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76
277. 나의 가장 소중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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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시프-26,188,280’은 한때 지구에서 윌리엄 에반스라는 이름을 쓴 적이 있다.
그 가명으로 활동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당시 파견된 지구라는 차원에 좀 익숙해질만 하니 바로 재배치 명령을 받았기에.
처음에는 견책성 이동이 아닌가 의심했다. 지구에서 맡았던 첫 번째 작전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시프-666이라는 탈옥범을 막기 위해 뉴욕의 도약 터미널을 지키는 임무였다.
남자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그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재앙에 가까웠지.’
수형자들의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초월적인 주문을 뻥뻥 터뜨리던 탈옥범은 결국 지구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한때 아쉬탈에서 아시프-666을 알고 지낸 그조차 경악한 강력한 힘이었다.
남자가 그렇게 몸을 옮긴 세계는 위원회 본부가 있는 차원 #00-001과 맞닿은 이웃 세계였다.
그곳에는 남자 말고도 다른 곳에서 일하던 수형자들이 바글거렸다. 다들 갑자기 전달된 재배치 명령 때문에 당혹해하며 이동한 참이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할 일이란···.
‘아시프-666의 군대를 막을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군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탈옥범이 위원회에 맞서 군대를 조직했단다.
위원회가 수형자들을 여기 모은 목적은 평소와 같은 국지적 소탕 작전 따위가 아니었다.
이건 전쟁이었다.
‘탈옥범이 전쟁을 일으키다니! 아시프-666··· 너, 대체 정체가 뭐였던 거야?’
당시는 민준이 교단 본부에서 157척의 전함을 강탈한 직후였다. 그는 교단 주교들이 조작법을 익힐 시간을 주는 동시에 마정석 생산라인이 완성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위원회는 그 틈을 타 차원 곳곳의 수형자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이거, 여차하면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다!’
아시프-666이 무슨 기적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위원회가 그를 매우 큰 위험으로 간주하는 것은 확실했다.
그간 경험한 어떤 작전보다 리스크가 크다는 뜻.
‘얌전히 퇴직금을 모으다 보면 해방될 것 같았는데, 이런 위기가!’
이러다 자유와 기억을 되찾기 전에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
위원회는 수형자를 달래려는 듯 어마어마한 보수를 약속했다. 하지만 한때 윌리엄 에반스라 불린 남자는 여기서 목숨을 걸고픈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건 그의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당히 싸우는 시늉만 하자. 어차피 수형자는 나 말고도 엄청 모여 있잖아? 심지어 이제 막 노역을 시작한 죄인들까지 다 소집한 것 같은데···.’
1년차 수형자들을 보니 문뜩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지구에서 만났던 죄인. 스스로 이런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어떤 드래곤이. 범행 동기는 수형자가 되어 새 몸을 받고 싶다는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그 용도 어쩌면 이 중에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름이 ‘레오’라고 했던가?’
지구에서 자신이 감시하던 드래곤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인지, 이런 상황이 되니 더욱 실감한다.
결국 수형자는 한번 쓰고 버리는 장기말에 불과한 것이다.
‘난 대체 기억을 잃기 전에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이런 신세가 된 거야? 젠장.’
기억도 나지 않는데 후회를 해 봤자 소용없는 일. 진정한 의미의 참회나 반성도 불가능하다.
이런 것을 진정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노역은 벌이라기 보다 복수에 가깝지 않을까? 나는 대체 무슨 짓으로 위원회 심기를 건드린 걸까?
남자의 생각은 돌고 돌아 결심으로 이어진다.
‘적당히, 안 죽을 정도로만 도망다녀야겠다.’
그 말고도 대다수의 수형자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시간을 보내던 중.
마침내 때가 왔다.
우주 구석에 숨어있던 85척의 구형 모함이 움직이고, 그를 비롯한 수형자들은 소형 전투기 조종간에 앉아 출격을 기다렸다.
남자는 다시금 다짐을 되새겼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조심히 다녀야···.’
그 순간, 그의 내면에 쌓여 있던 두터운 무언가에 금이 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핑핑 돌며 현기증이 엄습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도, 그는 얼마 전 떠올린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대체 나는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벌을 받고 있는가?
‘나는···!’
남자는 종이에 번지는 물감 같은 기억을 보았다.
당사자는 몰랐지만 위원회가 의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구속되기 전, 사내는 반(反) 위원회 사상에 근거한 테러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시르키즈라는 이름의 엘프였다. 그는 시르키즈의 사상에 감화되었다.
‘아아, 시르키즈!’
그녀의 호소는 모두의 가슴을 울렸다.
달란트를 도구로 한 위원회의 경제 지배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는 외침.
사람들을 착취하는 드래곤의 위에 위원회가 존재한다는 진실을 안 뒤, 그는 시르키즈를 따라 차원을 돌아다니며 그녀의 사상을 전파했다.
