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05
306. 업(業) (11)
***
시청 광장 주변은 사람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때문에 동철은 주의 깊게 서 있을 자리를 골라야 했다.
상가 입구나 쇼윈도 가까이 붙으면 쫓겨날 것이다. 이런 추운 날 밖에 우두커니 있는 고블린은 십중팔구 노숙자이기에.
그렇다고 길에서 계속 서성거렸다간 눈 어둡고 키 큰 트롤에게 걷어차여 몇 미터나 날아가 뒹굴 수도 있다.
결국 동철이 고른 위치는 건물과 건물 사이, 반쯤 찢어진 전단지 투성이의 지저분한 벽이었다. 등을 딱 붙이고 선 채 차도 건너 행렬을 본다.
‘언제 끝날까?’
그는 지금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동철과 나이 차가 스무 살 넘게 나는 고블린이었다.
노숙시절부터 알고 지낸 그녀는 불치병 환자다. 한때 창천 소유였다가 젠킨슨에게 넘어간 복지시설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지만, 고위 성직자 없이는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은 모양이다.
세눈박이 주교들 소문을 들었을 때 동철이 가장 먼저 떠올린 이는 그녀였다. 고블린 중엔 문맹이 적지 않기에, 그는 기꺼이 친구와 동행해서 돕기로 했다.
덕분에 무사히 자격을 인정받은 그녀는 큰 천막 안으로 들어갔고, 동철은 기적이 순서대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다. 광장은 이미 꽉 차서 길 건너 도로까지 물러나야 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 겨울은 춥지 않네.’
동철은 지금 얇은 티와 바지만 걸쳤다. 이마저도 반팔 차림으로 나서려는 걸 레이크필드가 만류해서 갈아입은 것이다.
‘아니, 나만 그런 걸까?’
반면, 행인들 대부분은 겨울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맨 상태. 동행한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무료하게 기다리는 사이 뉴스 소리가 들렸다.
–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 동향 예측 자료에 따르면, 금년 국내 4분기 합계출산율은 2.5명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됩니다. 주변국의 평균 4.2명에 비하면 매우 바람직한 수치로 정부에서는 평가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들어도 아리송했던 말이 최근 들어서는 조금씩 이해가 된다.
그렇기에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두 명이 넘어? 그렇게 많아?’
정부에서는 한참 전부터 종족 별 출산율 발표를 금지했다. 전 종족을 합산한 2.5명의 수치는 평균의 함정을 잘 나타낸다.
오크는 한 번의 출산에 여덟 명까지 태어나며, 의사 등 고소득층 비율이 높은 드워프 역시 일생에 평균 세, 네 명을 낳으니까.
그들의 인구비를 감안하면 인간이나 트롤 등의 출산율은 한 명 내외라고 봐야 한다.
개중에도 최악은 당연히 고블린이었다.
동철은 미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처럼 고령의 고블린은 늘어난다. 하지만 아기는 거의 없다.
결국 이 별에서 고블린은 사라질 것이다.
‘그런 걸 ‘멸종’이라고 하던가?’
레이크필드가 가르쳐 준 단어를 떠올린다. 예전에는 잘 까먹던 어려운 말도 요즘엔 한 번 배우면 어지간해서는 잊지 않는다.
그 사이 뉴스가 끝나고 광고가 이어진다.
드래곤들이 공동 운영한다는 소문이 도는 재단의 마크가 뜬 뒤 나레이션이 흘렀다.
– 트레비스는 인구 천만에 불과한 작은 행성입니다. 거주민 대다수가 오크인 이 별에는 십여 년간 기나긴 내전이 이어졌습니다.
– 전기와 수도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었지만 복구는 언제 가능할지 요원하기만 합니다.
– 고통받는 트레비스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세요. 월 3만원이면 이 행성에서 한 명의 오크가 한 달 동안 먹을 식량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의 나눔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화면에는 내전 때 입은 부상으로 장애를 겪거나,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해 삐쩍 마른 오크들 모습이 비춰졌다. 요즘엔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
그때였다.
“에이, 염X할. X랄 X싸고 있네.”
동철의 시선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거친 욕을 뇌까린 이는 버스 정류장에 앉은 오크였다. 한쪽 다리를 달달 떨며 그는 전광판을 쏘아보았다.
“지구에도 굶어 죽는 애새끼들 천진데, 무슨 외계에 사는 것들까지 먹여 살리자고··· 지X 육X을 떠네. 에이, 저 XX 빠진 XX들.”
