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80
80. 불신지옥 (8) >
***
뒷북치며 스트립 바에 내려온 수형자는 현재 크리스토프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데, 민준과는 지구에서 처음 알게 된 사이였다.
이따금 위원회에서 이번처럼 특정 차원 수형자에게만 임무를 내릴 때가 있는데 당시에도 경쟁이 붙어서 어쩔 수 없이 엮였던 것.
그리고 그때 기억이 아주 끔찍한 형태로 남은 듯했다.
“뭐 마실래?”
민준은 바 뒤의 진열장을 눈으로 쓱 훑는다.
스트립 바 치고는 위스키 구색이 꽤 훌륭했다. 몸값 높기로 소문난 마스터 블렌더(Master blender)나 마스터 디스틸러(Master distiller)의 서명이 적힌 라벨이 몇 개나 눈에 띄었다. 서체는 당연히 드워프 특유의 그림인지 글씨인지 구분 안 가는 꼬부랑 글씨였고 말이다.
“난 됐어.”
“그러지 말고 한잔하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또 한 병 꺼내서 따른다. 매장 월세보다 비쌀 것이 분명한 술이었다.
여기 주인이 평범한 자라면 보고 기겁을 했겠지만 리암은 평범한 상인이 아니라 독일 최고의 정보상인이다.
여기 진열한 비싼 술은 가끔씩 스트립 쇼를 목적으로 찾아오는 순진한(?) 취객들을 등쳐먹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들 같은 진짜 손님들을 위한 향응의 목적이 더 큰 것이다.
잔 바닥을 채우는 갈색 액체를 보며 크리스토프가 중얼거렸다.
“혹시 이걸 마시면 토사곽란에 시달리게 된다거나···.”
“아, 거 참. 의심 많네.”
“난 똑똑히 기억해. 너랑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웃는 얼굴로 식사를 마친 어떤 수형자가, 헤어지고 딱 한 시간 뒤에 콜레라 증상을 보이면서 위아래로 폭포처럼 게워내고 쏟아 내기 시작했던 걸.”
민준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기억나네. 그런데 그게 나 때문이라는 증거가 있나? 그땐 60년대였잖아. 콜레라가 지금처럼 드물지 않던 시절이지. 지구인들 위생관념도 좋지 않았고. 요리사가 손을 안 씻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그런데, 콜레라와 동시에 점막통각과민증후군도 같이 발병했잖아! 그거 심지어 지구인 기준으로는 희귀병이야!”
그랬었나?
거기까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들어보니 자기가 할 법한 짓이긴 하다고 민준은 생각했다. 콜레라에 기인한 탈수 증상만으로는 초인적인 수형자의 움직임을 봉할 수 없으니까.
그런 자아성찰은 가슴 속에 묻어 둔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증거 있나?”
“······.”
어쨌든 수형자끼리 죽고 죽이려고 작정하고 꾸몄던 짓은 아니다. 그랬다가는 위원회에 의해 척살 될 것이 뻔하니까. 그들의 도구가 완전히 망가지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한 위원회는 잘 나서지 않는 편이다. 개입하더라도 사전 예방보다는 사후 징벌 패턴에 가까웠다.
아래로 용암을 분출하는 괴로움을 느꼈어야 할 – 지금 와서는 수형자 인식번호가 가물가물한 – 그 희생자도 며칠 좀 힘들어 하다가 결국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것이 분명했다. 민준이 볼일을 다 끝낸 뒤에 말이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먹지 말던가. 나 원, 참. 수형자들끼리 이렇게 서로 못 믿고 배척해서야···. 그야말로 불신의 시대군.”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그게 네가 할 말이냐?’라는 질책과 비난이 가득한 눈으로 민준을 노려보았다.
뻔뻔하게 그 시선을 받아치며 민준이 말했다.
“아까 보니 리암 반응이 좀 이상하던데.”
“무슨 말이지?”
“내가 이번 일로 자기를 찾아온 첫번째 수형자라던데.”
임무를 확인하자 마자 바로 비행기 티켓을 확보하고 독일로 날아왔지만 이곳에 배치된 요원들보다는 한 발 늦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반나절이 넘는 시간동안 아무도 리암을 찾지 않았던 것이다.
민준의 질문에 크리스토프는 잠깐 주저했다.
“이거, 유럽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되는 정보인데···.”
“정보 교환 안 할 거야?”
이미 말려 버렸다는 생각이 드는지 약간 체념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지금 주변의 수형자들은 전부 칼리에테르가 시킨 일 때문에 묶여 있어. 나는 운이 좋아서 잠깐 빠져나온 거야.”
이 인근 거주하는 수형자 중 그 고룡에게 빚 하나쯤 지지 않은 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민준 입장에서는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였지만 현실이 그랬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체코 일부까지 영지로 삼은 그 고룡은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태 때문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고 지구인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거라 판단하고는 수형자들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무슨 일인데?”
크리스토프가 자기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보도통제 때문에 아직 언론을 타지는 않았는데··· 요즘 갑자기 독일 곳곳에서 미치광이들이 날뛰고 있어.”
