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07
308. 업(業) (13)
***
“아무리 생각해도 대안이 없더라고요.”
“대안··· 이요?”
더듬거리며 되물은 이유는 단어 뜻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동철은 상대가 그 말을 꺼낸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름 모를 남자는 너무 많은 내용을 건너뛴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아차!’ 혀를 차더니 습관처럼 모자 위를 긁적거린다. 그 와중에 선명한 금발이 몇 올 삐져나왔다.
“몰래 밖으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에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신을 믿냐고 말을 걸었던 사내는 지금 동철과 나란히 벽에 붙어 서 있다.
고블린은 그의 기이한 언행에 불안을 느꼈지만 어쩐지 도망쳐야 한다는 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은 대화를 나눠보기로 한다. 친구도 아직 기다려야 하고 말이다.
“마침 타이밍도 좋았어요. 요즘 들어서는 아무도 안 찾아오더라구요. 게다가 그런 결계는 옛날부터 뚫을 수 있었어요. 제가 혼자 밖에 들락날락 하는 건 아무도 모른다니까요?”
형제들과 떨어지고 대화 상대도 없어서 외로웠다며 별의별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맥락상, 동철은 상대가 한동안 갇혀 있었던 것이라 짐작했다.
“못 나가게··· 한 사람이··· 누군데··· 요?”
마스크를 꼈음에도,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건 말하면 안 돼요. 진짜 큰일 나거든요.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서요. 아마 지구에서 제일 센 사람일 수도 있어요.”
이어지는 속삭임.
“그리고 이것도 비밀인데··· 씨. 이걸 말 안 하면 형이 안 믿을 테니 어쩔 수 없네.”
고블린은 당황했다. 형?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다짜고짜?
“실은, 저요. 엄청 뛰어난 신성력 능력자예요. 아마 차원계에서 제일 우수할 수도 있다고 했어요. 알려지면 기록에 오를 정도라나요?”
동철은 그제서야 상대의 정체를 짐작했다.
이런 유형은 노숙 시절에도 종종 길거리에서 마주치곤 했었다.
‘아아, 마음이 아픈 사람이었구나.’
남자가 지금까지 어디에 갇혀 있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을 거예요. 심지어 전 엄청 장수할 거거든요? 최소 몇백 살에서 운이 좋으면 몇천 살까지? 그 정도로 장수하는 종족 피가 섞여 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니 점점 더 강해지겠죠. 원래는 이것도 말하면 안 되는데···. 뭐 괜찮겠죠. 형은 영혼이 깨끗하니까.”
고블린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바로 뿌리치고 자리를 뜨는 대신 어울려 주기로 했다.
‘보호자가 찾고 있을 텐데. 잘 설득해서 경찰에 데려가야겠어.’
다짜고짜 인도하려 하면 남자가 거부할 것이다. 일단 맞장구쳐주면서 기회를 보기로 한다.
그 사이에도 신원불명의 정신질환자(추정)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전 어느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어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 모든 것을 바쳐 ‘믿을 수 있는’ 존재를요. 그분과 저는 이미 연결되어 있었죠. 제가 모시는 신은, 아직 이름은 모르지만 우주에서 제일 강력한 존재가 틀림없어요. 그러니 제가 이렇게 훌륭한 사제가 된 거겠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선언.
그게 남자가 과거에 느낀 열등감의 반동이라는 걸 동철이 알 리가 없었다.
고블린은 그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웃어 보였다. 계속 공감하는 척 끄덕인다.
“아쉬웠어요. 제가 느끼는 이 기쁨을 공유한다면 좋을 텐데.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게 되기를 바랐어요. 신도를 늘리고 싶었다는 뜻이에요. 이런 걸 전도라고 한대요.”
그는 생각했다.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신을 섬기는 교인들이 늘면 세상이 얼마나 더 근사하고 아름다워질까?
“하지만 제 주변 사람들은 종교 같은 거 영 관심이 없더라구요. 그 분들 종특인지라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광장의 행렬과 천막을 가리켰다.
그가 거리로 나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갑자기 저 외계인들이 튀어나왔단 말이죠.”
“드림··· 랜드요?”
“네.”
어투에 못마땅한 감정이 배어든다.
“저 사람들이 세상 병자들을 다 치료하고 있잖아요? 큰일이에요. 이러다간 지구인들이 다 드림랜드에 귀의하게 생겼어요.”
“그게··· 왜··· 큰일···?”
“저 마지막 천막에서 번쩍이는 빛 보여요?
“···네.”
“지구 사람들은 칭찬하느라 바쁘지만 사실 저거··· 별로 대단한 수준도 아니에요. 저 사람들의 신은 그냥 고만고만한 수준이라 이거죠.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요? 제가 믿는 신이 최고니까.”
