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43
43. Princess Run (18) >
***
– 도약 60초 전! 모든 탑승객은 자리에 앉아 보호 장구를 착용하시길 바랍니다!
인공지능이 경고음과 함께 도약 준비를 알렸다.
코드 입력을 마치고 좌석에 묶인 블레어의 표정이 시체처럼 변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혹시 도약에 문제가 생길 경우의 대비임을 스스로도 알았다. 이대로 겔랑코 차원에 도착하자 마자 처분될 것이다. 증거 인멸을 위해.
정령은 민준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도약은 이미 시작되었다.
– 59초, 58초, 57초···.
카운트다운에 맞추어 베르미 공주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종족 해방의 순간이 가까이 와 있었다. 위대한 한 걸음. 오욕으로 점철된 과거는 역사 속에 묻고 슈탄은 재도약할 것이다. 지구라는 새로운 땅에서 영광을 다시 쌓아 올릴 것이다.
도약선에는 창문이 없다. 외부에서 푸른 섬광이 번지기 시작하자 영상 센서도 작동을 멈췄기에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계기판이 말하고 있다.
몇십 초 뒤 그들은 지구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고, 그대로 몇 시간 더 기다리면 고향이 반길 것이었다.
쿵!
행복한 상상을 흔들어 놓은 것은 격한 진동이었다.
“크퉤엑!”
슈탄인 사이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쿠르르릉!
혼란스러운 괴성이 오갔다. “무슨 일이야?!” “선체가··· 이런!” 거친 폭풍에 띄워 놓은 조각배처럼 도약선이 기울고 흔들리고 있었다. 보호 장구 때문에 간신히 좌석 밖으로 튕겨 나가지는 않았다. 심상치 않은 각도로 뒤집힌 시야는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도약선의 전면 디스플레이에 길고 검은 선이 그어지더니.
콰쾅!
작은 폭발과 함께 베르미 공주의 눈에 보여서는 안 될 것이 보였다.
푸른 하늘이었다.
***
민준은 도박의 결과를 100% 확신하지 못했지만 나름의 믿는 구석은 있었다.
그가 묘사한 도약선의 탑승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굳이 이렇게 한정지은 이유가 있다. 후자라면 델이 기필코 그 정체를 확인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어떤 년’인지 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의 추측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콰르르르!
표정을 잃은 델의 등에서 청동색의 촉수가 한줄기 길게 뻗어 나왔고 민준은 새삼 다시 실감했다.
‘진짜 엔델리온이구나.’
이미 그녀의 입으로 털어 놓았지만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상공에 뜬 거대 생물이 사라지고 인간이 나타나는 장면과, 인간 몸에서 촉수가 돋아나는 장면은 차원이 달랐다.
100년에 가까운 결혼 생활의 기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촉수··· 촉수였어. 촉수···.’
채찍처럼 뻗어 나간 공격은 푸른 번개가 이글거리는 도약선을 덮쳤다!
“잠깐, 델!”
파지지직!
민준은 또 당황했다. 설마 저렇게 맨손으로··· 아니, 맨 촉수로 도약선을 잡아버릴 줄은 몰랐다. 그것도 차원 저항에 노출된 상태의 도약선에!
불꽃과 스파크가 튀고 기괴한 소리가 터졌다.
도약선을 위원회에서만 건조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저 배에 한정하여 봉쇄를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원 장벽을 통과할 때는 막대한 저항이 가해지며 어지간한 물질은 다 으스러진다. 그런데 엔델리온의 두터운 가죽은 도약선 외피정도 되어야 견디는 저항을 그대로 받아냈다.
끼기기익!
금속을 바닥에 끄는 소리가 났다. 푸른 전류가 붙들고 있는 도약선을 슬롯 밖으로 끄집어 내는 소리였다. 소름 끼치는 울림.
‘세상에, 저게 되네?!’
델의 등에 돋은 촉수는 본체 상태 보다 훨씬 짧고 얇다. 그게 거대한 도약선을 휘감은 장면은 가느다란 실로 트럭 한 대를 묶은 것과 같았다. 그런데 그 가는 한 줄기가 육중한 무게를 버텨낸다.
촉수가 부드럽게 휘고, 번개 장막으로부터 완전히 빼낸 도약선을 꽁꽁 묶은 채 하늘로 높이 치켜 올렸다. 함선을 긴 다리로 휘감은 크라켄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히드라가 출아법으로 새끼를 생산하듯 더 얇은 촉수 한줄기가 또 돋아난다. 그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허공을 베었다.
쉭!
배추 포기 끄트머리를 자르듯 도약선 전면부가 깔끔하게 절단되었다. 델은 크게 구멍 난 도약선을 뒤집고는 과자봉지 털 듯 탈탈 털었다.