“미치광이?”
크리스토프의 말에 따르면, 서로 어떤 연결고리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갑자기 미쳐서 잔혹한 살해극을 벌이는 사건이 이어지는 중이라고 했다.
공통점은 전날까지도 멀쩡했던 범인이 모두가 잠든 밤 중에 갑자기 회까닥 돌아버려서 각종 흉기로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는 것.
제일 골치 아픈 부분은, 비슷한 짓을 벌임에도 불구하고 그 범인들 사이에는 도무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적은 희생으로 마무리된 케이스는 범인이 4세 오크 소녀였던 아우구스부르크 시의 사건이었다. 새벽 2시에 무슨 이유서인지 부엌까지 내려가 과도를 손에 쥐고 부모의 침실로 들어간 소녀는 그것을 모친의 배에 찔러 넣었다. 하지만 성인 오크의 단단한 복근과 질긴 가죽을 4세 소녀가 뚫을 수는 없었고 결국 누구도 죽지 않고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반대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장소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이었다. 불행하게도 범인은 그날 파출소에서 당직을 서던 경찰관이었고 그에게는 총기가 있었다. 더욱 끔찍한 불행은 그의 종족이 트롤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날 밤 트롤을 제외한 마을의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더 이상한 건, 범인들 전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해. 그냥··· 끔찍한 꿈을 꾼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어.”
“꿈?”
민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슬로 학파 잔당 짓이 아닌가 싶었거든? 사람들 정신을 조종하는 건 흑마법사들이나 할 짓거리잖아. 뇌에 벌레 같은 거 박아서 말이야.”
말하고 나니 눈 앞의 상대도 흑마법사라는 것을 깨달은 크리스토프는 움찔하며 눈치를 살폈지만 민준은 괜찮다는 듯 턱짓을 했다. 이야기를 계속 하라는 뜻이었다.
“왜냐면··· 대부분의 현장이 그만큼 끔찍했어. 난 지구에 와서 그런 건 처음 봤다. 어휴.”
기억을 되살린 듯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시체가 온전한 것이 없더라고. 원래··· 흑마법사들이 제물 바칠 때 그런 짓거리를 하잖아?”
그런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칼리에테르가 직접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곳에 마법이 개입한 흔적은 없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능력을 지닌 종족이 밀항해 온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린다.
“갑자기 이런 임무가 뜨지 뭐야?”
“그 사건들, 최초 발생 시점이 언제였지?”
크리스토프의 답을 들은 민준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가 말한 날짜는 요하임 슈타인마이어가 총대주교의 머리를 가지고 사라진 직후였다.
“이걸 우연이라고 하면 개도 웃을 일이군.”
“그래. 더군다나 ‘엘라후-프라가?’ 그 교단 교리에 꿈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좀 더 생각하던 민준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이게 요하임과 연관된 일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군. 신성력 중에 정신 지배가 가능한 종류가 있던가? 상처 치료하고 귀신이나 성불시키는 걸 넘어선 거잖아. 네가 의심한대로··· 이건 오히려 흑마법에 가까운 것 같은데.”
“나야 모를 일이지.”
“그럼, 마지막으로 사건이 벌어진 곳은?”
그 사건들을 따라가면 요하임의 동선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또 애매하단 말이지.”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크리스토프가 정보상인을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야기하기 전에.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토사구팽당하지는 않겠다는 열의가 눈에 가득했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사망한 총대주교의 생전 행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독일에서 활동하는 수형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근에 교단 내에서 벌어진 사건을 모르고 있었고, 민준은 총대주교가 고위 성직자들을 차례로 죽여버렸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가 결국 민준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과, 죽는 순간 총대주교가 보인 기묘한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했다.
“뭐야, 그 작자··· 죽기 전에 이미 미쳐 버린 상태였던 거야?”
크리스토프는 미궁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위원회는 왜 그런 미치광이 머리를 가져오라는 거지?”
“뭐야, 손님이 늘었잖아?”
정보를 취합하기 위해 골방으로 들어갔던 리암이 돌아와서 둘로 늘어난 고객들을 바라보았다.
민준이 물었다.
“좀 알아봤나?”
정보 상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움직임에 맞춰 탄력 없는 피부가 흐느적거렸다.
“우리 애들이 보고, 듣고, 맡은 내용을 종합해 봤는데 말이야···.”
리암은 드루이드다.
보통의 드루이드 능력자와는 다르게 한 가지 종(種)만 통제 가능한 대신 그 효율은 일반 능력자들과 비교할 수 없이 우월했다.
민준은 그가 얼마나 멀리 있는 짐승까지 부릴 수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일단 독일 내 사건은 거의 커버가 가능하니 최소 범위가 그 정도는 되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정보를 말해줄 듯 입 안에서 굴리던 리암이 말했다.
“크리스토프, 넌 왜 왔는데?”
뻔히 짐작하면서도 떠 보는 것이다. 크리스토프가 민준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이쪽과 같은 용건이야.”
