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70
271. 나의 가장 소중한 (6)
***
그것들은 얼핏 검은 바다 표면에 부글거리는 물거품처럼 보였다. 또는 수면 위로 떠밀려 흐느적대는 해파리 머리 같기도 했다.
개중 어떤 것은 매우 투명하여 어둠에 묻힌 채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했다. 오래 굶은 슬라임일수록 육신의 투명도가 높았다.
‘그래, 여기로.’
성간 부유 슬라임 떼는 사방에서 잡아당기는 항성의 인력과 상관없이 그들이 의도한 방향대로 움직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시프-1이 의도한 방향이겠지만.
아시프-1은 우주 생물의 집단 이동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경로는 엔델리온의 별을 정면으로 관통하게 되어 있었다.
‘옳지, 잘 한다.’
그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모은 슬라임의 수는 수천만에 이르렀다.
물론 저 많은 수를 전부 세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니까.
그러는 대신 그는 불특정 다수의 정신에 접촉하여 몇 가지 메시지를 남겼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 저 방향에 어마어마한 양의 코발트가 매장된 소행성군이 있다!
춤으로 꽃의 위치를 동료들에게 알리는 꿀벌처럼, 우주 슬라임 역시 원시적 텔레파시로 동료들에게 정보를 공유한다.
일용할 양식, 즉 광석의 위치를 차례로 전파하며 자연스레 무리의 이동 방향이 정해지는 것.
‘나는 그 물꼬를 터 주기만 한 거지.’
그 가짜 뉴스는 몹시 구미가 당기는 특종이었다. 가뜩이나 요즘 먹을 것이 부족해진 그들에겐 말이다.
결국 슬라임들은 광분하여 우주를 가로지르며 대이동을 시작했고, 그 길목에서 기다린 것은 기겁한 엔델리온들의 반격이었다.
– 슬라임? 사격으로 쫓아 내!
모성 주변을 공전하는 인공 위성은 진짜 별을 모사한 구체 형태였다. 슬라임의 접근을 감지한 즉시, 구체 가운데 금이 가며 전구 덮개가 열리듯 내용물이 드러났다. 안에 숨어있던 붉은 동공 같은 사출구에 빛이 어리고, 끓어오른다.
충전이 끝나고.
파아아앗!
위성들이 일제히 붉은 레이저를 발사했다.
그것에 맞은 슬라임들은 둘로 쪼개져서 분열 생식하거나, 그럴 기회를 놓치고 잿더미가 되었다.
하지만 공격은 최전선의 일부를 타격하는 데 그쳤다. 동력을 크게 소모하지 않은 경고성 사격. 엔델리온들은 슬라임 떼가 궤도를 틀기를 기다렸다. 평소에 그러하듯이.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음, 그렇게는 안 되지.’
컴컴한 우주 속에 몸을 숨긴 채, 아시프-1이 미소지었다.
슬라임 사이 오가는 정신파에 그가 발한 거짓 정보가 스며든다. 간단한 정보 교란.
곧, 무리에는 상반된 정보가 공존하여 퍼졌다. 하나는 저 앞에 위험한 것이 존재한다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정보가 오류이며 궤도를 수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진실은 곧 가짜 정보에 묻혔다. 거짓을 전하는 슬라임 수가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시프-1이 손을 쓴 결과였다. 행렬은 태양계 규모로 이어졌고 먼 전방의 일을 뒤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잘못된 길로 계속 나아가는 그들을 보며 아시프-1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너희들은 거짓말의 개념을 모르는군.’
그렇기에 다수가 떠드는 내용을 의심 없이 신뢰한다.
‘거짓말 역시 사람의 것이지. 너희는 아직 사람보다 짐승 쪽에 훨씬 가까운 종족이구나.’
아시프-1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음?’
그는 순간 그 생각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엔델리온의 모성에서 그가 기대한 반응이 나오고 있었다.
***
외우주감시부대의 당직실.
두 명의 엔델리온 중 사수 쪽이 말했다.
“위에서 지시가 왔다.”
“어떻게 하랍니까?”
저 슬라임 떼가 이상 행동을 보이는 경우는 기존에도 종종 있었다. 식량인 광물성 자원이 자연계에서 점차 씨가 말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종족은 용족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빠르게 그것들을 채취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오늘처럼 대규모로 모여 집요한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는 처음이다. 촉수 당직병들은 상부의 판단을 청했다.
그 결과는.
“어쩌긴, 우리가 예상한 대로지.”
끝도 없이 몰려드는, 생긴 것은 귀엽지만 하는 짓은 흉악한 저 생물들을 어찌 할 것인가? 떠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부대 관할의 공격 위성을 총동원하여 수천만 마리나 되는 무리를 완전히 쓸어버리거나···.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저 슬라임과 굳이 충돌하는 대신 엔델리온 측이 이동하거나.