민준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와우.”
저 현상에는 순수한 중력 외에도 염력이 함께 가해졌다. 그 증거로 좌석에 고정되어 있어야 할 탑승객들이 일제히 바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그들이 추락하지 않게 받아낸 것 역시 염력이었다. 허공에 흩어진 검은 점 중에는 화물도 있었다. 혹시 그 안에 숨어 있는 ‘년’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그녀답게도 집요하고 철두철미했다.
둥실!
허공에 매달린 탑승객과 화물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델은 밀항자를 색출하려는 위원회 간부 같은 눈초리로 그들을 하나 하나 눈에 담았다.
그 장면을 본 민준은 일단 최악의 사태를 피했다는 걸 깨달았다.
‘공주도 잡았고, 화물도 다 건졌다.’
도약선 탑승자 중에는 아직 목이 날아간 여자도 없다. 새삼 델이 달라 보였다.
‘······사람 됐구나, 너.’
하지만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중에 누구야? 해칠 생각은 없어. 그냥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 인사도 나누고.”
여전히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로 델이 물었다. 민준이 진실을 털어 놓을 순간이었다. 그런데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탑승객 다수가 악어를 닮은 그 종족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슈탄? 쟤네들은 자기 취향 아닌데.”
같이 산 시간이 긴 만큼 취향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의식을 잃은 트롤에게 머물지만 바로 남자인 걸 알아차리고 비껴 나갔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상대는···.
“=너구나!=”
등에 달린 촉수를 거두지도 않은 채, 델은 정신파와 육성으로 동시에 말했다. 그런데 사념의 주파수가 지나치게 컸다.
직격 당한 엘프가 까무라칠 정도로.
“꺄아악!”
그녀는 오래 전 젠킨슨의 드래곤 피어에 직격 당한 경험을 떠올렸다. 놀랍게도, 그때보다 격한 두려움이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결국 무고한 엘프는 게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었다. 허공에 둥실 고정된 채로.
“아니야! 쟤 아니야!”
민준은 엘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까 정령을 보니 상대 역시 자신에게 관심 없는 게 명백했다. 그는 드디어 진실을 털어 놓는다.
“뭐? 거짓말?!”
델은 또 한 번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말투가 매서워졌다. 더 이상 꿈 속을 걷는 듯한 황홀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니까, 일 때문에 거짓말을 해?”
몇 분 전만 해도 몽롱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현실감으로 물들었다. 델의 머리와 가슴을 물들였던, 재회가 선사하는 로맨틱한 무드가 와장창 깨져 버린 것이다.
그녀가 항의했다.
“맹세했잖아! 평생 서로에게 거짓 없이 살기로!”
“저기···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이혼했거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맹세 어긴 건 네가 먼저지.”
배우자 살해를 계획했던 전과를 지적한다. 해묵은 부부싸움이 이혼 후 처음으로 재현되었다.
“그땐 나도 제 정신 아니었어!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자기한테 거짓말 안 하려고 노력한 거 몰라? 자기 유도심문에 넘어간 게 다 그것 때문이었잖아!”
“됐고,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왜 왔냐고?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할 소리 못 할 소리 따지기 전에 할 짓 못 할 짓 먼저 구분했어야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다투는 그들을 향해 요원들이 쭈뼛대며 다가왔다. 민준은 말싸움하는 와중에도 델에게 범죄자를 넘기라고 요구했고, 델은 쏘아붙이는 와중에도 순순히 그 말을 들었다.
슈탄인이 강인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중 이능력자는 없었다. 이미 저항할 의사조차 잃어버린 그들은 순순히 항복했다.
베르미 공주는 몸을 제압하여 찍어 누르는 요원의 손길에 무방비하게 쓰러졌다. 비늘에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이 닿았다. 지구의 땅이었다. 그녀가 종족의 재부흥을 꿈꿨던 대지.
지구로 이주한 뒤에는 쉽게 주류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질적 지배자인 드래곤 비위만 잘 맞추면 될 터. 뇌물로 쓸 황금은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었다. 꼭 여인들의 희생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마법연성이라는 방법을 병행해서.
본래 생물학적 특성을 되찾고 나서도 인구 측면에서 밀릴 걱정은 없었다. 한 번 출산할 때 오크보다 많은 아이를 낳고 수명도 기니 숫자로는 결국 압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망상에 그쳤다. 신기루가 뿌옇게 흐려져 간다.
자신들이 이민자에게 당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지구인들에게 가하려고 꿈꿨던 공주는, 결국 그 희망과 영광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악어는 눈물을 흘렸다.
