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75
276. 나의 가장 소중한 (11)
***
차원계 중심부.
엔델리온 측의 ‘긴급사태’ 때문에 중단되었던 위원회 고위급 회의가 재개되었다.
위원들은 한 명씩 가상 현실의 회의장에 접속하여 아바타를 투영한다. 의도적 교란이나 첩보 행위를 염려하여 그것은 현실 육신을 그대로 반영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엔델리온을 통솔하는 왕이자 그들 종족의 대위원 직을 맡은 그녀가 회의장에 등장한 순간 참석자들은 적지 않게 놀랐다.
‘저게 말로만 듣던 노화한 엔델리온인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왕의 외모에는 가시적인 변화가 있었다.
선제적 몸갈이 덕에 항상 생기가 넘치던 표피는 푸석푸석해 보이고 외눈 주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그들 행성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각하면 급격한 노화의 원인은 분명했다. 다른 종족은 상상할 수 없는 극도의 스트레스.
‘대내외로 어지간히 들볶였나 보군.’
‘우리로 따지면 하루아침에 전신의 털이 다 빠진 셈인가?’
엔델리온의 정신이 얼마나 민감한지, 또한 그들의 정신이 육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달란트 수급이 원활했다면 미용 목적에서라도 몸갈이를 했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인 터라 지금 몸을 고수하는 것.
“한 가지 요청할 것이 있습니다.”
이어진 왕의 말에 참석자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상석의 카바이트가 묘한 어조로 되묻는다.
“당신들 행성을 우리 거주지 근처로 옮기겠다고요?”
그렇게 물은 카바이트는 납치된 동족을 대체하여 정식으로 대위원에 오른 자였다.
선대가 고기 분재 신세가 된 사실이 영상으로 확인된 이상 계속 ‘대리’ 직함을 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구조할 계획도 없긴 했지만.
신임 대위원에게 촉수왕이 피곤한 어조로 긍정했다. 그녀를 보며 카바이트는 생각한다.
‘저 촉수 괴물들의 피해가 우리 예상 이상일 수도 있겠군.’
카바이트와 토드는 이번 테러의 규모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촉수들이 구체적 언급을 피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파악한 바에 따르면 촉수왕을 큰 위기에 빠뜨린 원인은 물질적인 손해보다도 국민들이 얻은 정신적 피해, 즉 트라우마다.
지금 촉수 왕국 주민들은 반광란 상태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본토 침공을 허락한 왕을 여차하면 끌어내릴 기세다.
반란이 성공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전쟁 중이라서가 아니다. 이 상황에 새로운 왕가의 시조가 되겠다고 나서는 지원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왕은 몹시 지친 상태다.
‘골치가 아프군.’
상황은 그녀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죽은 딸에 대한 소문이 권위를 위협하는 한편, 충격에 빠진 몇몇 촉수들 사이에 ‘반전(反戰)론’이 슬그머니 싹트고 있었다.
내가 다칠 확률이 제로(0)가 아니라면 차라리 싸우지 말자는 여론.
그들 특유의 자기중심적 이상주의에 근거한 주장 때문에 왕은 기가 막혔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소리! 이제 와서 휴전을 주장해 봤자 아시프-666이 듣는 척이라도 할 것 같은가?!’
결국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행성을 옮기게 된 지금.
왕은 불안했다.
‘아시프-666도 이 결과를 예측했을 터인데. 우리를 한군데 모아 놓으려는 것이 진정 그가 의도한 바라면. 이건 몹시 위험하다.’
이 불안감은 아시프-666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짐작할 수 없는 데에 기인했다.
반면, 카바이트와 토드 입장에서는 엔델리온을 가까이 둬서 나쁠 것이 없었다.
‘저 촉수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주둔지를 보호할 테니. 우리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안건은 빠르게 처리되었고, 이미 궤도를 바꿔 접근하고 있던 행성은 이동 속도를 높였다.
그런 다음에는 저번에 논의하던 안건이 다시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제일 큰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적에게 입힌 피해가 미미하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세 종족이 한 번씩은 돌아가며 피해를 입은 상황이다. 적의 본진과 본격적으로 충돌하기도 전에 말이다.
그런 반면 위원회가 파악한 적의 전력 손실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남은 기회가 얼마 없습니다. 여기까지 도달하기 전에 어떻게든 전력을 깎아 놓아야 합니다.”
