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02
303. 업(業) (8)
***
함교의 신좌(神座)에서 민준은 엘프의 말을 떠올린다.
***
“소원··· 이요?”
“그래. 누구부터 할래?”
며칠 전 네 명 앞에서 민준이 그리 제안했을 때.
한국에서 태어난 오크와 인간, 고블린은 반사적으로 레이크필드를 보았다. 평생 밴 습관대로 최연장자에게 양보한 것이다. 뭐든지 나이순으로 해야 마음이 편한 건 종족 불문 똑같았다.
하지만 레이크필드는 여전히 과호흡 증상을 보이는 중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거나 그 중요성을 제대로 실감 못한 진실을 너무도 잘 이해했기에.
가쁘게 헐떡이며 딸꾹질하는 그가 진정될 때까지 민준은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레이크필드는 여전히 파리한 안색으로 말했다.
“소원이라니, 그런 건 없습니··· 필요 없다네.”
민준의 표정을 보고 급하게 어미를 수정한다. 늙은 엘프는 눈치가 빨랐다.
“내가 그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야.”
그는 필사적으로 거절했다.
“내가 한국으로 온 뒤 자네가 베푼 은혜만 해도 과분해. 어디, 그뿐인가?”
과거 미국 정보국에서 일한 레이크필드는 임무 도중에 사고를 당했다. 오랫동안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 건 그 여파였다. 엘프 기준으로도 나이가 너무 많아서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내로라하는 신성력 능력자들이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 날 보게. 멀쩡하게 서 있잖아? 이건 기적이야.”
레이크필드는 연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자네가 베푼 기적이지. 난 이미 너무 큰 선물을 받았어. 그러니 소원 같은 건···.”
하지만 민준은 완강했다.
그는 다시 한번 나지막하게, 하지만 무게가 담긴 목소리로 소원을 말할 것을 권했다.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들어주겠다면서.
그 모습을 보며 캐시는 불안감이 짙어지는 걸 느꼈다.
심지어 민준은 이곳에서 시간을 오래 보낼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한 마디로 레이크필드의 태도를 바꿔버렸다.
“제가 항상 봤던 정령은 누구를 본뜬 것입니까?”
레이크필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는 정령사다.
그리고 원소계 정령은 소환사가 가장 그리워하는 이를 닮는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 뿌연 형체로 구현되기에 정령사 외에는 이목구비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지만, 당사자에게는 추억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모습인 것이다.
민준은 여태 한 번도 이 질문을 한 적 없다. 어떤 추억은 뒤적거리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알기에.
엘프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주먹을 몇 번이나 꽉 쥐었다가 푸는 게 보였다. 주저와 수치심, 애탄 걱정과 갈등이 번갈아 떠오른다.
그리고 엘프는 결국 고개를 낮게 떨궜다.
“자네는··· 정말이지.”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다시 이어진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애는 내 딸이야.”
레이크필드는 집단이민 1세대다.
그를 포함한 엘프들이 단체로 넘어오기 전까지 이 행성에 거주하는 인외 지성체는 드물었다. 굳이 꼽자면 드래곤처럼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개인 이민 자격을 따냈거나, 정치적 이유로 망명했거나, 화물선 따위에 숨어 밀항한 불법이민자들 정도. 따라서 엘프들 입장에서 지구는 낯설고도 두려운 미지의 땅이었을 터다.
한편 당시 기준으로도 레이크필드는 고령자였다. 그 나이대 엘프는 고향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태어난 땅에서 죽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걸 감안하면 레이크필드는 매우 특이한 사례였던 것이다.
이제 민준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레이크필드는 초조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염치가 없다는 되뇜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왕 여기까지 이야기가 흐른 이상 더 이상 가릴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간절함이 두려움과 의혹, 수치심을 이긴다.
“···난 그 애를 찾기 위해 지구로 이민 신청을 했어.”
그의 딸은 위원회에 대항하다 수배자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막 개항을 한 변방 차원은 그녀가 숨어들기 최적의 조건이었을 거라 레이크필드는 추측했다.
일찍 아내를 보낸 뒤 딸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레이크필드는 신분을 위장한 뒤 정식으로 집단 이민 절차를 밟아 지구로 왔다. 정령술을 통해 어떻게든 재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분명 그 애가 지구로 왔다는 증거가 있었지만, 그 후로는 거짓말처럼 흔적이 끊겼네. 난 미궁에 빠졌지.”
당시 외계인 감시 및 관리 기능도 겸했던 CIA에 입사한 이유도 딸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까봐였다.
하지만 시간만 부질없이 흘렀고, 퇴직 후부터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혹시라도···.”
위원회가 사라졌다면 딸의 목에 걸린 현상금도 의미를 잃었을 터.