***
조각구름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세상은 주황색과 보라색으로 가득했다. 밤이 흔적을 드러내기 직전의 시간. 낙조가 텅 빈 계류장을 물들인다.
등에 촉수를 단 채 벌인 말싸움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사건 규모도 어마어마했으니 뒷정리와 보고가 필요했다. 민준도 한참 동안 붙잡혀 있다가 이제서야 잠깐 시간을 낸 것이다. 델은 놀랍게도··· 그때까지 그를 기다려 주었다.
둘은 공항 건물 옥상 난간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다. 두 사람 사이 일 미터 남짓한 거리가 마음의 간격을 투영했다.
“미안해, 소란 피워서.”
델의 말을 듣고 그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정말 많이 변했구나.’
퇴소하면 어떤 방향으로든 변할 걸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텔레시아는 일반인으로서 100년도 살지 못했고, 수형자로서는 300년 넘게 살았다. 그 결과 퇴소 후 그녀의 인격을 압도한 것은 그 차원을 위해 봉사하며 쌓아 올린 기억과 가치관이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비극적 선택을 내리도록 이끌었다.
델 역시 지금은 본래 자아와 수형자 자아가 융합되어 있다. 어느 쪽이 더 큰가 하면, 아무래도 엔델리온 시절 축적된 것일 확률이 컸다.
정체성과 기억을 지운 수형자의 자아는 무엇에 영향을 받는가? 민준은 지금 자신의 성격이나 퇴소 전 델의 성격이 본성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인격이라고 치부하기도 어렵다. 답은 위원회 간부 중에서도 소수만 알고 있을 터다.
“흥분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건 원래 성격이었던 것 같아.”
민준의 상념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델은 변명했다.
“아무리 안에 범죄자가 타고 있어도··· 피해자인 엘프까지 위협한 건 잘못했어. 정신을 잃어서 직접 사과하진 못하겠지만 전달될 수 있도록 소소한 선물과 편지를 남겨 놨어.”
“왜 온 거야?”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날 죽이러 왔구나!’였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묘했다.
전처는 엔델리온이었다. 그녀가 손을 쓴다고 민준이 얌전히 죽어주지는 않겠지만, 정말 죽이고 싶으면 도주를 사전 차단하고 기습하는 등 좋은 방법이 많을 것이다.
델이 답했다.
“이유가 그렇게 중요해?”
“그만하자.”
“······알았어. 여기 온 목적은 세 가지야. 하나는··· 정말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었어. 오래 못 봤으니까.”
얼굴에 수줍은 색이 또 한 번 스친다. 이런 부분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한테 사과하고 싶었어.”
민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상상도 되고, 공감도 돼.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자기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몇십 년 함께 살아온 배우자가 자신을 죽일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한 목소리로 털어 놓았을 때 남편이 느낄 심정.
“내가 그때··· 많이 힘들었어. 이 이상 변명하지 않을게.”
수형자의 파견지는 위원회 지시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한 세계에서 일을 마친 다음 브래들리와 민준처럼 함께 움직이는 경우도 있지만 필요에 따라 다른 차원으로 찢어질 확률도 높았다. 그런 일이 수형생활 내내 몇 번이나 이어진다. 민준만 해도 8백 년간 일곱 번을 옮겨 다녔고 그 때마다 그쪽 세계에서 맺었던 인연과 사회적 지위는 리셋되었다. 수형자 동료들 간 관계도 마찬가지.
민준이 절대 말해주기 않았기에, 델은 그의 보석금이 정확히 얼마인지 몰랐지만 말도 안 되게 비쌀 거라는 것은 알았다. 그가 한 달 못 미치는 텀으로 지불하는 ‘생존세’가 2천 달란트였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로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당시의 델은 생각했다. 어차피 민준이 자력으로 퇴소할 수 없다면 자유로워질 방법은 하나라고.
죽음.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
죽여서 탈출시킨다는 망상은 버렸다는 뜻. 민준은 몇 번이나 놀라고 있었다.
델의 눈동자에 명료한 빛이 서렸다.
“하지만, 이게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건 똑같아.”
그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한다.
“잡범 하나 잡고 받는 달란트는 백에서 이백 정도지? 1년에 200명 조금 못 미치게 잡아야 겨우 2만 5천 달란트. 그런데 매년 생존세로 내는 달란트가 2만 5천이잖아? 잔고는 제로야. 그렇다고 세금을 안 내면 위원회 조세징수사령부에서 보낸 특수부대에게 살해당할 거고.”
민준이 잘 아는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전 재산 끌어 자기 통장에 꽂아 줄 수도 없어.”
