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93
93. 불신지옥 (21) >
***
성스러운 빛이 관통한다. 그림자가 흩어진다. 종양이 부푼다. 단검이 박힌다. 펑! 녹아 사라지는 살점. 그림자가 짙어진다.
신성 마법으로 몸에 종양을 만드는 족족 수형자는 그것을 제물로 바친다. 성직자의 공격을 자기희생적 흑마법에 이용하여 오히려 강해지고 있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악순환 같았지만 외계인들이 공격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흑마법으로 소모하는 생명력에는 한계가 있다!’
싸움이 길어지면 결국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짠 끝에 고사하리라 판단한 것. 혹은, 더 이상 뽑아낼 생명력이 없어서 종양 덩어리에 파묻혀도 좋았다.
하지만 그런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재판관들은 이제야 생각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자기희생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하지만 수형자는 여전히 멀쩡했고 스스로를 찌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싸움이 길어지면 밤새 저 짓을 할 것 같다는 공포감마저 들었다.
‘대체 종족이 뭐길래? 드래곤도 생명력을 저 정도 쥐어짰으면 죽고도 남을···!’
생각이 거기에서 끊기고, 재판관은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느낌을 받았다.
트롤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무한한 회복.
그걸 뒷받침하는 막대한 생명력.
경전 구절을 머릿속으로 뇌까린다.
‘선지자가 답하되, 그들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을 가슴에 품은 자들이라.’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이런 불경한!’
애써 부인한다.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혼잡해진 심상은 움직임을 무디게 만들었다.
물론, 그 틈을 민준은 놓치지 않는다.
쉬익!
다시 한번 그림자가 채찍처럼 뻗어 나간다. 목표물은 총대주교의 머리. 그리고 이번에는 결국 그것에 닿았다.
촤륵!
황홀한 빛을 뿜는 머리를 그림자가 묶는다. 재판관들은 노호를 지르며 검은 촉수를 공격했다. 하지만 가느다란 어둠이 끊어지기 직전, 민준은 가닥 끝을 힘껏 튕긴다. 하늘 높이 머리를 집어 던졌다!
쉬이익!
무거운 바람이 그들을 쓸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돌풍을 만든 이는 드래곤이었다. 민준의 정신파를 읽고 날아오른다. 그리고 직선에 가깝게 솟구치던 머리를 앞발로 냉큼 잡아챈다.
=휴, 잡았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지상의 싸움이 멈췄다. 민준은 여전히 저들을 죽일 생각이 없고, 재판관들의 우선순위는 총대주교에게 있었다.
외계인이 당혹감 속에서 외친다.
=드래곤이여! 그 머리는 우리 교단 것이오!=
하은성은 대답 없이 민준의 지시를 기다린다. 그 침묵을 뚫고 성직자가 다시 말했다.
=그대는 용의 육신을 가졌으니 수형자가 아닐지언데, 왜 위원회를 돕는 것이오?!=
‘수형자? 위원회? 저게 무슨 엘프 깡소주 까는 소리야.’
응답이 없자 재판관들이 시선을 교환한다. 이어 그들 손에 빛이 모였다. 공중에 뜬 드래곤을 요격하여 떨어뜨리려는 속셈.
그러자.
“!”
재판관들은 공기의 색이 일순간 달라진 것을 느꼈다.
무겁게 퍼져 나가는 압박감. 근원은 민준이었다.
“거기서 멈추는 게 좋을 걸.”
피부를 찌를 듯한 살기가 진동한다. 그림자에 가려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버티고 선 몸 전체에서 얼어붙을 것 같은 기운이 새어 나왔다.
외계인들 입장에서는 여태 그와 싸우면서도 느끼지 못한 맹렬한 투기와 분노였다.
그들도 안다. 저 수형자가 자신들 목숨을 노리는 대신 무력화를 최우선시하여 싸운 것을. 하지만 급변한 기세는 당장이라도 성직자들의 목을 칠 듯 날카로웠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다. 굳은 그들을 향해 민준이 단검을 겨냥한다. 그리고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가급적 셋 다 살려 두려는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분노를 투영하듯 그림자가 거칠게 흔들린다.
“내 사유재산 건드리면 이런 배려도 끝이야. 아직 돌이킬 수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재판관들은 그가 지칭한 대상이 총대주교의 머리라고 생각했다. 방금 빼앗아 간 주제에 자기 거라고 엄포 놓다니! 참으로 뻔뻔한 언사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그들은 곧 착각을 깨달았다.
“저 드래곤 공격하면 후환을 각오해야 할 거야.”
“?!”