그 순간 다른 행인들의 시선도 잠시 그를 향했지만 곧 다시 허공으로 스러졌다.
오크는 계속 중얼거린다.
“그리고, 돈 많은 드래곤들은 뭘 하고 왜 엉뚱한 사람들 주머니를 털려고 저 XX이야? 에이, XXX.”
동철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장면을, 오늘도 그는 볼 수 있었기에.
스으!
오크 몸에서 일렁이던 붉은 빛이 광선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파앗!
저 먼 전광판에 닿았다.
고블린은 저 남자의 미움을 시각화하여 보고 있다.
하지만 동철은 옛날처럼 오크가 옥외 스크린을 부숴버릴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기계를 증오할 이유는 없다. 더 나아가, 사실 화면 속 외계인에게 화를 낸 것도 아닐 터다.
실은 저 광고를 만든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자들··· 저 광고를 보고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이들을 증오하는 것일 수도.
그런데도 지금 미움이 기계를 향하는 것은, 당장 감정을 쏟을 대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레이크필드가 ‘굴절’이라는 단어를 썼던 걸 고블린은 기억해냈다. 증오의 굴절.
참 희한한 일이었다. 요즘은 좀처럼 뭐든 까먹지를 않는다.
찌릿!
아이고!
동철은 평생 밴 습관대로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저 오크를 너무 오래 본 모양이다.
팟!
전광판을 향했던 붉은 빛이 이번엔 자신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매우 가늘었다. 이 정도면 경험상 진짜 공격이 이어질 정도는 아니다. 잠시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걸로 끝날 터.
예상대로 오크는 동철에게 왜 자기를 보는지 묻고, 안구가 부패했으면 신속하게 적출하여 깨끗한 물로 세척하라는 권유를 매우 거친 단어와 흥분된 어조로 전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동철을 비추던 적광(赤光)은 다시 사라졌다. 오크는 궁시렁거리더니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XX!”
그런데 인터넷에서도 성에 차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오크의 눈에서 광선이 작은 액정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 모든 과정에서 오크의 몸을 덮은 붉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고블린은 기억해 두었다.
각자 행동으로 표출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항상 저렇게 적색 기운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동철의 오크 친구 같은.
“······어?!”
생각에 깊이 빠져 누군가 접근하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동철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요즘엔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누구··· 세요?”
생각의 속도는 빠르지만 말을 할 때는 더듬거린다. 고블린에게 적합하지 않은 언어이기에.
“······.”
동철은 그의 차림새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한국은 마스크를 쓰는 문화가 일반적이지 않다. 감기에 걸려도 답답하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큰 마스크로 이목구비를 가리고 있었다.
거기에 썬글라스와 귀를 덮은 모자까지.
동철의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은행강도?!’
하지만 남자에게는 공격할 의사가 없는 듯했다.
그는 더 자세히 봐야겠다는 듯 썬글라스까지 벗었다. 묘한 감정을 품은 청옥빛의 눈동자.
그가 중얼거린다.
“이상하네? 분명, 고블린이신데?”
동철의 가슴이 쿵쿵 뛴다.
경호원은 철수했지만, 그 시절 젠킨슨에게 받은 아티팩트는 지금도 소지한 상태.
몸에 마나가 들끓는 고블린이 지나친 시선을 끌거나, 마법사들이 연구 목적으로 납치해 갈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떻게 알았지?!’
고블린이 극도의 위기감을 느낀 그때.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초면에 정말 죄송한데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그리고 이어진 말은 동철이 절대 짐작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런데··· 영혼이 참 맑으시네요.”
“······?!”
“혹시··· 신을 믿으세요?”
***
깊은 한숨.
아시프-1은 온몸이 삐걱거리는 탈진감을 느꼈다.
그는 창조주의 호출을 받고 지구로 건너왔다. 애초에 차원 #00-001에 남았던 것은 관리 목적도 있었지만, 거기 숨어든 첩자들에게 세뇌능력자가 민준과 별도로 움직인다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목표가 달성된 지금 민준은 그를 지구로 불러들인 것이다.
‘일이 너무 많아서 뼈마디가 쑤신다는 게 이런 건가···.’
처음 창조되었던 당시는 물론이고, 후라이팬을 비롯한 각종 파편으로 존재했던 시절, 그리고 다시 부활한 후까지 통틀어 요즘처럼 바빴던 적은 없다.
