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08
309. 업(業) (14)
***
아시프-1은 달력을 볼 필요도 없었다. 창조주가 말한 기일은 12월 31일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정.
사실상 간청을 거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기간을 늘리고자 호소했지만 민준은 오히려 더 엄중해진 어조로 말했다.
“일주일 간 거기에만 매달려도 좋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른 차원의 용족들이 또 움직일 거야. 수천의 동족이 포로로 잡혔으니 명분까지 강화되었다. 우주 모함이 전쟁 억제 구실로 작용할 단계는 지났어. 너는 그 준비도 병행해야 한다.”
아시프-1은 들어올 때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이 되었다.
***
교황이 방을 나간 뒤 민준은 다시 자리에 앉는다.
“······.”
방금 들은 말을 생각한다. 그의 머릿속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우리 역시 처음부터 이상적인 꿈을 꾸지는 않았다.’
태초의 종족도 과거에는 피를 더 많은 피로 갚고, 증오에 더 깊은 증오를 돌려주는 길을 거쳤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으며, 그런 현실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민준은 모든 일을 해 왔다.
그는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 고리를 끊을 가능성을 지녔으니까.’
남들보다 앞서서 걸어가는 종족.
아시프-1은 저들이 민준에게 피를 뿌렸다고 하여, 같은 수준으로 스스로를 낮추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의 소원은 사실상 들어줄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군가의 소원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민준은 아직도 벗으로 생각하는 드래곤.
‘젠킨슨.’
소원을 바꾸겠다고 청했을 때, 민준은 그가 울타리의 범위를 정하리라 예상했다.
최소한 지구의 드래곤만이라도 식량으로 소모되지 않게 지켜달라는 기원 말이다.
헌데 젠킨슨은 전혀 다른 내용을 말했다.
‘지금쯤 용족 회의가 시작되었을까?’
그의 의지에 찬사를 보내며.
팟!
아공간에서 작은 큐브를 꺼낸다.
민준에겐 이제 이 안의 기억을 볼 의무가 없다.
‘하지만, 절실한 소원이라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민준은 그것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손에 힘을 준다.
파직!
그 순간, 큐브에 균열이 생겼다.
***
방 밖으로 나온 아시프-1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일주일!’
그는 카바이트 수용소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위험한 이능력자를 배제한 나머지 절대다수의 카바이트들은 무력하게 묶인 채 수용소로 호송되었다.
1억 3천만에 달하는 지성체를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시설로.
누구도 도망칠 수 없는 강력한 결계와 두터운 담장.
카바이트들은 절망감에 빠진 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기가··· 우리가 죽을 장소인가?!’
그 모습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아시프-1은 그들의 마음속 감정을 그대로 느꼈다. 공포가 축축한 안개처럼 행렬에 스몄다.
대부분 민간인인 그들에게는 정신 조작의 방어 장치가 없었다. 그 신기술은 최전선 병력에게만 우선적으로 조치될 정도로, 고대 종족 입장에서도 다루기 힘든 종류였기에.
‘우린··· 다 여기서 학살당할 거야!’
‘안 돼! 싫어!’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카바이트 이주민들에겐 어떤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엘라후-프라가 교단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제노사이드를 준비한다는 내용.
때문에 그들 눈에 수용소의 두터운 벽은 처형장과 평범한 세상을 분리하는 울타리로 보였다.
‘아, 제발··· 제발!’
하지만 그런 그들의 좌절은 곧 당혹스러움으로 바뀌게 된다.
누군가 말했다.
– 이게··· 다 뭐야?
벽 너머에 펼쳐진 장면은, 그들이 상상하던 교도소나 처형장과는 달랐다.
그곳에는 공간을 3차원적으로 모두 활용한 거대한 주거 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물론 그전까지 누리던 것처럼 호화로운 환경이라 볼 수는 없었다. 선형(線型)에 가까운 그들 신체구조에 완벽하게 맞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들이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자그마치 1억 3천이나 수용하는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넓이 측면에서는 여유로웠다.
심지어 그들을 감시하는 사제들은 수용자 가족을 분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기존에 거주하던 그대로 방을 배정받았고, 심지어 서로 자유롭게 오가거나 통신을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수용소의 울타리 안에서는 말이다.