한 명이 더듬거리며 말한다.
=사유재산이라는 게··· 설마, 저 용을 말하는 게요?=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재판관들은 경악했으며, 하은성은 더 경악했다.
‘진짜 나를 노예로 생각하는 거야?!’
정확히는 가축으로 여긴다는 걸 알 턱이 없다.
하은성은 민준의 발언에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저 노예 아닌데요!’라고 소리칠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지시에 따라 조금씩 고도를 낮춘다. 그러는 사이 민준은 재판관들이 용을 해하지 못하도록 경계했다.
그 모습을 본 재판관들은 영혼이 달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하은성의 반응 때문이었다.
‘왜 부인 안 해?! 왜 화를 안 내는 것이냐!’
드래곤은 기본적으로 알을 깨기 전부터 지독한 종족차별주의자인 동시에 용족우월주의자이며 뒤틀린 나르시시스트들이다. 민준이 용을 복속시켰다고 주장한 순간, 그 대상이 된 드래곤은 미친 듯이 분노하며 불을 뿜어내야 마땅했다. 어리든 늙든, 약하든 강하든 상관없다. 용이란 그런 생물이니까. 무릎 꿇고 굴욕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 수치심을 격노로 표하는 생물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태도는 어떤가?
‘어째서 저렇게 고분고분하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싸움에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한 부분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용이 살은 왜 저렇게 찐 것이냐? 설마··· 학대당한 건가?!’
진정으로 복속시키고 지배한 것인가? 드래곤을?
재판관들은 몸이 옅게 떨리는 것을 느낀다.
지구인 사제들에게는 삭제되고 검열된 채 전달된 아시프의 서, 그 원문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선지자가 답하되, 태초의 종족은 역사가 글로 적히기 전 누구보다 먼저 엘라후-프라가에 거처하였으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을 가슴에 품은 자들로 영겁에 가까운 시간 잠들되 죽지 않고 꿈으로 어떤 것도 창조하는 위대한 자들이니라. 그리고···.’
어떤 문장은 위원회를 두려워하여 지워냈지만 또 어떤 문장은 유출될 경우 특정 종족과 심각한 불화를 유발할 수 있기에 도려냈다. 지금 이 광경을 보며 그들이 뇌까리는 문장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용을 지배하여 그들의 피와 살로 목을 축이는 자들이라.’
민준은 하늘로 손을 뻗는다. 그 위에서 용이 저공비행하며 잘린 목을 들고 오고 있었다. 사냥 보냈던 새가 매사냥꾼 손의 버렁을 향해 날아오듯이. 혹은 프리스비를 낚아챈 사냥개가 주인에게 달려오듯이.
재판관들은 저항할 생각도 못한 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머리를 민준에게 넘긴 순간.
팟!
“?!”
민준조차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영롱한 빛을 뿌리던 총대주교의 머리에서 전과 비교되지 않는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재판관들은 그것에 맺힌 신성력이 무섭게 들끓는 것을 감지했다. 밤이 내린 순간부터 브레먼하펀 시민들을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광기에 물들인 힘이, 민준과 닿은 순간 폭주하기 시작했다.
‘뭐야?!’
민준은 파도처럼 일렁이는 힘이 내면으로 쏟아지는 것을 느낀다. 직후, 수형자는 눈 뜬 채 정신을 잃었다.
***
민준은 악몽과 마주한다.
꿈을 엮는 재료는 수형자가 겪은 가장 끔찍한 기억, 절대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편린이었다.
시선을 떨치고 회상의 늪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소용없다. 어떤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그 생각이 더 지독하게 들러붙으며 종국에는 그것 말고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픈 과거는 뿌리칠수록 필사적으로 기어온다. 흉터로 남은 기억 중 가장 덜 묵힌 것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
– 나를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아. 아마, 미쳤을 거야. 제정신으로 버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당신 생각을 하면 그럴 수밖에 없어.
불쌍한 델. 추궁받으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무표정하게 읊던 그녀를 기억한다. 전처는 분명 미쳐 있었다. 엔델리온의 영혼을 인간 몸에 쑤셔 넣은 부작용이었을까?
결혼 후 몇십 년은 별 문제없이 살았다. 처음의 불같은 감정이 쭉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오래된 커플이 그렇듯 전우애가 생겼다. 둘은 실제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싸웠으니 그 이상 적절한 표현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민준이 평생 죄인으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이성을 잃었다. 또한 위원회의 통지서 한 장이면 강제로 찢기고 재배치되어 영원히 서로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은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것도 너무 깊게.