어머니가 준 경이적인 육신도 능력의 과한 발현에는 버티지 못하는 듯하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민준의 방문 앞에 섰다.
=잠시 뵐 수 있겠습니까?=
평소답지 않게, 답이 살짝 늦는다. 아시프-1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이제라도 인기척을 내야 할까 갈등할 정도가 되었을 때.
‘들어와.’
문을 열자, 민준은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모양새.
아시프-1은 바로 보고했다.
“우주 모함에 포획된 드래곤들 세뇌를 완료했습니다.”
이 별에 도착한 뒤, 대규모로 증축된 모함 내 ‘축사’를 봤을 때 얼마나 경악했는지.
그때 느낀 한기가 지금도 살갗 아래에 꿈틀거리는 것 같다.
나이를 꽤 먹은 고룡들은 그나마 몸이 온전하고 정신만 잃은 상태였다. 반면 어릴수록 성한 부위가 드물었다.
기절에서 깨면 다시 반항을 시작할 것이기에 아시프-1은 그들 정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수천에 달하는 드래곤을 세뇌하는 건 쉽지 않았다. 미리 용혈을 마셔 둔 민준이 힘을 몇 번이고 다시 충전해 줬기 때문에 간신히 해를 넘기지 않았다.
“세뇌와 치료를 병행했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드래곤들의 몸 상태도 정상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며칠만 지나면 다시 채혈이 가능합니다.”
여러 목적으로 지구에 모이고 있는 엘라후-프라가 사제들은, 말 그대로 우주 최강의 신성력 능력자 집단으로 자평할 만했다.
그들 일부는 전함에서 드래곤 치료에 동원되었다. 일종의 수의사 역할을 맡은 것.
“혹여 또 분부하실 사항이 있으십니까?”
침묵.
아시프-1은 그것을 부정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보고가 끝났으니 이젠 아시프-1이 용건을 꺼낼 시간이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구로 출발하기 전, 델과 나눈 대화 내용을 떠올린다.
하지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대신, 대화의 물꼬를 부드럽게 돌릴 방법을 찾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천천히 입술을 떼더니, 민준은 감정을 읽기 힘든 어조로 말했다.
“누군가 내게 한 이야기에 대해서.”
“무슨 말이었지요?”
민준의 머릿속을 떠도는 내용은 여러 가지였다.
개중 방금 전 떠올린 것부터 말한다.
“내게 위로하듯이 말하더군. ‘당신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놓아 버려야 하는 일도 있는 거라고.”
“당연한 말이군요.”
교황은 그들의 교단이 모시는 신이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심지어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행이지요.”
“다행이라니?”
“전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이 전능하지 않다는 점은 제게 축복입니다. 아버지가 우주의 모든 제약과 장애에서 자유로운 존재였다면, 아버지의 자유 의지 또한 사라졌겠지요.”
민준은 그 뜻을 바로 이해했지만, 아시프-1이 계속 떠들게 두었다.
“의지는 자신을 구성하거나 둘러싼 제한과 불완전함, 미완성으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망하지요. 없던 것을 창조하거나, 기존에 있던 것을 다른 상태로 바꾸고 싶어 합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충족되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루고 무엇도 희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 한 명의 전능자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세상은 그의 생각대로 이미 바뀌었을 테니까요. 그러니 어떤 의지도 새로이 피어나지 않겠지요. 이미 완벽하니까요. 무엇도 새로 바랄 필요가 없으니까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면, 오히려 자유 의지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역설에 대해 아시프-1은 말하고 있다.
“그 전능자가 아버지라면 저는 애초에 탄생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제겐 다행입니다.”
잠시 곱씹더니 말한다.
“아니, 세상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겠지요. 만물의 법칙이 아버지 생각대로 된다면 우리는 고정된 형태로 실존하는 대신 현실과 아버지의 꿈 사이에서 부글거리는 거품으로 강등될 겁니다. 심지어 그 상태도 오래가지 않을 테고요. 당신은 결국 더이상 뭔가를 바꾸거나 만들거나 행위하지 않아도 될 완벽하고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테니까요. 그게 전능이지요.”
아시프-1은 더 이상의 말 돌리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지금 제 앞에도 커다란 제약이 나타났습니다. 이 벽을 뚫지 못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제 신념과 소망에 어긋납니다.”
“그 벽이 무엇이지?”
아시프-1은 기대와 두려움, 경애와 저항을 담아 창조주를 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 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