– 여··· 여기, 이 식량을 좀 봐!
– 양이 엄청나잖아?
방을 배정받은 카바이트들은 그 안에 비치된 것들을 보고 반색했다.
각 방에는 1년 치가 넘는 비축 식량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기적으로 식량을 바깥에서 공급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였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희망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적어도 앞으로 1년 정도는 그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설마, 전부 헛소문이었던 걸까?’
확신이 바뀌는데 영향을 준 것은 또 있었다.
– 누··· 누구··· 세요?
그들의 수용소와 맞닿은 곳에는 고블린 주거지역이 있었다. 힘들게나마 공용어로 의사소통을 한 결과, 카바이트는 그들이 교단에 의해 구출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저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이상, 여길 광자포로 날려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죽일 거면 애초에 고블린들을 구하지도 않았겠지!’
사람들은 그제야 교단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카바이트를 대상으로 뭘 하려는 것인지.
– 이건 종족 격리 정책이다!
특정 종족을 제한 구역에 몰아넣고 이동의 자유를 금하는 행위.
전쟁에서 승리한 종족들이 흔히 취하는 선택 중 하나다.
카바이트는 그제서야 안도감을 느꼈다.
– 그래,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었어. 아무리 아시프-1이라도··· 1억이 넘는 지성체들을 학살할 리 없지!
– 맙소사, 안 믿던 신이라도 믿고 싶은 기분이군.
– 사람을 짐승처럼 도축하는 대신 최소한의 존엄은 보장해 주겠다는 걸까? 하긴.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는 존재가 그런 끔찍한 짓을 벌이지는 않을 거야.
극도의 긴장에 오래 시달린 사람들인 만큼, 불길한 소문이 틀린 걸 확신했을 때 안도감이 컸다.
일단 목숨이라도 부지하리라는 예측은 사람의 정신에 큰 영향을 끼친다.
‘희망’이 싹튼 것이다.
모습을 숨긴 아시프-1은 구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극적인 감정 변화를 확인했다.
그는 느끼는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어떤 카바이트가 딸을 향해 융모를 뻗는다. 후송되는 내내 딸을 끌어안고 공포에 떨었던 모친은 그제서야 조금이나마 안도했는지 흐느낀다. 긴 밧줄 같은 몸을 꼬아 딸을 둘러쌌다.
– 엄마··· 왜 그래?
– ···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여기 오기 직전까지 종족 청소의 소문을 들으며 두려워했다.
그 단어에는 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까지 잔혹하게 죽여버린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은 몰라도 아이라도 살아 나갈 수 있기를, 이름도 모를 신에게 기도해 왔다.
– 감사합니다!
아시프-1은 그녀의 적나라한 감정과 의념을 그대로 전달받았다. 아직 육신의 최전성기가 끝나지 않아 몸갈이를 겪은 일이 없는 모친은, 딸을 꼭 끌어안고 특정되지 않은 대상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시프-1은 수용소에 온 것을 후회했다.
‘저들 중 깨끗한 자들은 없다.’
머릿속으로 뇌까렸다.
‘저들 중 무고한 자들은 없다.’
카바이트로 태어난 이상.
그들이 태초의 종족으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범차원적인 악행의 과실을 나눠 먹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쟁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99%의 민간인들 모두 결백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젠장!’
아시프-1은 또한 알고 있었다. 카바이트들 사이에 퍼진 종족 청소의 소문.
그 근원지는 바로 그들을 관리하고 호송한 주교들이라는 사실을.
목적은 그들을 극도의 절망에 빠뜨린 다음 한 줄기 희망을 보도록 하는 것.
그렇게 간신히 비춘 낙관의 빛이 다시 무너질 때 사람의 정신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무너져내린다.
그 과정에서 표출되는 감정과 고통은 흑마법의 훌륭한 연료가 될 것이다.
‘아버지, 당신의 계획은 성공했습니다. 저들은 모릅니다. 이 수용소가··· 장기적으로는 카바이트가 아니라 토드의 수용소가 될 것임을.’
적당한 개조만 마치면 지금의 다소 여유로운 공간은 토드를 한꺼번에 수용할 빽빽한 감옥이 될 것이다.
