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04
305. 업(業) (10)
***
“소원을 바꿔야 할 것 같은데.”
민준이 그렇게 말한 때는, 정팔이 자신에게 좀 더 시간을 달라고 청하여 순서가 캐시로 넘어간 직후였다.
그녀는 길게 고민을 하지도 않고 민준에게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
– 은성이를 찾아주세요!
민준은 살짝 놀랐다. 타인을 위한 소원이라니.
생각해 보면 지구에서 그 유령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캐시다.
‘지하에 용 한 마리 있으니 밥 좀 먹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요구에 전 비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고 따랐다.
사실 캐시는 하은성의 감시역이기도 했지만 도주 의도가 없는 걸 안 후로는 그냥 평범한 동생처럼 여겼던 것 같다.
민준은 그런 동기를 미뤄 짐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소원을 최대한 부드러운 말로 반려했다.
“왜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애초부터 그녀는 민준에게 ‘세계의 평화’나 ‘영원한 생명’ 같은 허무맹랑한 소원을 빌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민준은 행방불명된 그 유령을 이미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가능성이 0%는 아니란 뜻.
그런데 거절하다니?
“말했잖아. 하은성은 이미 찾는 중이라고. 그 일은 네가 바라지 않아도 내가 할 일이야.”
하은성의 현재 상황은 민준과 아드키엘, 아시프-1의 업보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다.
유령이 혈전이 되었다가 실종된 결말에는 그들이 서로에게 쏘아 보낸 호의와 적의가 혼재되어 작용했다. 그들이 연쇄적으로 죄를 지우고 또 짊어지는 과정에서 하은성이 창조되고, 생을 얻었다가, 죽고, 고통받고, 실종된 것이다.
또한 민준은 더 이상 하은성을 자신의 채무자로만 여길 수 없었다. 이젠 민준 역시 하은성의 채무자다.
‘심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추측할 수는 없지만.’
아드키엘의 기억에 따르면, 하은성에게 깃들었던 그림자 파편은 그 유령을 속일 계획이었다. 그로 하여금 엘라후-프라가 최상류의 근원을 파괴하라고 종용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하은성이 거절하면 아드키엘은 그를 협박하려 했다. 태초의 종족이 깨면 그들이 민준을 벌할 것이며, 민준이 세뇌한 드래곤들은 모두 제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그리고 수치심과 분노에 사로잡힌 용들은 복수를 위해 민준과 연관된 모든 이들을 처참하게 파멸시키리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준비했던 것.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하은성은 그 유혹을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하은성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아직 살아있는 가족들이었지.’
애초에 민준에게 협조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드키엘은 그들을 들먹이며 하은성을 협박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령은 결국 근원을 파괴하지 않는 선택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은 달란트의 역류에 휩쓸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터다.
‘그 녀석이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나는 다시 한번 모든 것을 잃었을 거다. 이번에는 완전하고도 영구히,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상실했을 거야.’
민준이 지금까지 버틴 이유, 삶의 목표가 사라질 뻔한 위기.
‘이유가 무엇이든 그 과정이 어떠했든. 난 하은성에게 큰 빚을 진 거야. 그 부분은 변하지 않지.’
따라서 민준은 그를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아시프-1의 예상과 달리 하은성을 다시 흡수할 일은 없을 터다.
하은성의 본래 채무액 100만 달란트를 저울질할 생각도 없었다. ‘내 영혼에서 창조되었을 확률이 높으니 내 은혜가 더 크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도 않을 생각이다. 아드키엘의 음모를 막은 건 그만큼 큰 공(功)이었다.
그러니, 그가 원한다면 생전과 비슷한 몸을 만들어 줄 것이다. 체감상으로는 다시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한 실현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바란다면 영원한 생명도 줄 수 있다. 평화롭고 안락한 낙원을 원한다면 힘이 닿는 선까지 만들어 줄 의향도 존재했다.
“그럼···.”
다른 소원을 빌라는 이야기에 캐시가 고민한다.
사실 빌고 싶은 소원이 또 하나 있기는 했다. 하지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누군가와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과거가, 당시는 소중함을 몰랐던 일상이 그리웠다.
아침이면 사무실로 출근해서 고용주와 대단할 것 없는 잡담을 나누고, 쇼핑을 하다가 눈에 밟히는 물건이 생기면 한아름 사 들고 그에게 선물해 주기도 하고, 외계인 용의자 정보를 캐내고, 성과를 올리면 민준과 술잔을 부딪치며 환호하고, 한가한 날이면 친구들과 한 자리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던 나날이.
이제 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리고 그런 날이 앞으로는 계속될 수 없다는 선명한 예감 때문에 괴로웠다.
‘혹시나, 여기에 계속 남아달라고 소원을 빈다면.’
