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46
247. 사람의 자격 (12)
***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더 이상은 무리야!”
애원하는 목소리.
“저, 한 번만 더 안 될까요?”
“안 돼! 안 돼! 죽어도 안 돼!”
엘프, 블레어 캠벨은 결국 단념했다.
그녀 앞에는 충혈된 눈을 비비는 요정이 있었다.
블레어의 간곡한 요청에, 라리사는 여태 영계를 계속 왕복하며 결계 너머를 관찰했다. 혹시라도 더 세밀한 광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달큰한 향을 풍기는 요정이 콧물을 훌쩍거리며 말했다.
“나 이제 날갯짓할 힘도 없어. 이것 좀 봐.”
잠자리의 그것을 닮은 반투명한 날개가 흐느적거렸다.
“휴···. 알겠어요. 어쩔 수 없죠.”
“그래, 언니. 노인학대를 멈춰. 그래도 노력한 덕에 한 가지 더 알아냈잖아. 이걸로 만족하라구.”
첫 시도에서는 태양처럼 타오르는 마나 덕분에 그 안의 레드 드래곤이 어떤 상태인지까지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라리사가 눈알이 타는 격통을 참고 끊임없이 슈가 파우더를 재충전하며 노력한 덕에 어렴풋한 영상을 포착한 것이다.
날개를 접고 꼬리를 만 그 모습은 용의 전형적인 수면 자세였다.
“타이밍 상 동면은 아니야. 곧 깨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요정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엘프는 섬뜩한 위기감을 느꼈다.
심지어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니. 상상 가능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띠링!
그때 부하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블레어는 이야기를 듣더니 짤막하게 지시한다.
“들여보내세요.”
힘 빠진 손짓으로 정장에 튄 설탕 가루를 털던 라리사가 물었다.
“누군데?”
블레어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마침 잘 됐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뭐?”
그때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방문객을 본 요정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벙거지 모자를 귀 밑까지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람이었다.
“누구길래 저렇게 꽁꽁 싸매고 다녀. 무슨 연예인이야? 유명인?”
“······요즘 좀 유명해지긴 했죠.”
블레어는 남자에게 부탁했다.
“이분에게 회복의 힘을 써 주시겠어요? 영계를 너무 많이 왕복해서 몸에 무리가 갔을 거예요.”
“뭐? 회복? 언니, 설마···?”
남자가 요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환한 빛이 터져나온다.
화앗!
“어머,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요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날개를 파득거렸다. 그리고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아주 힘차게.
분명 좀비 수준으로 낮아졌던 체력이 다시 솟구쳤다. 온몸에 넘치는 활기를 느끼며 요정은 경악했다.
“와! 엄청 개운해. 피로랑 힘든 게 싹 가셨어. 마치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야. 이 오빠 완전 걸어다니는 프로포폴이네!”
블레어는 저 요정이 사회가 허락한 합법적인 마약(설탕) 외에도 이것저것 손대고 있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라리사, 죄송하지만 저희끼리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요.”
“알았어. 그럼 다음에 봐. 그쪽도, 오늘 고마웠어요!”
인사를 받은 남자는 쭈뼛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 네. 천만에요.”
요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밖을 나섰다.
‘음?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그의 음성이 한국 6대 재벌 총수 자리에 앉은 하프 엘프, 에드워드 미첨이라는 이름의 뱀파이어 능력자와 완전히 똑같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둘만 남은 블레어는 ‘막내’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갈 곳이 있어요.”
그들이 다른 직원들 시선을 피해 이동한 곳은 레어 깊숙이 위치한 일종의 별관이었다.
“여긴 어디예요?”
“회장님의 손님이 머무는 곳이에요. 그도 드래곤이죠.”
이어서 막내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한다.
블레어는 마음 언저리에 남은 불안감을 직시했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외출 후 예기치 못한 군식구들을 데려온 젠킨슨은 그중 두 명은 감옥에 가두고 한 명은 여기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는 블레어에게 지시했다. ‘쟤는 건드리지 말고 그냥 두라’고.
그녀는 지금 회장의 명령을 어기는 셈이었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이야.’
엘프와 요정의 힘으로는 젠킨슨을 깨울 수 없었다.
하지만, 동족인 드래곤은 어떨까?
‘호의를 받은 손님이니 이 정도는 요청할 수 있겠지. 사람이라면 회장님 은혜에 보답은 못할망정 배신하지는 않을 거야. 밖으로 소문이 퍼질 염려도 없고.’
그가 여기 머무는 계기가 된 사고에 젠킨슨도 일부분 기여한 것을 블레어는 몰랐다.
“자, 들어가지요.”
그녀가 앞장섰다.
문을 열자 눅진하고 우울한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조명이 없었지만 눈 밝은 블레어는 물론이고 여러 종족의 피가 섞인 막내 역시 사물 판별에 어려움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어둠 한가운데 매우 거대한 누군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도 깨지 않는군요.”
흠흠, 목청을 가다듬더니 블레어가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켄티우스 님,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막내는 공기의 결이 바뀐 것을 느꼈다.
