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74
275. 나의 가장 소중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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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의 고요를 깨고 아이 한 명이 목소리를 냈다.
윰투스나 델과는 달리 별로 놀라지 않은 투.
=무슨 놀인데··· 요?=
민준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놀이라니?”
=왕이 술래 먹는 놀이면 안 하고 싶어서··· 요. 반대로 왕이 술래를 정하는 놀이면 왕 해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왕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놀이면 제일 좋고.=
그는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아니, 지금 놀이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진짜 왕을 뽑겠다는 거야. 너희들 중에서.”
=우리들?=
“그래, 너희들. 엔델리온의 왕을.”
이번에는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듯 촉수를 사방으로 꼼지락거렸다.
델은 아직 얼이 빠진 표정이었지만 일단 민준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려는 듯했다.
‘그래서 내게 먼저 그 제안을 한 건가? 그런데 2순위가 왜 저 애들이야?’
아마도 이 자리에서 신의 의도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자는 사제, 윰투스였을 것이다.
‘그렇구나. 화신께서는 아예 새로운 왕조를 세우시려는 것이군!’
신을 부정하게 된 종족에게 다시 신을 가르칠 방법은?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편이 제일 확실할 것이다.
=우리들 중 대장을 뽑는다는 거네요?=
윰투스는 지금 아이가 생각하는 ‘우리’의 개념이 신의 의도보다 훨씬 좁을 거라 예상했다. 168명의 대표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 잠시만요.=
아이들은 윰투스 어깨 위로 내밀었던 촉수를 다시 등 뒤로 숨기더니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셋이 의견을 모으는 데에는 몇 분의 시간이 걸렸다.
민준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이거, 다른 애들도 같이 이야기하면 안 돼요?=
=걔네들 중에서도 대장 되고 싶은 애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맞아. 기회는 다 똑같이 줘야 할 것 같은데···.=
민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희에게만 허락된 기회다. 내가 말하는 왕은 단순히 너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식품이 아니야. 상황에 따라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하기도 하고, 다른 누구도 일하지 않을 때 홀로 일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엔델리온의 핏속에 숨은 겁쟁이 기질은 훌륭한 왕이 탄생하는 데에 지장을 주지. 너희 셋은 그나마 그런 유전자가 약하게 발현된 개체들이야. 그러니 이 중에 뽑을 생각이다.”
그러자 이어진 답은 민준으로서도 의외인 것 같았다.
=그럼··· 우리 셋 다 할게요.=
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꼭 왕을 한 명이 해야 하나요?=
그게 정론이긴 하지만.
민준은 바로 부정하는 대신 더 이야기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처음 그 말을 꺼낸 아이는 자신과 곁의 친구들을 차례로 촉수짓하며 말했다.
=저는 꼼꼼하고 이것저것 잘 기억해요. 여기 얘는 아무도 생각 못하는 기발한 생각을 잘 떠올리구요. 그 옆에 쟤는 다른 애들을 항상 웃게 만들어요. 우린 다 잘하는 게 달라요. 그러니까 같이 대장을 하면 일이 더 쉬워질 거에요.=
민준은 턱을 쓰다듬더니 중얼거렸다.
“···과두제(寡頭制)인가. 뭐, 나쁘지 않지.”
삼두 정치(三頭政治).
세 종족이 이끌어 나가는 현재의 위원회 체제를 축소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후계가 복잡해질 우려가 있긴 하군. 핏줄이 세 갈래로 나뉘니.”
그 말을 들은 윰투스는 자기도 모르게 등근육을 긴장시켰다.
그가 봐온 화신의 성정이라면 ‘귀찮게 되기 전에 정리를 해야겠군. 셋의 뇌를 뽑아 한 몸에 이식시킬까? 그러면 머리는 셋이지만 핏줄은 한 줄기이니 후계 문제가 깔끔해지겠군.’ 따위의 말을 이어서 뇌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준은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이들에게는 다행이었다.
아마도 윰투스에게도.
“세 가문의 연합 정치 구조로 못을 박으면 되겠군. 한때 그런 시대가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래, 알았다.”
볼일이 끝났다는 듯 민준은 아이들을 내보냈다.
윰투스는 애들이 샴-삼둥이 신세를 면했음에 안도하다가, 자신이 왜 이리도 이 어린 촉수들 신변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나 싶어서 위화감을 느꼈다.