자신을 기다리는 민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단념한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민준은 소원을 빌라고는 했지만 뭐든 들어주겠다고는 약속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능력의 한계가 존재할 터다. 혹은, 의지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민준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경우.
캐시는 묻는다.
“민준씨는 앞으로 뭘 할 거예요?”
“지금까지와 같아. 해야 하는 일을 해야겠지.”
“뭘 하고 싶은데요?”
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캐시는 이것도 비밀인가 싶어 살짝 서운했다. 하지만 민준의 반응은 그런 짐작과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의도치 않게, 민준의 오랜 고뇌를 정면으로 건드린 것이다.
그는 짧은 침묵 후에 말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꼭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니까.”
캐시는 이해한다는 듯 살짝 웃었다.
“하긴, 민준씨가 무슨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고. 당연하죠.”
그녀 뒤에 서 있던 엘프는 목구멍 아래에서 말이 간질거리는 걸 참느라 애썼다.
비록 민준이 신격은 아니지만, 사실상 차원계에서 가장 강력한 능력과 권위를 지녔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캐시의 말 때문에 민준의 표정은 한층 더 오묘해졌다.
“그래도, 전 민준씨가 최대한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가능한 만큼이라도요. 민준씨는 항상 일하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정작 임무를 시작하면 워커홀릭이 따로 없었잖아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하지만 이제는 자유로워졌으니까. 최대한 여유롭게, 삶을 좀 즐겼으면 좋겠어요.”
“······.”
“민준씨가 무슨 종족인지는 모르지만 쿼터 엘프보다는 오래 살겠죠? 드워프 정도는 되려나? 그럼 난 민준씨 기준으로 유아나 마찬가지겠네. 민준씨의 길고 긴 인생에··· 잠시 스쳐 지나간 어린 아이. 그냥 그 정도? 그렇게라도 기억을 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가 주제넘게 이런 이야기도 했었지? 그렇게라도··· 아주 가끔씩이라도 곱씹으면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과장스러운 어조로 덧붙인다.
“아, 이게 소원까지는 아니고요. 설마 이것까지 카운팅한 건 아니죠?”
애써 웃으며, 캐시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리고, 제 소원은···.”
모두의 시선이 몰린다. 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결심을 내린 듯, 캐시가 말했다.
“양도할게요.”
그 순간.
태초의 종족, 엘프, 고블린, 오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동시에 반응했다.
“정말?”
”아니, 잠깐. 잠깐만! 캐서린 양. 성급하게 그러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이건 둘도 없는 기회일 수도 있어!”
”양(羊)한테··· 뭘 해요?”
”······!”
캐시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제 소원은 세 명 중 원하는 사람에게 넘길게요. 그래도 되죠?”
다시 말해 레이크필드, 정팔, 동철 중 소원을 하나 더 빌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넘기겠다는 뜻.
민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확인한다.
“후회하지 않겠어?”
“은성이는 민준씨가 찾아 줄 거라 했고.”
약간 쓸쓸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아직 말 안 한 소원은, 어차피 민준씨가 들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캐시는 레이크필드와는 달리 생이별한 가족도 없고 비교적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설명을 들어도 정체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든 (하지만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만은 틀림없는) 외계인 도움을 받아 이루고픈 애탄 갈망은 없었다. 이미 거절당했거나, 거절당할 것이 뻔한 두 가지 소원을 제외하면 말이다.
물론 가지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캐시는 자신에게 그 정도는 스스로 손에 넣고 발을 딛을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때 마음을 준 고용주에게 소원까지 빌지 않더라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를 수도 있을 터다.
“네.”
캐시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아요. 후회 안 할 거니까.”
***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말이나 해볼 걸 그랬나? 후회되네.’
하얀 입김이 퍼지는 것을 보며 캐시는 중얼거렸다.
시간은 정오에 가까웠지만 겨울 햇살은 영 힘을 쓰지 못했다. 창백한 색으로 덮인 거리를 그녀는 걷는다. 날이 한층 더 추워졌다. 머플러를 여미고 두 손은 코트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잇따른 충격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밥벌이는 이어져야 한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영업 중이었고 도시에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캐롤 음률과 구세군의 종소리가 곳곳에서 울린다. 캐시는 미련을 뿌리치며 주변 풍경에 집중했다.
‘2020년이 진짜 지나가기는 하려나 보네. 때려죽여도 안 끝날 것 같더니.’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랬겠지만 2020년은 캐시에게는 지옥과 같은 한 해였다.
상식이라고 여긴 모든 것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일상이라 생각한 당연한 부분을 오래 박탈당했다.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과의 연결 고리가 기약 없이 사라지거나,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걸 무기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한 해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 마음대로 바깥을 돌아다닐 수는 있으니 다행인가?’
그녀 주변엔 한동안 당연하게 따라붙던 경호원이 없었다. 젠킨슨은 며칠 전 민준의 친구들을 대상으로 한 모든 경호 지원을 중단했다.