부부의 인연이 윤회 후에 이어진다는 미신에 빠진 것은, 그녀가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민준은 중얼거린다. 아니, 난 믿지 않아. 그런 미신도,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이 날 죽이려는 망상에 빠졌을 때, 그걸 알았을 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을 것 같아?
– 저주한다! 내 안에 남은 모든 힘을 끌어 모아 널 저주한다! 내가 부리던 모든 망령들이 널 갉아먹을 것이야! 그 장관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원통할 뿐이군!
미안하지만, 그 저주는 반만 성공했더군. 민준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사령술사를 향해 속삭인다. 망령들에게 내 몸을 빼앗으라고 지시했지? 그들은 내게 빙의를 시도하자 마자 뭔가에 당한 듯 비명 지르며 도망가더라고. 정신파였지만 소리로 비유하자면··· 그래. 오크를 산 채로 불태우는 듯한 절규였어. 내 영혼에 닿은 찰나 끔찍한 고통을 느낀 게지.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 뒤로 날 지독하게 쫓아다니더군. 잠을 거의 자지 못했어. 귓가에 속삭이는 저주와 삿된 말 때문에. 몇 번이고 죽음을 생각했지. 그 기억은 아직도 떠올리기 싫어.
하지만 전화위복이랄까, 난 결국 그들을 지배하는 법을 깨우쳤지. 그 부분은 고맙게 생각해. 이제 알겠나? 이 기억은 이미 극복한 고통이고, 이미 극복한 괴로움이야.
그러니 이건 악몽이 아니야.
넘어가자고.
– 현재 ‘아시프-666’ 명의 수형자 계좌 잔액은 0 달란트입니다. 주의하십시오. 계좌 내 달란트가 마이너스(-)로 전환된 순간 법정이자가 부과되며 과도한 연체 시 즉결 처형될 수 있습니다.
상호간 사전 협의 없이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 상황을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수형자로서 최초로 눈뜨는 순간은 잔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준은 아무런 기억도 없이 하얗게 비운 정신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처음 들은 음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기한 내 생존세를 내지 않으면 바로 도축 처분될 것이라는 선고.
백지가 된 채 마주한 세상은 그에게 너무도 잔혹했다.
전생의 업보를 탓하는 종교인처럼, 민준은 기억이 삭제되기 전의 자신을 저주했다. 대체 무슨 끔찍한 짓을 저질렀기에, 어떤 큰 죄를 저질렀기에? 죄목이 무엇이기에 이런 참담한 감옥 속에 갇혀서 살아가야 하는가?
예상컨대 앞으로 이어질 삶은 지옥이리라.
그것이 민준이 기억하는 최초의 장면이다. 수형자로서의 의식을 갖게 된 후 처음 느낀 감정과, 처음으로 품은 생각.
잠깐만.
이게 정말 처음일까?
과연, 이게 끔찍한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단정지을 수 있을까?
그 이전엔 아무 것도 없었을까?
민준은 생각한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 보자.
– 저희 제안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와 마주한 자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외모는 갈색 털에 덮인 뱀과 비슷하다. 달팽이관처럼 말린 두부(頭部)에서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다른 종족은 저희들이 차원계를 잠시 떠나 있었다고 생각하지요. 먼 옛날에는 존재했으나 갑자기 사라졌다는 의미에서 ‘고대 종족’이라고 부르는 것 같고요. 하지만 틀린 이야기입니다. 저희는 다른 어디로 갔던 적이 없습니다. 잠들어 있었지요. 꽤 긴 시간을.
그가 되묻는다. 잠들어 있었다고요? 왜?
– 당신들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 이 시대 사람들이 고대라고 부르는 과거에 우리는 당신들을 애타게 찾아 헤맸습니다. 하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죠.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요.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우리가 잠든 당신들을 찾아가는 대신, 당신들이 깨어나서 움직이기를 기다리기로요. 하지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대를 이어서 기다리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후손들이 깨어난 우리를 맞이하도록.
– 우린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후손들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을 영접할 기회를요. 직접 맞이하고 싶었던 거죠.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아,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면 우리 목표가 흐려지거나 종교적인 메시지, 신화적 상징과 은유로 변색될 것이 두려웠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잠들기로 했습니다. 당신들이 깨어날 때까지.
하지만 당신들 ‘고대 종족’이 깨고 나서도 우리는 대부분 잠들어 있었죠. 여전히.