동철은 한숨을 참았다. 그리고는 행렬을 통제하는 경찰관들에게 애탄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게다가 독실한 신자는 개종하는 게 더 어렵대요. 이러다간 저 외계인들이 세상 사람들을 다 홀릴 기세에요. 그 전에 나도 신도를 늘려야 해요. 그래서 처음으로 전도할 대상을 찾고 있었는데···.”
다시 선글라스를 들어올린다. 푸른 눈동자가 동철을 직시했다.
“형을 만난 거예요!”
신이 나서 주체하지 못하는 투다.
“전 형처럼 영혼이 맑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고블린은 이능력이 없는데···.”
쓰윽, 그의 몸 전체를 훑어보며.
“형은 다르잖아요! 선택받았다는 증거에요!”
그 순간 동철은 다시 불안해졌다.
정신이 나간 사람은 맞는데 정말 이능력이 있긴 한가 보다.
미친 사람이 힘도 세면 매우 골치 아파진다는 걸 동철은 경험으로 잘 안다. 다행히 상대의 몸에는 아직 붉은 빛이 보이지 않지만, 여차하면 ‘빨리 움직이는 능력’을 발동하려 준비하며 넌지시 묻는다.
“미안하지만··· 내 눈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데요?”
“아, 그거요?”
남자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지금은 숨기고 있거든요. 저 외계인들이 기겁해서 뛰쳐나오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형한테는 특별히 보여드릴게요. 그래야 믿겠죠?”
동철은 말의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랬다간··· 저 사람들한테··· 들키···.”
“걱정 말아요. 다른 사람들은 못 보고 형만 볼 수 있게 잘 조절할 테니까.”
“······?!”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냐고 되물으려던 순간.
동철은 자신이 잊어버리고 있던 또 하나의 능력을 떠올렸다.
—!
서점을 습격한 드래곤의 정체를 간파 못해 후회했던 그날부터, 동철은 사람의 본질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상가의 ‘주인님’은 거대한 어둠을 몸 속에 품은 것처럼 느껴졌고, 그를 한 번 방문했던 단발머리의 여성에게서는 매우 많은 가닥들이 불가사리처럼 뻗어서 소용돌이치는 환상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맥락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남자의 눈에 묘한 색채가 서린 순간.
“···아? 아?!”
파아앗!
동철은 눈이 타버릴 듯한 강렬한 빛을 보았다.
***
민준은 팔짱을 풀지 않는다.
“대안이라면, 토드 말이냐? 한 종족의 씨를 말리는 죄가 무거우니 그만큼 죽여도 멸종하지 않을 종족을 고르자는 거냐? 무의미하다.”
고개를 저으며.
“최초에 나는 1억 5천만의 지성체를 제물로 상정했다. 수백 년이 흐른 뒤 카바이트의 개체 수가 그 정도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이제와 보니 현실은 그에 못 미치지. 1억 3천만 정도던가? 하지만 일단 진행할 생각이다. 무리하면 성공할 수는 있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굳이 토드로 바꾸고 싶다면.”
그는 수를 계산한다.
“5억이 넘는 토드 중에 전쟁에 무슨 기준으로 1억 5천을 분별할 테냐? 전쟁에 직접 가담했는지 여부로? 그런 자들의 수는 1할도 안 될 테다.”
“토드를 대신 바치자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희생양의 교체 대신 근본적인 접근법을 바꾸자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마정석의 대체제로 흑마법을 택한 이유는, 그게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뽑을 수 있는 프로세스이기 때문이지요.
마력은 물론이고 제물이 지닌 본연의 질량과 생명력, 원념, 각종 부정적 감정과 고통이 더해지기에 사람은 훌륭한 연료가 된다.
“하지만··· 제 생각에 더 나은 방법이 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는 이능입니다.”
민준의 입가가 굳는다. 이미 뭔가를 짐작한 눈치였다. 아시프-1은 그가 또 말을 끊기 전에 쏟아내듯 말한다.
“최초의 각성에는 대기 중 마나 농도가 중요하지만, 각성 후 이능의 위력에는 그 사람의 마력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론에 유일하게 어긋나는 이능력이 있습니다. 타고난 마력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 크게 구애받는 능력이지요.”
“잠깐.”
창조주의 제지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단 사제들의 요즘 기량을 잘 보셨을 겁니다. 최근 사건들 때문에 그들의 신심(信心)은 누구보다 깊어졌습니다.”
그 여파는 힘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들은 능력을 펼치는데 자신의 생명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습니다. 뛰어난 마력을 타고 날 필요도 없습니다. 제물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신앙만 있으면 됩니다. 누군가를 대가 없이 ‘믿기만 하면’ 힘이 차오르는 기적입니다. 심지어 그사이에 자극되는 뇌 부위는 흑마법과 정반대입니다. 무조건적인 긍정과 확신, 황홀에 가까운 도취감까지···!”
아시프-1은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낸다. 그에 반해 민준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너, 설마 그 대안이라는게···.”
아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신성력입니다!”
재고를 청하며 아시프-1은 깊게 고개를 숙인다.