심지어 위기를 넘기자 약간의 기대감마저 가슴속에 스멀거렸다. 이 아이들의 장래에 대한 기대감 말이다.
‘이 셋은 말 그대로 엄청난 뒷배를 손에 넣은 것이군.’
민준은 왕의 권력을 자신이 직접 부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신의 선택을 거역하는 자들은 신의 분노 또한 감당해야 할 터.
또한 신에게 인정받은 정당성은 왕이 백성을 향해 휘두르는 권력 역시 합리화할 것이다. 그 이상의 근거를 찾거나 대의적 절차를 밟는 일은 불필요했다. 그저 한 구절이면 충분했다.
‘신이 그것을 원하시고 흡족해 하시매.’
하늘의 손이 닿은 지도자이기에 자질에 상관없이 모두가 따라야 한다.
적어도 윰투스는 그 논리에 흠결이 없다고 여겼다.
‘흔히들 천년 왕조 따위의 단어로 왕가의 핏줄을 칭송하지만, 앞으로 이 아이들이 만들 가문들은 말 그대로 불멸성을 보장받을 터.’
왕가의 시조들을 따개비처럼 등에 붙인 채, 사제가 자리를 뜨고.
“···카인!”
델이 참았던 말을 쏟아냈다.
“왜 하필 저 애들 중에 뽑아야 하는 거야? 전쟁이 끝나고 기존 왕조를 존속시킬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적어도 머리가 좀 굵어진 어른들에게 일임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녀가 설득할 말을 더 고르던 순간.
휙!
그녀의 고개가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진 일을 델은 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돌아왔어.”
그 말을 하자마자.
팟!
둘만 있던 장소에 번뜩이는 빛과 함께 장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활기찬 목소리.
“자! 드디어 제가 돌아왔습···! 아니, 어머니?!”
작전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한 아시프-1.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몸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영혼을 볼 수 있는 아시프-1의 눈에는 영육이 한 번 떨어졌다가 다시 붙은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또한 좀 더 집중하니 그 육신이 폴리모프의 결과물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물질로 구성된 ‘인형’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구조는 아시프-1의 새 몸과 매우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아, 그게···.”
그동안의 일을 들은 아시프-1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다시 일그러졌다가, 또 소스라치게 놀라며 붉어졌다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는 음산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휘저어 놓고 올 걸 그랬군요.”
델은 그가 혼자 돌아온 사실에 주목했다.
아시프-1이 이번 작전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는 테러 그 자체였지만, 떠나기 직전 민준과 델이 각각 따로 당부한 내용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성자(聖子)는 그중 어머니의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했다.
“제가 들른 공장의 아이들은 구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예상대로 전부 동면에 들어가 있긴 했는데··· 세뇌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공격적인 암시까지 심어져 있더군요. 한 명 한 명 손을 대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터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델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아시프-1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전부 실패한 건 아닙니다.”
아시프-1은 아공간에서 빛이 일렁이는 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창조주를 향해 경건한 몸짓을 연출하며 바쳤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은 다행히 구해 올 수 있었습니다.”
“그건?!”
민준보다도 델이 먼저 반응했다. “그걸 왜 가져온 거야?”
아시프-1은 고개를 갸웃한다. “어라? 어머니는 모르셨습니까?”
아시프-1과 델의 시선이 교차하다가 결국 둘 다 방향을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신은 둘의 눈길을 묵묵히 받아내다가 말했다.
“그래, 내가 가져오라고 시켰어.”
미뤄두었던 설명을 할 때가 온 모양이다.
민준은 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델, 난 네게 두 가지를 약속했지.”
엔델리온은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민준은, 엔델리온을 학살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첫 번째 약속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야.”
“엔델리온이 멸종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
그 말을 곱씹던 델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
아직 지금 몸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 그리고 온몸을 굳히면서 외쳤다.
“지금 존재하는 엔델리온을 전부 죽이고 지금 가져온 배아들로 갈아치우겠다는 말이야?!”
“그럴 리가. 난 그들을 학살하지 않기로 했다니까.”
“그럼 저게 왜 필요한 거야? 그리고 굳이 그 아이들 셋 중에서 왕을 뽑겠다는 건···.”