살아만 있다면 옛날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레이크필드는 이제 민준이 어떤 존재인지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다. 그의 영향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말을 고르던 엘프는 괴로운 어조로 읊조렸다.
“하다 못해 생사여부라도 알면 좋겠어.”
레이크필드는 암담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묵묵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민준이 말했다.
“다행이군요.”
“···뭐라고?”
당혹스러워하는 엘프를 향해 그가 대꾸했다.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라서요.”
***
피슈우웅!
콰라라라라라!
민준은 회상에 빠져나와 대형 스크린을 바라본다.
수천의 드래곤을 포위한 모함은 광자포를 쏟아부었다. 정교하게 출력을 조절한 광선. 우리 안에 몬 가축을 날카로운 창으로 사정없이 찌르는 듯한 광경이었다.
텔레포트를 봉인 당한 용들은 몸 곳곳 관통당하며 내쫓긴다. 그들의 마력으로는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함교에서 그 광경을 관찰하던 민준이 갑자기 레이크필드의 말을 떠올린 이유가 있었다.
“독룡이군.”
“네?”
“저기 저 용 말이다. 독룡이야. 요즘 세상에는 흔치 않은 아종이지.”
“아··· 그렇군요.”
신의 시선을 따라간 윰투스가 동의했다.
민준이 가리킨 곳에는 몸을 비늘 대신 각종 독초로 덮은 드래곤이 있었다. 어느 차원에서 왔는지 모를 용은 울부짖으며 반쯤 정신이 나간 채 광자포를 피해 도망다닌다. 고유능력인 독성의 브레스는 동족에게 효과가 없듯 빛의 폭우 앞에서도 무용지물이었다.
민준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레이크필드는 복수를 원하지 않았지.’
딸이 혹시 죽었더라도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했다. 원흉이 위원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터다. 원수는 이미 민준의 손에 멸망했으니까.
허나 만약, 그녀의 실종에 다른 존재가 개입된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엘프는 여전히 복수를 원할 것인가?
‘만약 복수를 요구했다면 복잡해질 뻔했어.’
딸이 레이크필드의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그 실종에 연관된 누군가도 민준이 아는··· 아니, 알았던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존재이기에.
그런 생각에 잠긴 사이, 독룡의 몸엔 구멍이 늘어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면적이 넓은 날개의 상처가 가장 많았다.
결국 힘을 잃고 비틀거리더니 해수면을 향해 낮게 접근한다.
풍덩!
용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그쪽으로 검은 그림자가 접근하더니 축 처진 몸을 회수했다.
사실 대다수의 드래곤은 아직도 오해를 하고 있다. 지구로 넘어온 우주 모함은 여덟 척이 아니라 총 아홉 척이었다.
최초에 폭발한 한 척과, 상공에서 용들을 공격하는 일곱 척, 마지막으로 바닷속에서 기절한 용들을 수납하는 마지막 한 척까지.
“곧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그래. 주교들 사격 실력이 많이 늘었군.”
“그 말씀을 전하면 모두 감격할 것입니다.”
윰투스는 웃으며 머리를 깊게 조아린다.
모함들이 바닷속에 숨어 있을 때, 고룡들 뇌간을 정확하게 노린 사격은 민준이 직접 한 것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고 가치가 높은 용은 최대한 멀쩡한 상태로 잡겠다는 의지 표현.
그 뒤로는 각 배의 함포 장교들이 사격을 지휘하고 있다.
신은 저들을 최대한 살려서 포획하라고 명령했다. 그 말에는 실제로 몇 마리 정도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지금 미친 듯이 쫓겨 다니는 드래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많은 전함이 다 어디에서 왔는지.
차원벽에 길을 열라고 지시하는 방법으로 이동하는 개념은 그들 상상 범위를 벗어났기에.
“하온데.”
윰투스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저들 때문에 모함 한 대를 희생한 건 너무 큰 대가가 아닐런지요?”
미끼로 썼다가 소멸된 배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은 고개를 젓는다.
“괜찮다. 지금 타고 있는 것도 성능이 변변찮은데, 놈들이 천년 전에 쓰던 것은 오죽할까?”
일부러 열 번이 넘는 도약을 통해 경로를 노출시키고, 지구 곳곳에 등장하여 민준의 전력이 딱 한 척이라고 믿게 만든 전함은 최신식 모델이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보이게 장갑을 개조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전함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긴. 그 짐승들도 여차하면 자폭시키려던 전함이었지요.”
미끼는 과거 차원 #00-001의 이웃 세계에서, 세뇌된 수형자들이 타고 교단과 대치한 모함 중 하나였다.
전투 막바지에 대부분 자폭 명령을 받고 폭발했으나 개중 멀쩡하게 남은 한 대.
바로 아시프-500이 타고 있던 배다.