퇴직금은 ‘수형자 계좌’에서 출금되는데, 델 같은 일반인이 송금하거나 기타 차명 계좌에서 옮기면 특별증여세 90%가 자동 차감된다.
에델리네스를 살려 주는 대가로 젠킨슨이 1만 달란트를 송금했을 당시, 증여세까지 그가 부담하는 조건이었기에 회장이 실제로 보낸 금액은 10만 달란트였다. 9만 달란트는 물론 위원회가 회수해갔다.
따라서, 증여세 차감 없이 달란트를 송금 받으려면 현상금을 타거나 위원회가 고시한 특별 임무를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자기 퇴직금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그런 거액을 공용 화폐로 동원할 수 있는 개인은 거의 없어. 적어도 난 못 해.”
“그렇겠지.”
이제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재회한 흥분이 빠져나간 델은 놀랄 정도로 차분했다.
그녀가 민준을 찾아온 세번째 이유를 말했다.
“자기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그가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었다.
현상금 사냥이나 변사(變死)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게 내가 사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서린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린 장본인이 그 죄값을 치르겠다는 제안이었다.
“난 엔델리온이야.”
그 말은 다른 종족이 모르는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다는 뜻.
“위원회 고시 특수임무 47번.”
그녀가 말하자 마자, 민준은 자연스레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외계 문자를 읽었다.
47. 오래 전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다음 종족의 완벽한 DNA 샘플을 확보하여 제공.
(1) 데모닉 고블린 (2) 금속 이끼 제7형 (3) 성간부유 슬라임 중 그 색이 황금색을 띄는 종류
: 1개종 당 58만 달란트
델은 이어서 약간의 정보를 민준에게 넘겼다. 위원회 제재를 받지 않고 ‘선의’로 흘릴 수 있는 최대치의 정보를.
그 후로 두 사람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고 민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예감과는 달리 서로 죽고 죽이기 위한 싸움은 없었다. 델은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나, 직업이 있더라고.”
엔델리온은 위원회를 운영하는 종족이다. 그들은 구성원이 기피하는 사회필수적 노동 대부분을 수형자들에게 떠넘기기로 유명한데, 직접 맡아서 하는 일이 있다면 분명 심상치 않은 종류의 것임을 민준은 예감했다.
그리고 델이 정말로 자신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도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사죄와 선의를 표했다는 것은 이해했고 그것을 받아들였으나, 그 다음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델도 감히 요구하지 못했다. 그저 종종 이런 식으로 한 번 들릴 것이라는 사실만 암시했다. 그들은 그대로 헤어졌다.
“······.”
민준이 떠난 뒤 델은 바로 움직이는 대신 옥상 난간에 잠시 더 앉아 있었다.
하늘을 가득 칠했던 금색 불길은 지평선에게 잡아 먹혔다. 구름이 검푸른 어둠에 묻히고, 밤에 움직이는 것들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켤 무렵.
델의 귓가에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렸다. 저 멀리서, 몇 개의 차원을 넘어 전달된 사념이었다.
=······아! 겨우 찾았다. 공주님! 일하기 싫다고 노래를 부르시더니 기어코 그 먼 변방 차원까지 도망가셨습니까?!=
델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중얼거리듯.
“알았어. 곧 갈게. 봉쇄나 풀어 놔.”
젠킨슨이 위원회 협조 하에 발동한 봉쇄령은 아직 유효했다. 그녀의 정체를 알지도 못하는 용에게 설명하는 것보다 위원회를 직접 움직이는 것이 빨랐다.
=이미 풀어놨습니다.=
“여기 터미널 기능이 마비되었는데.”
=그것도 처리해 놓았습니다. 그냥 바로 도약하시면 됩니다.=
지구 기록에는 자세한 내용이 남지 않을 것이다. 위원회가 ‘극비’로 처리한 임무 때문에 도약선 한 대가 왔다 갔다는 정도만 기록되리라.
잠시 허공을 바라본다. 그녀는 전 남편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앞으로 하려는 일에 대해서도. 수형자 때는 일반인으로서 저지른 죄값을 갚고, 일반인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수형자 때 저지른 일을 속죄하는 자기 신세도 참 기구하다 싶었다.
마지막까지 민준에게는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결심한대로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퇴소에 도움될 정보를 내밀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뒤 그 말을 하면 협박으로 비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것은 싫었다.
=저··· 공주님?=
재촉하는 정신파.
그녀는 바로 일어나는 대신 옆을 보았다. 본체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보통 인간보다 훨씬 감각이 예민한 변신체는 그곳에 희미하게 서린 한 남자의 체온과 향기를 감지했다.
델은 이대로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떠나기로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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