그 직후, 어둠의 일부가 움직였다.
삼색룡 켄티우스는 한쪽 눈만 뜬 채 집주인의 종속을 바라보았다.
“······.”
무슨 일로 왔냐고 묻지 않는다. 아무리 본인이 군식구라지만 허락 없이 들어온 것에 대해 화내지도 않는다.
엘프는 드래곤의 눈동자에서 무기력과 좌절을 읽어냈다.
깊이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세상 모든 드래곤을 사랑하는 이 엘프는 조심스레 한숨을 삼켰다.
‘맙소사, 우울증 걸린 드래곤이라니!’
자기 긍정의 화신인 드래곤이 레어 구석에 처박혀 슬퍼하고 있다.
젠킨슨의 말에 따르면 저 용은 스스로를 혐오하는 것 같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고 잠만 자는 켄티우스에게 블레어가 말을 걸었다.
“회장님이 보내셨습니다.”
왜? 라고 되묻지도 않는다.
블레어는 곁에 선 막내를 소개했다. 드래곤 앞에서 위장은 무의미했기에 맨얼굴을 드러낸 상태였다. 익숙한 얼굴일 텐데도 별 반응은 없다.
“이쪽은 젠킨슨 회장님이 인정한 지구 최고의 신성력 능력자입니다.”
나중에는 차원계 최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도 평가했지만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는다.
블레어는 대학병원에서 기적을 똑똑히 목격했다. 막내가 의도치 않게 회복시킨 이들 중에는 중증 치매환자도 있었다. 어지간한 성직자는 건드릴 엄두도 못 내는 뇌의 이상까지 커버할 수 있다는 뜻.
“회장님께서는 켄티우스 님을 치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거짓말이다.
블레어는 앞선 몇 번의 시도를 통해 켄티우스와 대화가 불가능한 걸 알고 있었다. 증상이 실언증에 가깝게 악화된 상태이므로.
‘일단 저 우울증부터 고쳐 놓아야 뭐라도 물어 볼 수 있어!’
엘프가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처음으로 반응 비슷한 것이 나왔다.
희미한 정신파였다.
=······그러든지.=
켄티우스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가 우울해하는 근본적 원인은 치료 가능한 부분이 아닌 걸 알기 때문이다.
엘프, 인간, 드래곤, 오베르 거미의 유전자가 섞인 성직자가 손을 뻗고 빛을 뿜어냈다.
화아아앗!
그의 힘이 드래곤의 두뇌를 파고든다.
신성력은 민준의 세뇌를 건드리지 못했다. 다만 신체를 최적의 상태로 돌려 놓는 원리는 뇌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뇌내 호르몬 등 각종 화학물질의 불균형이 바르게 잡힌다.
이름 없는 신을 섬기는 성직자는 암시를 없애지는 못했지만 켄티우스의 심각한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걷어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
드래곤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보며 블레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막내를 본다. 그리고 요정보다는 긍정적인 언어로 평가했다.
‘이건 거의 걸어다니는 프로작이네.’
우주 최강의 성직자 후보를 허락도 없이 드래곤 항우울제로 사용한 죄책감은 없었다. 켄티우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놀랍군. 성직자가 이런 일까지 할 수 있는지는 몰랐는데.”
확연하게 심리 상태가 나아진 걸 확인한 켄티우스는 얼떨떨한 듯 눈을 깜박였다.
“젠킨슨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야겠어.”
안정을 되찾은 그는 우울할 때는 미처 인지하지 못 한 무례를 알아차렸다.
거처를 마련해 준 것에 대한 제대로 된 인사를 뒤늦게나마 보내는 동시에, 성직자를 빌려준 데에도 감사를 표하기 위해 메시지 마법을 읊었다.
블레어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그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음?”
드래곤의 머리가 기운다.
“이상하군. 뭔가가 내 마법을 튕겨내는데?”
블레어가 그럴 거라 짐작한 투로 말했다.
“회장님께서 지금 결계를 치고 연구에 몰두하신 것 같습니다. 거기에 집중하기 위해서 메시지 마법까지 막으신 것 같아요.”
의식이 없다는 이야기까지는 꺼내지 않는다. 최소한의 정보를 흘리며 화제를 원하는 곳으로 연결시켰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을 가장하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회장님께 급히 전달할 메시지가 있는데, 참 난처한 상황입니다. 이런 경우에 쓸만한 방법이 있을까요?”
젊어도 용족이니 엘프가 모르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젠킨슨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여타 고룡에게는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외계를 유랑 중인 회장의 자녀들에게 연락하는 것도 도청 위험이 있다. 예민준까지 실종된 지금 블레어는 달리 매달릴 곳이 없었다.
켄티우스는 그를 깨울 수 있을까?
결계를 부수는 건 기대도 안 한다. 그 너머로 요란스럽게 목소리라도 전하고 싶다.
어서 일어나야 한다고. 이 이상 공백이 길어지면 탐욕스러운 고룡들이 눈치채고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흐음, 일단.”