– 네,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렇게 긴 잠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절망했지만··· 다행히 이렇게 당신과 만나게 되었지요!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 돌아오니 전 차원계가 엉망진창이더군요. 그 거대 파충류가 지배하지 않은 세계가 없어요. 고작 해야 먼 변방 차원 정도만 그들 손길을 피했달까? 아시겠지요.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합시다. 지배와 착취 밖에 모르는 괴물들의 압제와 독재에서 벗어나, 모든 종족의 가능성을 꽃피우도록 도와줍시다. 긴 겨울을 끝내고 자유와 평화의 봄을 싹트게 합시다. 그러니 알려주십시오. 당신들이 잠들어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모두를 깨우겠습니다.
안 돼.
말하지 마!
가르쳐 주지 마!
민준은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하지만 악몽 속의 자신은 입을 열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을 입에 담았다.
“우리가 몸을 눕힌 그곳은···.”
민준은 잠에서 깼다.
***
그는 다시 현실에 의식의 닻을 내렸다.
감각이 점차 돌아온다. 처음에는 폭풍처럼 소리가 몰려들었고 다음으로는 후각이 돌아왔다. 도시가 불타는 매캐한 냄새. 인간이 흘리는 피비린내. 레파탐 족 특유의 달큰한 체향. 마음이 안정되는 드래곤 냄새.
그리고 시각이 다시 의식과 연결되었다. 그 사이 시야가 차폐되었던 것은 아니다. 보고 있었으나 현실과의 연결성을 찾지 못했던 풍경이 다시 의미의 색을 입고 머릿속에 스며 들었다.
그는 본다. 경악한 이단재판관들의 얼굴. 그들 시선은 민준과, 그가 든 머리를 향하고 있다.
=신성력이··· 멎었다?=
그 말이 맞았다. 민준은 눈동자를 돌려 잘린 머리를 본다. 영생을 얻고 싶어 닥치는 대로 달란트를 흡수한 영혼이 그 안에 있었다.
총대주교는 이제 의식을 되찾은 상태였다. 도시의 광기도 점차 잦아들 것이다.
민준은 영혼에서,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주목했다. 하은성이 달란트를 품은 채 나타났을 때 민준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달란트를 소모하지 않을 때는 광체가 영혼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은닉하듯이.
그런데 지금 이 머리에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빛이 흘러나온다. 그가 부활한 뒤 계속 이 상태일 것이다. 죽어서 재생이 불가능한 육신에 영혼을 묶어 두고 생을 유지하는 데에 달란트가 계속 소모되고 있으므로.
총대주교가 살아 있는 시간만큼 달란트가 계속 증발되고 있다.
아까웠다.
그리고 화가 난다.
민준은 입을 열었다.
“그거, 네 것이 아니야.”
제례단검을 그림자 안에 흡수한 뒤 빈 오른손을 머리 위에 덮는다. 깨어난 총대주교는 그저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를 굴릴 뿐.
=제발, 제발···!=
민준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내 것이다. 돌려줘.”
그는 다시 선고했다. 스스로 한 말을 곱씹듯.
“그래, 내 것이야. ‘우리’ 것이다.”
=안 돼! 제발··· 나를! 신의 기억 속에서···!=
그 순간 다시 한번 빛이 폭발했다.
모두의 눈을 가린 섬광이 사라진 후 사람들은 다시 얼어붙었다. 재판관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하은성은 얼이 빠진 채 민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총대주교의 동공이 풀려 있다. 그 머리는 평범한 시체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던 영광된 빛은···.
=맙소사.=
종교인들은 경악하며 몸을 떤다.
민준의 오른손바닥 위에 일렁이며 타오르는 것은 분명 신혈이었다. 필멸자 세계에 닿은 순간 증발해버리는 민감한 성물. 그렇기에 특수한 봉인 속에서 보관해야 하는 성스러운 피.
그런 신혈이 아무런 장치 없이도 안정된 상태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 담긴 채.
이제 재판관들은 대항할 의지를 잃었다. 아니, 감히 대항할 이유가 없었다.
저 남자에게 보내야 할 감정과 태도는 그 정반대의 것이어야 마땅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을 가슴에 품은 자.
용을 지배하여 그들의 피와 살로 목을 축이는 자.
흘리는 피에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힘을 품은 자.
성직자들이 섬기는 신은 거짓된 세계 대신 엘라후-프라가에 잠들어 있으나, 지금 이곳에 그 상징을 모두 지닌 자가 나타났다. 이런 현상에 대한 종교적인 해석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재판관들은 천천히, 환희 속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이 세계에 거한 기적을 경배하며 민준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신이시여. 태초의 종족이여. 당신을 섬기는 미천한 종이, 이곳에 내린 당신의 증거를 찬미하나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