“왕실에서 그냥 저놈들 이동 경로 밖으로 행성을 옮길 모양이다.”
별 수십 개를 덮을 규모로 몰려오는 슬라임을 전부 광자포로 휩쓸어 버리는 것보다, 이쪽의 별 위치를 그만큼 움직여서 피하는 쪽이 자원 소모가 적다.
더군다나 지금은 전쟁을 앞두고 마정석 공급이 끊긴 절체절명의 에너지 위기 사태. 낭비는 최소화해야 마땅했다.
사수는 계기판에서 몸을 떼고 편하게 몸을 띄웠다.
“이미 우리 촉수를 떠난 일이야. 그냥 가만히 보고 있으면 돼.”
***
아시프-1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
한 자리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던 엔델리온의 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시프-1은 저 안정적인 움직임이 가장 앞선 세대의 무반동추진엔진 덕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봤자 창조주의 기술을 훔친 것이지만.
행성은 스스로의 동력으로 미끄러지듯 어둠을 가로지른다. 주변을 공전하던 인공위성들도 자연스레 함께 이동한다.
그러자 아시프-1이 노린 현상이 이어졌다.
—!
그의 눈에는 보인다.
저 행성의 대기권 경계를 감싼 왜곡장. 외부 침공을 막기 위한 그 결계는 본래 고요한 호수의 표면처럼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파도치듯 결계 전체가 출렁인다. 행성이 이동하고 아티팩트가 실시간으로 좌표를 재계산하며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흔들림.
물을 가득 채운 컵을 아무리 조심스레 옮겨도 내용물은 출렁이기 마련이다. 그런 미세한 균열도 아시프-1에게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그의 두 눈이 빛났다.
‘텔레포트!’
약간의 현기증이 그를 덮친 직후.
아시프-1은 환한 빛이 가득한 드넓은 평원 위에 서 있었다.
공간 왜곡장을 뚫고, 행성 지표면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틈도 없었다.
‘아이고! 조심.’
팟!
아시프-1은 바로 몸에 은닉 마법을 두른 뒤 그곳에서 물러난다.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제대로 도착했군.’
어느 쪽을 향해도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지상에는 굴곡이 전무했다. 발목을 스치는 풀은 관상용으로 시선이 닿는 모든 땅에 빼곡하게 자생하고 있다. 흔히 보이는 산맥은커녕 뒷동산 수준으로 솟아오른 지형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별이 처음부터 이런 형태였을 리는 없다. 전부 깎아내서 평평하게 만든 것이다. 감시와 관리가 편하도록.
당연히 생태계는 파괴되고 기후에 큰 영향을 주며 빛을 피할 그늘 한점 존재하지 않지 않지만 어차피 그 촉수들은 이런 야외에 나올 일이 거의 없다.
엔델리온 언어에는 집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속담이나 관용구가 수백 개 넘게 존재하는데, 그중 90%는 비슷한 의미를 여러 수사법으로 변주하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걸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뜻이었다. ‘집 밖은 위험해.’
아시프-1은 고개를 들어 그들의 집을 바라보았다.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엔델리온의 집은 지상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공중에 부유하고 있었다. 그걸 본 아시프-1은 인간들의 도시를 마주한 개미가 된 느낌을 받았다. 몸 길이를 잴 때 킬로미터 단위를 사용해야 하는 생물의 거주지인 것이다.
기존 생태계는 절멸시켜 놓고, 정작 그들 거주지역의 생김새는 자연에서 본 딴 듯한 형태였다. 아시프-1은 그것이 탐스러운 포도송이, 혹은 얇은 막을 벗겨낸 생선의 알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동그란 알갱이가 옹기종기 모여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 저 구체들은 밋밋하게 보여도, 실상은 각각이 내외부가 반전된 행성이나 마찬가지다.
저런 식으로 소규모 인조 행성이 결집된 ‘덩어리’가 일정 거리를 두고 하늘을 빼곡히 덮고 있었다.
‘자, 그럼 일을 시작해 볼까?’
오늘 아시프-1이 이 작업을 통해 꾀하는 목표는 여러가지다.
일단 첫째로, 자신들이 원한다면 이 행성 위치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적에게 각인시키는 것.
‘내 발 도장을 확실히 남긴다.’
토드나 카바이트가 거주하는 행성은 채굴기지 및 용릉 같은 주요 거점 가까이 위치한다. 이미 어느 정도 밀집하여 몰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엔델리온만 나머지와 거리를 두는 기조를 유지한다. 이게 더 안전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해 줘야지.’
다른 종족과 뭉쳐야 더 안전할 수 있다는 개념을 촉수들 머릿속에 박아 넣는 것.
발상을 전환하려면 충분한 위협이 수반되어야 할 터다.
아시프-1은 떠나오기 전 창조주가 말한 내용을 떠올렸다.