델은 윰투스가 일찌감치 눈치챈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머릿속 단어를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세대··· 교체?”
“그래. 지금까지 문명을 주도하던 엔델리온, 그러니까 구세대(舊世代)는 전쟁 후 그 별로부터 격리될 거야. 격리소는 그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안락한 장소는 결코 아닐 테고. 구세대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 갇힌 채, 그리도 사랑하던 고향땅은 다시 밟지 못하겠지.”
“그럼 아이들은? 몸갈이 공장 말고, 그들이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잉태하여 출산한 아이들은? 나랑 같은 방법으로 탄생한 애들 말이야!”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분리당해 고향 별에서 키워질 거야. 하지만 그런 일이 빈번하지는 않을 거라 예상해. 시간이 갈수록 줄다가 결국은 완전히 끊기겠지.”
그 이유는 델도 짐작할 수 있었다.
“격리소에 갇힌 엔델리온은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 빠질 테니까?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래. 가장 가까운 기억으로 비유하자면···.”
민준은 곧 답을 찾아냈다.
“지구로 이주한 고블린들이 겪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겠지.”
적대적 환경에 의한 반자의적 출산율 급감.
그들은 수명을 다함에 따라 급격히 수가 줄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엔델리온이 고블린을 상대로 하던 실험의 여파를 그대로 돌려받는 모양새였다.
그런 구세대의 빈자리는 신세대가 대체한다. 아시프-1이 탈취한 배아에 기원한 그들이.
민준은 이 정도면 매우 온건한 방식의 처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아직 델에게 그들이 죽고 나서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델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모든 엔델리온이 전쟁에 찬동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그 모두가 태초의 종족 관련 음모에 연루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민준은 델을 조용히 응시했고.
한때 그와 삶을 공유한 동반자는 상대의 눈빛에서 질문의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혹시 그들 모두, 철저한 무신론자들이라서?”
엔델리온은 드래곤만큼이나 신앙과 거리가 먼 종족이다.
신이 다스릴 새로운 세상에는 도저히 맞지 않는 자들.
민준이 말했다.
“구세대와 신세대의 문명은 서로 섞여선 안 돼. 그리고, 죽음만큼 철저한 분리는 없지.”
민준이 꾀하는 것은 제노사이드라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시스템화된 살인행위를 저지를 생각이 없었고 솎아내는 기준이 종족도 아니므로.
신은 그러는 대신 ‘특정 세대의 도태’를 유도하고자 한다.
그들의 복제품이, 비록 원본과 비교하여 이질적인 믿음과 윤리관을 품은 채이긴 하나, 일단 존속하긴 할 것이므로 유전적 도태라고도 볼 수 없었다.
그것은 굳이 이름 붙이자면 정신적인 도태, 혹은 사상적 도태였다.
“전쟁에 찬동하지 않은 엔델리온이라도 몸갈이에 협조한 건 마찬가지이지. 너도 죄로 인식하는 그 추악한 행위 말이야.”
“혹시라도.”
델은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그들 중 일부라도 구원받을 수는 없어?”
그녀는 신의 용서를 구할 자격을 묻는다.
델은 지금까지 민준의 권리를 부정한 적이 없다. 적에게 복수할 권리 말이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질문한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용서를 빈다면··· 그들 중 소수나마 용서받을 수는 없는 거야?”
델은 지금까지 민준이 해 온 일에 어떤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복기했다.
그가 집행관을 맡은 세계에서 죄와 벌은 항상 서로의 거울이 된다.
델은 두 장의 거울을 세워 서로를 향해 비추는 장면을 상상한다. 서로의 상(象)을 무한에 가까운 횟수 동안 반복하여 복사하는, 끊어지지 않는 연쇄.
“당신 목에 칼을 꽂으려고 한 사람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걸까?”
델의 질문을 들은 민준은 순간 회상에 잠겼다.
과거에 수형자가 비참하게 외친 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 델, 날 죽이고 싶었어? 그럼 기회를 주지. 죽여!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라고!
– 그 방법밖에 없지 않겠어? 날 죽이려면 말이야. 자, 바로 여기야. 정확하게 노려. 내 목을 찌르라고! 그리고 길게 베어 내!
그는 끝내 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위원회가 민준의 함대를 공격해 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