캐시는 머리도 비울 겸 산책 중이었다. 자꾸 생각이 샛길로 빠지긴 했지만, 주된 테마는 앞으로 뭘 해 먹고 살까, 였다.
무엇을 업으로 삼을 것인가?
민준은 둘의 고용 관계가 끝났음을 분명히 했다. 또한 지구의 드래곤 로드가 안전을 보장했으니 슬슬 취업 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전 고용주가 월급을 후하게 줬던 탓에 당장 놀아도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일은 그녀 인생에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생각하며 계속 걷는다. 문뜩 눈길이 누군가에게 멎었다. 얼굴엔 회백색 털이 가득하고, 코인지 입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긴 대롱을 덜렁거리는 여행객이 어색한 손짓으로 택시를 부르고 있었다. 트롤 한 명이 다가가 여기는 택시가 서지 않는다고 알려주자, 그는 차원 공용어로 감사를 표하며 트롤을 따라갔다.
‘확실히, 요즘 서울 길거리에 못 보던 외계인들이 많아졌단 말이지.’
스쳐 지나가는 사람 구경을 하면서, 그녀는 계약 요원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민준에게 배운 가락도 가락이고 이민국 내 연줄도 충분하니까.
물론 민준이 그랬던 것처럼 전면에서 나서는 형태보단 첩보와 정보 활동에 집중하는 요원이 적합할 것이다. 민준은 이 정도 마법 실력을 믿고 어디서 시비 걸고 다니지 말라고 캐시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녀는 계속 걷다 큰 사거리까지 도달했다. 건물 위의 대형 전광판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 국제 연합은 한국 시간으로 어제 새벽, ‘범차원 지성체재배치위원회’ 관련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차원 간 정치, 경제, 사회, 기술적 교류의 교량이 되었던 해당 집단의 유의미한 활동이 장기간 포착되지 않는 현 상황을 재확인하며, 향후 혼란과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이웃 차원과 밀접한 협조를 이어 나가겠다는 기조를 다시 한번···.
– 우리 차원에서는 ‘드림랜드’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엘라후-프라가’ 교단 본부가 내년 1월 내로 지구에 마정석 2만 톤을 공급할 계획임을 밝혔습니다. 거래 조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국제 연합은 상세 계약 내용은 민간에 공개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반복하여···.
와글와글.
길을 건너던 캐시는 시청 광장에 늘어선 행렬을 발견했다.
곳곳에 마법 난로가 비치되고 천막을 쳐 놓았지만 완벽하지는 않은 듯했다. 추위에 약한 종족들은 참지 못하고 벌벌 떠는 중이었다.
저렇게 사람들이 긴 줄을 만드는 광경은 요즘 드물지 않다.
모여든 사람들은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두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일단 ‘선별진료소’라 적힌 천막에서 지구인 드림랜드 교인과 지구인 의사의 확인을 받았다. 그들은 환자 상태를 직접 확인하거나 소견서 및 진단서 내용을 체크했다.
그 단계에서 치료가 꼭 필요한 환자로 인정받은 이들만 그 다음의 ‘치료소’라 표시된 천막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번쩍!
파앗!
치료소 천막 안에서는 황금색 빛이 쉼 없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는 어김없이···.
“아··· 맙소사! 보여요! 눈이 보여요!”
“엄마, 이것 봐! 걸을 수 있어! 나 이제 걸어!”
“이건 기적이야!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천막 입구가 들썩이고 내부가 살짝 보였다.
그곳에는 외계의 예복을 입은 세눈박이 주교들이 나란히 앉아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캐시는 혀를 찬다.
‘세상에, 공짜로 환자를 봐주는 신성력 능력자라니. 그것도 심지어 최고위급이야!’
캐시는 자신이 지금 2020년의 지구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HBO 드라마 속에 빙의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광장에 길게 늘어선 환자 행렬과,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종족들이 오가는 횡단보도를 동시에 보며 중얼거린다.
‘요즘 세상은 참···.’
묘사하기에 적합한 표현을 찾다가.
‘···비현실적이고.’
아니, 그보다 더 나은 단어가 있을 것도 같다.
예를 들어···.
그래.
‘······비정상적이야.’
비정상적인 세상.
하지만 그 생각도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쩌면 지금 모습이 흔히 말하는 뉴 노멀(New normal)로 굳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니지.’
캐시는 전 고용주의 말버릇을 떠올린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지금 해야 하는 것.
‘난 내 일이나 고민해야지.’
고개를 살짝 저으며 잡생각을 몰아낸 뒤, 캐시는 다시 한번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리고 시의회 앞 골목을 빠른 걸음으로 돌파했다.
인간, 엘프, 드워프, 오크, 고블린, 트롤을 비롯하여 이름을 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종족이 걸음을 옮기는 거리. 그 인파 속으로 그녀의 모습이 금방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