그것이 비교적 멀쩡하게 남은 이유는, 세뇌 능력자를 찾으러 선내에 침입한 민준이 미리 시스템을 장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민준은 함교의 한 켠을 본다. 그곳에는 윰투스가 지휘한 추적팀이 위치를 파악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군.”
“송구스럽습니다.”
그는 민준을 따라 시선을 돌린다.
신이 명령하여 그가 지구에서 찾아낸 물체.
민준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과 달리 그 외양은 볼품없었다.
“이번에도 외람된 말씀이오나···.”
유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망설여지는.
말 그대로 ‘폐기물’에 가까운 형상.
“감히 짐작하건데, 그동안 저것의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화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능할 수 있겠습니까?”
엔델리온의 왕이 나름 최선을 다한 결과가 부정당한다. 주교에겐 그리 보일 수밖에 없는 몰골이었다.
민준은 손바닥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말도록.”
그리고 시선을 돌려, 어떤 방향을 보며 중얼거린다.
“아직 잘 작동하더군. 다행히도.”
***
젠킨슨은 비늘 사이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멍한 정신을 뚫고 멀미처럼 몰아치는 감각을 느꼈다. 입안에는 토사물의 역한 내가 가득했다. 발아래 검붉은 잔해는 해류를 타고 넓게 퍼져나갔다.
돌덩어리처럼 굳어 있던 고룡은.
혼잣말 아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로드?”
– ······.
뇌내 인격은 대답하지 않는다.
젠킨슨은 지독한 두통과 원인을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페르센의 말을 함께 들으셨지요?”
한때 사람이었으나, 이제 사람이 아니게 된 남자.
단어와 문장이 허공에서 바스락거렸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어떤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젠킨슨과 민준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용이 있었다.
그가 죽기 전 열변하며 토한 말을 당시 젠킨슨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귓가에 환청처럼 소리가 메아리친다.
‘용은 사회적 생태계를 망치는 해충이다. 만악의 근원이야. 다른 종과 공존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다른 종족은 각양각색의 물감이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서로 섞여. 하지만, 용은 기름이다. 물에 뿌려도 어울리는 대신 그 위에 기름층을 만들며 덮어버려.’
‘기름이 물을 아래에 두는 것처럼, 용도 다른 종족을 밑에 깔고 지배한다. 그게 용의 본성이니까!’
젠킨슨은 가슴의 욱씬거림을 느낀다.
“장태준이 틀리고 페르센이 맞을까요? 악이 용의 본성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종족이 악을 품고 태어나며, 단지 용에게만 그 악을 행할 능력이 있었던 것뿐일까요?”
젠킨슨은 다른 종족을 착취하며 피해를 입히는 동족의 본성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하지만 페르센은 그 개념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뒤엉킨 개념 속에서 젠킨슨은 질문을 건져낸다.
“그렇다면 악하게 태어난 자가,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악이 권장되는 환경에서 태어나, 결과적으로 악을 행했다면. 그것은 그의 죄입니까?”
– ······.
“아니면 그것은 그를 악하게 잉태하고, 그에게 악을 행할 능력을 부여하고, 악이 권장되는 환경을 만든 누군가의 죄입니까?”
– ······.
“모르겠습니다.”
잠시 주저하다가.
“하지만, 페르센이 반드시 옳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페르센은 용족이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직후에 분쇄육처럼 갈려서 사라졌다.
역시나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누군가 그에게 개입했을 터다.
강자와 약자는 상대적 개념이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너무도 쉽게 뒤집힌 장면. 머릿속의 기억 앞에서 젠킨슨은 다시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로드, 무엇이 맞습니까?”
전대 로드의 인격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드래곤은 눈길을 어떤 방향으로 돌렸다.
태평양의 먼 곳에서 마력파가 급변하고 있었다.
그전까지 느낀 것보다 훨씬 거대한 힘이 출렁거리며 사방을 덮는다. 젠킨슨은 그곳으로 텔레포트를 하려고 시도했다.
“······!”
하지만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젠킨슨은 몰랐지만, 지금 저곳의 공간은 한때 위원회가 성계 내에 설치한 장비를 국소적으로 발동시킨 상태였다. 누구도 함부로 오갈 수 없도록.
또한 그런 현상은 젠킨슨에게 어떤 암시처럼 느껴졌다.
앞으로는 이런 사소한 일을 포함한 모든 것이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세상이 오리라는.
“저는···.”
허공에 마법으로 몸을 고정시켰던 젠킨슨은, 다시 날개를 활짝 폈다.
여러 가지 명제와 사실, 개념이 젠킨슨의 머릿속에서 회전했다.
흐릿해졌던 용의 눈에 다시 단호한 감정이 깃든다.
그는 뇌내 인격이 답하지 못했던 질문을 떠올리며 선언했다.
“저는 답을 들어야겠습니다.”
붉은 용은 동쪽으로 날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