이어진 말을 들은 블레어는 좌절을 느꼈다.
“내 힘으로는 안 되겠군. 너무 강력한 결계야. 차라리 다른 고룡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말꼬리를 흐린다. 자기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모양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엘프 따위가 감히 자기한테 전령 짓을 시키냐고 날뛸 게 뻔하군.”
블레어가 생각한 이유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동일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다른 방도가 없을까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켄티우스는.
“이런, 생각해보니 우스운 일이군. 고민할 필요도 없었어.”
뭔가 깨달은 듯한 어투.
그는 갑자기 미소를 짓는다. 이 젊은 용이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보이는 웃음이었다.
켄티우스는 엘프의 옆에 선 남자를 턱짓하며 말했다.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바로 곁에 두고도 내게 질문하는 꼴이잖아?”
“설마?”
엘프와 드래곤은 동시에 한 곳을 보았다.
“어, 어? 왜 그러세요?”
그들의 시선을 받은 막내가 잔뜩 긴장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우울해지겠지만, 일시적으로나마 기분이 좋아진 켄티우스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엘프도 드래곤만큼 신성력과 거리가 먼 종족이니 모를 수도 있겠군. 신성력과 마력은 둘 다 마나를 매개로 하지만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야. 상성이 아주 안 좋지.”
“아, 그럼?!”
“지구 최고의 능력자라고? 고위 사제들은 신성력을 회복 이외의 방법으로 구현할 수 있어. 서로 교신하기 위해 신성력에 목소리를 싣기도 하지. 그걸 한번 시도해 보라고.”
젠킨슨의 결계를 뚫기 위해, 이번에는 마법 대신 신성력으로 시도해보라는 충고였다.
엘프는 탄식했다.
“세상에, 제가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온 셈이군요!”
블레어는 당장 결계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켄티우스가 기분이 좋을 때 한 가지 더 확인할 것이 있었다. 그녀는 젠킨슨과 켄티우스가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질문했다. 켄티우스는 ‘드래곤 하트’라는 결정적인 키워드만 제외하고 젊은 도둑 남녀와 고룡 사이 오간 대화를 거의 다 들었기에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답을 얻은 블레어는 다급하게 막내의 손을 잡고 뛰어나갔다. 켄티우스는 그들의 뒷모습을, 정확히는 둘 중 성직자 쪽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들이 사라진 뒤, 간만에 식욕이 돌아온 켄티우스는 아공간을 열었다.
“헉! 비서님! 처, 천천히!”
블레어는 막내를 잡아당기듯 끌고 달렸다. 마음이 급했다. 켄티우스의 말 대로 될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일단은 시도해 볼 일이다.
젠킨슨의 연구실로 향하며 비서는 애탄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녀는 경애하는 레드 드래곤이 무사히 깨어날 수 있기를 갈망했다.
‘회장님··· 제발, 일어나세요!’
***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고!”
젠킨슨은 죽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주저앉아 울고 있을 거야? 이제 일어나. 고대 종족 놈들에게 복수해야 할 것 아닌가!”
젠킨슨은 슬픔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귓가에 부서지는 누군가의 재촉을 무시하고 그는 흐느꼈다. 가슴이 결결이 찢어지는 아픔이 느껴졌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죽을 것 같았다.
너무도 슬퍼서,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아아, 아버지! 어머니!”
전쟁터 최전선에서 날아든 비보를 젠킨슨은 믿을 수 없었다.
“두 분이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다니! 고대 종족 따위에게, 두 분 같은 고귀한 혈통의 드래곤이!”
젠킨슨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뇌룡은 이해하기 힘든 듯 인상을 찌푸렸다.
“고귀한 혈통이라니··· 자네 가족들은 예전부터 그 기괴한 소리를 고집하더군. 하긴, 자네가 특별하긴 하지. 자네 같은 강력한 드래곤이 후방을 계속 지킬 수는 없어. 자, 나와 함께 가세. 복수를 해야지!”
젠킨슨은 눈물을 닦아냈다.
“복수···!”
“그래, 복수! 자네도 알겠지만 전황이 심상치 않아. 분명 지난 전쟁 때는 허접하기 짝이 없었던 놈들이 갑자기 보도 듣도 못한 무기와 신기술을 가지고 돌아왔어. 그 때문에 결국 중요한 행성까지 하나 빼앗겨버렸다고! 이미 고룡들은 물론이고, 천 살도 넘기지 못한 젊은 용들까지 징집되는 판이네. 자네도 작고한 양친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나이 지긋한 고룡이잖나. 당장 그 힘이 필요해!”
“······알겠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최전선으로!”
“잘 생각했네!”
골드 드래곤 젠킨슨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머리 위를 노려보았다.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 너머, 적군이 주둔한 방향을 향해 다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기필코 두 분을 위해 복수하겠습니다. 그리고··· 놈들에게 빼앗긴 두 분의 시신을 반드시 되찾겠습니다!’
젠킨슨은 고인이 된 부모의 유지를 가슴에 새겼다.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고귀한 혈통의 심장은 그에게 계승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