이곳에 뿌려질 바이러스가 카바이트를 선별적으로 노린 후에 말이다.
‘정말로 불가피한 일입니까?’
아시프-1은 끊임없이 감사해하며 ‘기도’에 가까운 정신파를 내뿜던 누군가의 의념을 도저히 지울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흑마법으로 희생될 미래의 장면을, 그리고 그 감정과 절규를 그대로 흡수할 자신의 창조주를 상상했다.
그의 결심이 굳어진 순간이었다.
“막아야 한다.”
다시 의식을 현실로 되돌리며.
아시프-1은 복도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팟!
텔레포트로 모습을 감췄다.
***
“회장님? 들어가겠습니다.”
비서, 블레어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레어를 가로질러 젠킨슨의 방으로 향했다.
얼마 전 세계 곳곳에 우주 모함이 출연하고 태평양에서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의 에너지 폭풍이 검출되었던 날.
레어로 돌아온 젠킨슨은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또다시 가장 깊숙한 지하에 틀어박혔다. 블레어는 그가 혹시라도 또다시 잠에 든 것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가끔씩 대꾸가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에 깃든 감정은 블레어가 익히 접해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그 사이에도 드래곤들의 면담 요청은 폭주했다. 외계 용들과 아시프-666에 관련된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다들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후 한참 동안 침묵만 지키던 젠킨슨이, 드디어 그녀를 호출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레어의 문이 열리고.
오랫동안 묵힌 공기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리고 안으로 걸음을 딛던 블레어는.
“아아!”
몸이 돌처럼 굳는다.
그 안에는 굳은 어둠의 덩어리 같은 것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엘프는 그 장면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정확히는, 켄티우스라는 드래곤이 중증의 우울증을 겪다가 저 비슷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블레어는 힘겹게 말소리를 냈다.
“회장님!”
엘프의 시선은 어둠을 뚫고, 본체 상태의 젠킨슨을 직시한다.
그녀가 기억하던 위풍당당한 고룡은 그 자리에 없었다.
고용주를 감싸고 있는 어둠의 채도는 불균형하게 곳곳에 뭉쳐 있거나 흐트러져 있다. 조명의 효과는 아니다. 젠킨슨의 몸에 벌어진 이상 때문이다.
블레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탈피’라는 단어였다. 드래곤은 파충류와 비슷하게 정기적으로 몸 전체의 얇은 껍질을 벗겨낸다. 용을 사랑하는 블레어는 그 과정이 대충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아니었다.
탈피는 저렇게 참혹한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그녀는 목이 짓눌리는 느낌으로 말했다.
“회장님?”
실로 끔찍한 장면이었다.
반짝이는 루비처럼 아름다웠던 젠킨슨의 붉은 비늘은 예전의 빛을 잃었다. 군데군데 큼지막하게 패인 구멍이 보였다. 특히 머리는 남아 있는 비늘이 드물 정도였다. 등과 팔다리에도 지저분한 얼룩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덕분에 블레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린이 벗겨진 맨살을 보게 되었다. 어떤 연구자나 용 애호자도 못 본 진귀한 광경이었지만, 블레어는 기뻐할 수 없었다.
벗겨내다 말고 지저분하게 방치한 벽지처럼, 비늘은 곳곳에서 덜렁거리거나 일그러졌다.
그리고 젠킨슨의 발치에는 식물의 하엽마냥 떨어진 용린이 수북했다. 그걸 치울 기력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녀는 젠킨슨의 피부에서 상처나 혈흔을 찾지 못했다.
스스로 비늘을 쥐어뜯고 뽑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는 뜻이다.
블레어는 머릿속에 저장된, 일반인 이상의 드래곤 관련 지식을 훑었다. 매우 희귀한 사례가 존재하기는 한다.
‘용의 정신으로도 견딜 수 없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고통!’
대체 젠킨슨은 혼자 어떤 지옥을 겪고 온 걸까?
차마 말을 못 잇는 그녀에게, 젠킨슨이 텅 빈 눈빛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첫 마디는 사과였다.
“또다시 걱정시켜서··· 미안하군.”
왈칵,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참는 그녀에게.
레드 드래곤은 말한다.
“용족 회의를··· 소집해야겠어. 서둘러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