몸이다. 고대 종족 기준으로 갈아탈 날이 한참 남은 상태. 덕분에 혼이 강제로 뜯기지 않게 안전장치로 작동하고 있었다. 수형자처럼 바로 갈아탈 몸이 곁에 준비된 것도 아니기에, 연결고리는 견고했다.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이 부족하다곤 해도, 인공지능이 도우면 전함을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민준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아!=
창조주의 지시를 듣고, 아시프-1은 얼굴 가득 미소지었다. 기대와 흥분이 감도는 웃음이었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조리도구로서의 기억보다 훨씬 오래 묵은 조각들이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이렇게 ‘크게’ 놀아보는 건 오랜만이군요.=
아시프-1은 하늘로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그 위의 모든 전함과, 거기에 타거나 묶인 모두를 품에 안기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였다. 팔을 높게 뻗은 채 교황은 정신과 음성으로 동시에 말했다. 명령하는 그의 두 눈이 빛났다.
=“들어라!”=
그 음성이, 목표물들의 정신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