잃을 것이 없기에 전병력을 한꺼번에 움직이는 기괴한 전술은 큰 골칫거리였다.
논의가 오간 뒤, 조세징수사령관을 맡은 토드 족이 화면에 데이터를 띄웠다.
“그럼, 합의된 대로 ‘그들’을 사용하겠습니다.”
카바이트의 대위원이 우려를 표했다.
“저건 사실상 고기 방패나 마찬가지인데··· 한꺼번에 소모해 버리면 전쟁 후에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촉수왕이 그 말을 비웃었다. 저 얼간이는 아직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지면 그 후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질 겁니다.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할 수밖에요.”
결국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
“아버지는 아직까지 안 나오셨나?”
“네, 그렇습니다.”
아시프-1의 질문에 윰투스가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그들은 함대의 최종 목적지에 가까이 와 있었다.
앞으로 딱 한 번 더 도약하면 바로 그곳에 도착한다. 차원 #00-001로 명명된 위원회의 본부에 말이다.
그리고 이쯤 되자 그전까지 쓰던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적의 근거지를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민준의 함대는 문제를 조우했다.
“드래곤이 살지 않는 영역까지 넘어오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군.”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드래곤의 인구분포가 낮아지다가 이제와 마침내 0에 달했기에 생긴 문제였다.
윰투스가 그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저희가 여기까지 온 것에는 경유지의 지배자 노릇을 하던 드래곤들이 용인을 한 이유도 크니 말입니다.”
개중에는 광산 조합의 그들처럼 훼방 놓는 이들도 소수 존재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지나가도록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덕분에 아시프-1은 터미널을 점령하여 그곳 설비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고.
그런데 여기에서는 같은 방법을 쓸 수 없다.
“터미널을 아예 파괴해버리는 건 예상 범위 내 반응이긴 했지.”
육상전으로 따지면 적군 진로 상 위치한 다리를 끊어버리는 전술.
하지만 아시프-1은 당황하지 않았다. 백 육십여 명의 아이들이 여전히 그들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창조주가 이번에야 말로 그들을 동원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민준은 이렇게 말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이어서 지시하기를.
“함내 모든 드래곤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라.”
그 지시에 따라 작게 변신한 용들이 줄을 지어 그의 방으로 이동했다.
그 수는 광업 조합이 있던 행성을 떠날 때보다 늘어나 있었다. 민준의 경고 아닌 경고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수작을 부린 드래곤들이 그 후로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들이 마주한 결말을 거의 비슷했다.
사람들은 용을 상대로 볼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그 사이 158척의 모함은 경유 차원의 한 행성에 주둔하는 중이었다.
위원회의 공격은 그 틈을 타서 이루어졌다.
***
적의 함대는 행성 대기권 밖에서 접근했다.
문명의 발전 단계에서 무기 사정거리는 탐지거리를 따라잡은 적이 없다. 민준의 함대는 적이 도달하기 전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먼 우주 공간 구석에 숨어있던 여든다섯 척의 함대가 레이더 망에 포착되었을 때, 지휘실은 극도의 긴장에 사로잡혔다. 에너지 반응은 레이더에 잡힌 85개의 광원이 각각 우주 모함 급 동력을 방출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광활한 우주를 가로지른 전파가 그것들의 형상을 시각화하는 데 성공했을 때, 델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던 구형 모함인데?”
태초의 종족이 전해준 기술을 엔델리온이 더 깊게 연구하고 해독함에 따라 지금은 쓸모가 없어진 모델.
“저걸 아직도 폐기하지 않고 남겨 뒀단 말이야?”
정확하게 말하면 위원회가 마지막으로 경험한 전면전, 드래곤들과의 전쟁 때 쓰던 모델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뒤 아시프-1은 전 함대에 고도 상승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대기권 밖에서 양측의 함대가 대치했다.
그의 창조주는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무얼 하는 중인지 아시프-1의 텔레파시에도 무응답이었다.
공식적으로 ‘사람’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은 교황은 일단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로 했다. 명목상 이 함대의 지휘관은 그다. 신에게 사람의 감투를 씌울 수는 없으므로.
거리를 좁히는 와중에도 모함은 포문을 활짝 열고 서로를 겨냥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니?!”