그러자 정보 상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알지? 나는 공동구매할인 같은 거 취급 안 해. 같은 정보를 원해도 둘 다 정보료를 내라고. 그리고 중고거래는 상도덕에 어긋나는 거 알지? 나한테서 산 정보 다른 놈한테 팔아 버리면 이제 나랑 거래 못 하는 거야.”
“알아. 알아. 그래서 얼만데?”
“300만 마르크.”
평범한 중산층이 평생 일해서 한 푼도 안 쓰고 저축해도 모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기절초풍할 이용료.
그런데 수형자들 반응은 반대였다.
“뭐? 300만? 왜 이렇게 싸?”
“정보 확실한 거 맞아? 애매하니까 값 깎은 거지?”
리암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돈 내기 전에는 아무 말도 못 해줘. 어떡할 거야? 살 거야, 말 거야?”
크리스토프는 별 수 없다는 듯 스마트폰을 꺼내서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송금 완료.”
“확인했다.”
반면, 민준은 핸드폰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3백만이라고?”
뭔가를 가늠하듯 중얼거리더니 손가락을 딱 튕긴다.
그 다음 순간 리암의 시야에서 민준이 사라져버렸다.
“······.”
바 위에 천 마르크 지폐 뭉치가 수북하게 쌓여서 가뜩이나 키가 작은 그의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약간의 침묵 후 정보 상인이 중얼거린다.
“저기, 혹시 계좌이체라고 들어 봤어?”
“은행 금고보다 내 주머니가 더 안전해.”
“······옮기기 귀찮게.”
그림 형제의 초상화 수천 장을 바 아래로 내리면서 정보 상인이 말했다.
“어차피 똑같은 정보료 받은 동일한 정보니까 둘이 같이 들어.”
그의 설명이 끝난 뒤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체코? 생각보다 멀리 안 갔군. 바로 지구 반대편으로 튀어 버렸을 줄 알았더니.”
“다시 말하지만, 어제 거기 도착한 여행자 냄새가 요하임 슈타인마이어랑 똑같다는 거다. 동일인이라는 보증은 못 해줘. 그래서 300만 마르크라는 저렴한 정보료가 책정된 거야.”
크리스토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돌려서 묻는다.
예상과는 달리 상식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그의 태도 때문에 경계심이 약간 누그러진 것 같았다.
“······어떡할 거야? 민준, 당신은 계속 혼자 움직일 건가? 혹시 더 교환할 정보가 있으면 서로 털어내는 건 어때?”
최근 독일에서 발생한 기괴한 사태에 민준이 관심을 가진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아직 사건 발생 장소와 시간대 말고도 말하지 않은 내용이 하나 더 있다. 민준 역시 모든 패를 까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그런데 민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긴장이 꽤 풀린 듯 그 사이 술을 홀짝거리며 몇 모금 마신 상태였다. 민준은 잔을 잡은 크리스토프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순간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바로 잔을 내려놓는다.
“······왜 이래? 설마, 이 술에다가 뭐라도 탄···!”
이어진 민준의 말은 허를 찔렀다.
우려와는 다른 방향으로.
“어쩐지 계속 느낌이 이상하더라니··· 이제 알겠네.”
“뭐?”
“야, 너는 올해로 수형자 짬밥이 몇 년인데 아직까지 그런 걸 붙이고 다니냐?”
“?!”
말을 마친 민준이 품에서 번개와 같은 속도로 제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자연스럽고도 빨라서 크리스토프는 미처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쉬익!
바 위에 올려놓은 크리스토프의 손등을 검이 내려 찍는다!
쾅!
그리고 찢어지는 비명.
“으아아악!”
온 몸의 신경이 불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크리스토프는 절규했다. 용 수준의 항마력이 없는 이상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저주가 침투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크아아아아악!
벽을 뚫고 처절한 절규가 들렸다. 크리스토프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 민준과 리암이 동시에 고개를 쳐든다. 소리가 들린 곳은 건물 옥상 쪽 같았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리암은 이어지는 광경에 헉!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검에 꿰뚫린 크리스토프의 피부가 부글거리며 부풀었다. 그리고는 본래 그곳에 달려 있을 턱이 없는 신체 일부를 조형한다. 그것을 눈에 담은 리암이 중얼거렸다.
“······귀?”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손등에는 가운데가 관통 당한 귀가 종양처럼 피어나 있었다.
형태와 크기를 볼 때 인간의 것은 아니다.
“엘프?!”
민준이 주머니에서 천 마르크 뭉치를 하나 더 꺼낸다. 크리스토프는 이미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문 채 기절해 있었다. 그의 발치에 돈 뭉치를 던지고는 검을 회수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바닥에 떨어진 돈이 노랗게 젖어 있었다.
“이건 병원비라고 전해줘.”
말을 마친 순간 민준은 지하실에서 모습을 감췄다.
방금 대화를 엿들은 발칙한 엘프의 나머지 한쪽 귀 역시 뚫어줄 생각을 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방금 전보다 약간 더 깊은 관통상이 될 것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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