– 두 차례에 걸친 드래곤들과의 전쟁 때도 엔델리온의 피해는 미미했어. 적어도 전장에서 죽은 촉수는 없었지. 애초에 전장에 나선 적이 없으니까. 심지어 드래곤들조차 그들의 행성을 타격하는 데 실패했고.
그 결과 대다수의 촉수들에게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앞으로 아무리 전황이 악화되어도 왕실에서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주리라는 기대가. 토드나 카바이트가 아무리 압력을 넣어도 그들만큼은 안전하게 남으리라는 희망이.
거칠고 잔혹한 싸움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다른 두 종족이 수행할 것이며, 엔델리온들은 안전한 후방에서 열심히 무기나 만들면 된다는 낙관.
– 그 기대를 처참하게 무너뜨려야 해. 더 이상 그들의 본토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공포를 심어줘야 한다. 그게 네가 할 일이야.
팟!
아시프-1은 아공간을 열었다. 거기에서 납작한 물체를 하나 꺼낸다.
그것은 엄지손가락 크기의 붉은 결정을 중심으로 주변에 연결 부위 역할을 하는 기계장치가 붙은 형태였다.
그는 내용물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레파탐 족 수준에서 이 정도면 애쓴 거군.’
이것은 세눈박이들이 운영하는 마정석 라인에서 민준의 지시에 따라 만든 물건이었다.
드래곤 하트를 안정적 형태의 마정석으로 변환하는 대신, 열과 압력에 최대한 예민하고도 강렬하게 반응하도록 변조한 물체.
한 마디로, 드래곤 하트 폭탄이다.
찰칵!
어깨에 가져다 대자 기계 파트가 움직이며 단단히 견착되었다. 마치 갑옷의 어깨 장식처럼.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쉭! 쉭! 쉭!
찰칵! 찰칵! 찰칵!
아공간에서는 동일한 폭탄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시프-1은 그것들을 몸 각 부위에 붙여 나갔다. 폭탄과 폭탄 사이의 연결부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매끄럽게 이어졌다.
잠시 후, 그는 붉은 결정을 조립해 만든 갑옷 차림의 전사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 결정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공포에 몸을 떨게 만들 형상이었다. 지구 문물에 비교하면 다이너마이트를 온몸에 두른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위력은 그런 재래식 폭탄과 비교할 수가 없다.
온몸을 폭탄으로 덮은 아시프-1은 기지개를 쭉 켜더니 어깨와 목을 돌리며 몸을 가볍게 털었다.
‘옛날 생각나네.’
과거에 위원회는 아시프-1을 이렇게 불렀다.
우주 최악의 테러리스트.
당시의 대부분의 공작 활동은 세뇌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때처럼 쉽게 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의 몸을 덮은 결정이 흉흉한 빛을 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공격할 테면 공격해 봐라. 너희 보금자리도 함께 날려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면.
민준과 엔델리온 왕 사이 장서갈등은 예상대로 지극히 폭력적인 형태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델이 알려준 정보를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아시프-1은 타깃 시설들 위치를 가늠했다.
‘동선은 대충 이 정도면 되겠고.’
옛날 아시프-1이 잡힌 결정적인 이유는, 세뇌 능력에 비해 육체 능력은 크게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
더군다나 저 촉수들이 아직 예측하지 못하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설사 이 행성이 경로에서 물러나 길을 내준다고 해서, 슬라임들이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럼, 간만에 솜씨 좀 발휘해 볼까.”
아시프-1은 안전제일주의 보신주의자 촉수들을 미치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전하! 그, 급히 말씀드릴 내용이!”
가상 현실에 의식을 가라앉힌 도중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엔델리온의 왕은 짜증을 느꼈다.
또?
그녀는 가상의 회의실에서 다른 행성의 위원들과 향후 방안을 논의하던 참이었다.
아시프-666이 보낸 그 괴기스러운 영상 편지는 앞으로 협상은 없을 것임을 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큰 방향이 정해졌음에도 고대 종족들은 사소한 부분에서 여전히 불협화음을 자아냈다.
가뜩이나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산 너머 산으로 모성 근처에 접근한 우주 생물 때문에 양해를 구하고 회의를 잠깐 중단하기 까지 했다.
마정석 낭비하지 말고 이쪽이 피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회의를 재개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신하가 끼어든 것이다.
왕은 가상 현실과 의식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동시에 말했다.
“왜 그러느냐? 그 슬라임들 건이라면 이미 지시를 내렸잖느냐. 행성을 이동시키라고···.”
말을 채 끝내기도 전, 왕은 당황스러운 정신파를 느꼈다. 인공 지능이 쩌렁쩌렁 울리는 파동이었다.
– 경고! 경고!
“이건 무슨?!”
왕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707 연구개발지구에, 원인 미상의 폭발이 일어났다고?”
악몽과 같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