직후, 그는 바닥에 서리는 민준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공기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런 아시프-1의 어깨 위에 단어가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이 말을 들으려 허비한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군.”
창조주는 이미 일어선 상태다. 여기에 더 있을 필요도 없다는 듯.
아시프-1은 다급히 고개를 올렸다.
“하지만 오직 신성력만이, 에너지 법칙과 마법 이론을 포함한 대부분의 상식에 어긋납니다. 이 힘을 활용하면 매우 적은 희생으로 태초의 종족을 깨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가 영생을 얻는 계획에도 활용할 수 있을 터입니다!”
“그건 우리가 잠들기 전엔 존재하지도 않던 힘이야. 심지어 나도 정체를 완전히 규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부터 연구를 시작하자고?”
민준도 완전히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동족들을 다 깨우고 나서 건드릴 사항이라고 생각했다.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이다.
“그리고 네 말은 전부 근거 없는 추측에 기반하고 있다. 만약, 연구가 실패한다면? 신성력 역시 무언가를 희생시킨 결과라면? 혹은, 우리가 목표하는 그 어떤 것에도 써먹을 수 없을 정도의 위력에 그친다면?”
민준은 허점을 계속 지적한다.
하지만 아시프-1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신적 요소에 근거한 이능이기에, 제 능력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사제들의 정신을 지금보다 정밀하고 깊게 들여다보고, 그들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 중 무엇이 이능으로 연결되는지 증명하겠습니다. 그게 성공한다면 저는 믿음을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들만큼 신실한 자들을 인공적으로 양산해낸단 말이냐? 그 힘을 모아 동족을 깨우자고?”
민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넌 스스로 자유 의지를 그리 강조하더니, 이젠 내 본래 계획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세뇌할 수도 있는 방법을 읊고 있어. 자가당착이다.”
“신성력 능력자들의 실상을 잘 보십시오! 우리 교단을 제외해도, 그들이 믿는 신의 대다수는 실존할 턱이 없는 허무맹랑한 관념입니다. 수많은 케이스가 입증하듯 중요한 건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허상을 향해 그리 강한 믿음을 쏘아 보낼 수 있다면, 그들 가까이 존재하며 이미 믿고 있는 누군가, 다시 말해 ‘사람’을 향한 믿음을 강화하는 건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 힘이 곧 신성력으로 발휘된다면!”
“헛소리다. 더 듣고 싶지 않군.”
이미 뒷모습을 보인 창조주를 향해 아시프-1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종족 청소의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처음은 항상 어렵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당연한 일이 됩니다.”
과정은 한층 쉬워지고 죄의식에는 무감각해진다.
“앞으로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주의 모든 사람을 세뇌할 수는 없고, 당신을 신으로 숭배하길 거부하는 종족도 나올 수 있습니다. 반항을 누를 때마다 아버지는 쉬운 방법을 찾게 될 겁니다.”
민준이 카바이트를 멸종시킨 그 후의 미래가 아시프-1은 더욱 두렵다고 생각한다.
한 번 학살을 행하면 향후 비슷한 선택이 너무도 쉬워질 것이다.
“비록 연출된 허상에 불과한 신이라고 하더라도.”
아시프-1은 믿는 바를 말한다.
“자신을 믿지 않거나, 저항하거나, 전쟁에서 진 종족과 민족을 몰살하라 명하는 신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창조주는 문을 박차고 나가기 직전에 멈췄다.
“대체, 왜.”
건조한 음성.
“내 동족들은 무방비한 상태로 가축처럼 소모되었다. 우린 이미 학살 비슷한 걸 당할 뻔했고, 난 그걸 재현하려는 것일 뿐이야. 놈들은 업보를 돌려받는 거다. 그걸 알면서 왜 이렇게까지 만류하는 것이지?”
아시프-1은 맑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한다.
“아버지께서는 답을 알고 계십니다.”
처음으로 민준의 말문이 막혔다.
아들은 오래 품은 생각을 말한다.
“감히 그들을 용서하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용서는 의무가 아니기에 고귀하며 타인이 강요할 수 없습니다. 또한 무분별한 용서는 악을 잡초처럼 번성시킬 뿐입니다. 대신 저는 징벌의 수준에 대해 간청하려 합니다.”
“······.”
“학살은 사람의 역사에 수없이 되풀이된 일이나 전례가 항상 정당성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당신께 능력의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압니다. 다만, 대안을 찾기 위한 시도를 아버지가 멈추는 게 전 너무도 두렵습니다. 당신 안의 사람을 계속 스스로 도려내는 미래가···!”
파지지직!
번개가 치듯 공간에 전광이 튄다.
아시프-1은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
그는 창조주의 정신을 읽지 못한다. 하지만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그의 심중에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몇 초가 지난 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아시프-1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제게 1년만 시간을 주시면···.”
“일주일.”
“······?!”
“이레 안에 신성력의 원리와, 그게 내 방법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