시르키즈와 추종자들에게 수배령이 내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처하여 미끼가 되어 그녀를 도피시킨 뒤 구속되었다.
‘그래, 그랬었다. 나는 시르키즈를 존경하고, 숭배하고··· 사랑했어.’
기억을 잃고 수형자가 된 후에 시르키즈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드래곤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으로, 시르키즈가 현재 ‘타의로’ 지구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함에도 그 소문은 사내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어쩌면 애초에 내가 지구 파견을 자원한 것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두개골에 금이 가고 뇌가 들끓는 듯한 고통이 그를 헤집었다. 남자가 잠시나마 되찾았던 기억이 형태를 바꾸며 정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추억이 뒤틀리고, 현재를 인식하는 시선이 덧칠되었다.
전투기에 탄 채 그는 지독한 분노를 느꼈다. 통제할 수 없는 노기였다. 그는 레이더에 표시된 적군을 보았다.
158척의 우주모함.
저것은 위원회의 것이다. 남자의 철천지원수. 그가 해치워야 할 적.
왜곡된 기억이 정신을 뒤흔든다. 저 함대를 그대로 두면 위원회는 우리 땅을 침범할 것이다. 그래서 내 동료에게 목줄을 걸어 노예로 굴리고, 우리 아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할 것이며, 우리의 터전을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할 죽음의 땅으로 만들 터.
또한 우리의 지도자 시르키즈 역시 본보기로 형언할 수 없는 짓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막아야 한다!’
이 한 몸을 바쳐 물리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은 운명은 비참한 노예의 삶뿐이므로.
이미 한참 전에 붙잡혀 이미 노예로 부림 받는 현실을 생각하면,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 충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 목소리에서 귀를 뗄 수가 없었다. 더이상 다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저들을 죽여 없애라는 강박 밖에는.
“죽여! 다 죽여버려!”
조종석에 앉은 아시프-26,188,280는 분노 속에서 포효했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에게는 그렇게라도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있었다.
– 출격!
남자가 탄 전투기가 어둠 속을 향해 화살처럼 쏟아져 나갔다.
그리고 강렬한 빛이 우주를 뒤덮었다.
***
대형 스크린 속, 수형자들의 목숨이 부질없이 사그러든다.
교단의 공격이 거세지자 몇몇 전투기는 궤도를 비틀었지만 그 방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처음부터 공격 대상으로 점찍은 한 척을 향한 돌진.
그런 움직임은 함포 장교들이 이동 경로를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격이 이어지고, 전투기가 폭발하며 열기와 불꽃의 파동이 사방에 퍼져나갔다.
죄인들이 실시간으로 죽어 나간다.
‘죄인?’
델은 방금 떠올린 단어를 속으로 뇌까렸다.
‘위원회가 저들을 죄인이라 낙인찍었지만.’
그 죄는 과연 누구의 기준인가? 판결은 절대적이고도 정당한가?
저 중엔 실제로 천인공노할 범죄자도 존재할 터다. 예를 들어, 델이 복역했던 차원의 독재자처럼··· 억 단위의 사람을 학살하고 굶겨 죽인 끔찍한 자들 역시 섞여 있을지도.
하지만 델은 안다. 위원회가 벌을 내린 모든 이들이 그런 괴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저 중에는 단지 위원회에 거역했다는 이유만으로 수형자가 된 사람들도 있어. 그런 자들조차 저렇게 잔혹하게!’
교단의 광자포가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수형자가 탄 전투기들은 대형이라고 할 만한 것을 포기한 채 각개 돌격했다. 말 그대로 잠시도 쉬지 않고 미사일을 쏟아냈으므로 개중엔 결국 수납고가 바닥난 기체도 있었다.
그런 전투기들조차 상식을 따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다. 전투 속개를 포기하고 모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는 대신, 경로를 유지한 채 오히려 박차를 가했다. 남은 동력 따위는 계산하지 않겠다는 듯이 가속했다. 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돼!”
교단 모함의 장갑 위로 전투기들이 유성처럼 쏟아져 충돌하기 시작했다.
자폭 공격을 받은 전함의 실드에 둥근 충격파가 계속 꽃을 피웠다. 근처의 다른 모함이 지원했지만 방어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흐름은 끊을 수 없었다.
뒤에서 대기하던 적군의 모함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전투기들이 만든 탄막 뒤에 숨어있던 전함 중 다섯 척이 전속력을 다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네 척이 나머지 한 척을 중심으로 상하좌우를 감싸는 형태로 항해를 했다. 그러자 미리 전장을 빼곡하게 덮었던 전투기들의 움직임도 변했다.
지금까지 공격에만 치중했던 전투기들 역시 모함의 궤도를 감싸며 보호했다. 그 상태로 스스로 방패가 된다. 그들은 전함으로 날아드는 공격을 대신 맞고 폭발했다.