레이더에 표시된 광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적의 모함 사출구가 열리더니 그곳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소형 전투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상대적으로 전진 속도를 줄인 모함을 뒤로 한 채, 전투기는 빼곡하게 우주 공간을 덮으며 거리를 좁혔다.
함교에는 긴장감 서린 목소리가 울렸다.
“적군, 함포 사정거리까지 30초.”
델은 주먹을 꽉 쥐었다.
레이더에 표시된 광원 위치가 점차 가까워진다. 영상 스크린에 구현된 전투기들의 모습 역시 더욱 선명해졌다.
=“함포전 준비!”=
아시프-1은 매서운 눈으로 화면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함포 장교를 맡은 주교가 외친다.
“적군, 사정거리 내 진입!”
기다렸다는 듯 아시프-1이 명령했다.
“발사!”
사정거리가 긴 아측 공격이 먼저 시작되었다.
별빛과 같은 소나기가 어둠을 가로질렀다.
캄캄한 장막 위에 빛의 꽃망울이 터지며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별이 집단으로 산화하는 듯한 광경. 실제로 적군의 전투기가 피격될 때마다 초소형 인공 항성이 태어나 어둠을 집어삼켰다.
그런데.
“저게··· 뭐하는 거지?”
누군가 이해하기 힘든 듯 중얼거렸다.
점멸하는 폭발광을 뚫고, 소형 전투기들은 오로지 한 척의 배만 노려서 집중 포격했다. 육식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으려는 파리 떼처럼.
방어 따위는 전혀 엄두에 두지 않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기본적인 진형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포격의 장막을 만들어 적을 압박하고 우위를 잡으려 한다기보다는 어떻게든 적의 모함 한 척이라도 먼저 잡아서 동귀어진하려는 집요함이 느껴졌다.
물론 민준의 함대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이 퍼부은 광자포가 소형 전투기들을 휩쓸었다. 고요한 폭풍 속, 빛과 충격파가 난폭하게 확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기의 물결이 만든 파도는 멈추지 않았다. 피해를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듯한 공격.
격렬한 포화에 휘말려 동료들이 산화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끊임없이 달려든다.
“맙소사.”
그 장면을 보던 델이 중얼거린다. 그녀는 이미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고대 종족이 저런 전략을 쓸 리가 없어.”
위원회의 폭격기가 쏘는 미사일이 최전방의 교단 모함 한 척을 쉴 새 없이 때렸다. 백광과 열이 그 한 척을 감싸고 충격파가 계속 터졌다.
집중포화 대상이 된 배는 급속도로 동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장갑 위를 둘러싼 실드에 충격이 누적된 결과.
물론 그 사이에도 적의 병력은 빠른 속도로 격추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델은 혼란 속에서 생각한다.
적에게 나의 목과 팔다리까지 모두 내주고 나서 겨우 적의 손가락 하나를 꺾는 전략이지만.
만약 적에게 내어 준 것이 진짜 ‘내 것’이 아니라면?
“······!”
델이 아시프-1에게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마침 그들이 탄 지휘선도 충돌이 벌어지는 최전선과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뒤였다.
아시프-1이 적군의 정신을 살필 수 있는 거리라는 뜻이다.
=“복종하라!”=
정신파가 검은 허무를 뚫고 퍼졌다.
잠시 인상을 찌푸렸던 아시프-1이 혀를 찬다.
역시나 세뇌는 통하지 않았다. 아시프-1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안 뒤 그들은 정신을 보호하는 무기를 강화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포기하지 않았다.
“세뇌는 불가능하더라도.”
정신을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더라도 의미 있는 정보라도 빼내기 위해서 노력한다. 마법 암시로 보호된 장막 너머, 조금씩 새어나오는 의념의 파편을 살핀다.
그것을 관찰하던 아시프-1이 순간 얼굴을 굳혔다.
“이런.”
인상을 찡그리며 델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아시프-1이 말했다.
“말씀대로 저기 탑승한 자들 중에 고대 종족은 없습니다.”
엔델리온은 물론 토드나 카바이트도 전무하다.
“그럼?!”
아시프-1은 그들의 정신을 통해 파악한 정체를 말한다.
“저기 탄 자들은 전부··· 수형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