전투기들이 하나씩 격추되면서 결국 교단의 광자포는 적의 전함까지 도달했다. 미친 듯이 질주하던 다섯 척에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결국 그중 한 대가 불꽃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한 대씩, 전함이 박살나는 과정에도 돌격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남은 전함 한 대가 깊숙이 찌르듯 접근했다. 타깃이 된 교단 모함은 이미 쉴 새 없이 때려 맞은 여파로 실드가 너덜너덜해진 뒤였다. 뒤를 생각 안하고 모든 동력을 쏟아 부은 적측 모함의 속도와 질량이 끝을 모르고 부풀었다.
마침내 두 척의 모함이 충돌한 순간.
—-!
어둠에 눈부신 구멍이 뚫렸다.
강렬한 섬광과 불덩어리가 흩날리는 가운데, 교단의 모함은 적군 전함의 자폭과 함께 산화했다.
잔해가 백열광과 함께 퍼지는 장면을 보며, 델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아군이 전사한 것만큼이나, 적의 움직임은 델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교단의 모함 한 대를 없애기 위해, 적측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소형 전투기와 다섯 척의 모함을 소모했다.
이 전투에서 교단이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수적으로도 차이가 나고 이쪽의 모함 성능이 훨씬 우월하다.
그럼에도 적은 전멸을 각오하고 이쪽 전력을 소모시키려 할 것이다.
“아무리 수형자라고 해도, 자살을 강요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아시프-1이 날카로운 어조로 답했다.
“한정된 시간 동안이라면 가능합니다. 저번에 엔델리온 아이들을 시켜 억지로 차원을 넘게 만든 것처럼요.”
공포의 깊이를 계량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아시프-1은 다른 모함의 장교들과 정신을 연결하여 함대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조종했다. 적의 전략은 명확해졌고, 아시프-1도 그에 대응하여 공격 대상이 된 특정 모함을 보호하기 쉽게 진형을 밀집시켰다.
한편 델의 정신은 분노와 절망, 허탈감 사이의 어딘가에서 부유했다.
‘어머니.’
그녀는 이틀 전 민준에게 질문했다.
동족에게 구원의 기회는 정말 없냐고.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이가 있다면, 혹여 비참한 처벌을 면할 가능성이 있냐고.
태초의 종족이 민준에게 소중한 사람들인 것처럼 엔델리온 역시 그녀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이 돌아가는 상황은 도저히 그녀가 낙관을 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어머니,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죄를 지으려는 거죠?’
그때, 등 뒤에서 차디찬 목소리가 들렸다.
“찾아라.”
아시프-1과 델의 고개가 황급히 돌아갔다.
“아버지!”
“카인!”
민준이 함교로 돌아왔다.
그를 본 델의 몸이 흠칫 굳었다.
‘피비린내?!’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낀 그녀와 달리 아시프-1은 다른 의미로 전율했다.
그동안 함내에 수집한 모든 용을 불러 모았던 창조주의 몸에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강렬한 생명력이 끓어 넘쳤다.
그것에 잠시 정신이 팔린 탓에 대답이 살짝 늦었다.
“네? 죄송합니다. 뭘 찾으란 말씀이십니까?”
민준은 이미 상황을 파악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한 척을 잃은 사실에 분노하지도 않고, 바로 해야 일에 집중한다.
“놈들이 수형자를 통제하는 도구는 네 능력을 흉내내 만든 거야.”
기억을 지우고 암시를 심는 기술은 위원회가 아시프-1을 체포한 경험에서 얻은 것이다.
“탈주를 막는 간단한 암시라면 몰라도, 자살까지 종용하려면 능력의 근원이 가까이 있어야 한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사실이었다.
아시프-1의 세뇌가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기 위해서는 그의 인지 범위 내에 대상이 있어야 한다.
‘자유 의지를 조작하는 도구는 그 스스로도 자유 의지를 지녀야 한다. 이미 우리가 오래전에 발견한 사실이야.’
민준은 아시프-1을 보며 말했다.
“위원회는 네 열화판 격인 능력자를 보유하고 있을 거다.”
한 명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민준은 그들에게 구속되어 기억을 삭제 당하던 날을 떠올린다. 아마 그때는 그의 시선이 닿지 않게 숨겨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 제가 저들 정신에 접속했을 때는 그런 흔적이 없었···.”
그렇게 말하던 아시프-1은 뭔가를 깨달은 듯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주변을 가득 메운 소형 전투기가 아니라, 아직 후방을 지키는 80척의 모함 쪽으로. 더 먼 곳까지 정신파를 보내 수색했다.
잠시 후.
“···찾았습니다!”
아시프-1이 눈을 뜨고 좌표를 말한 순간.
팟!
지휘실에서 민준의 모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