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1
11
호텔 객실을 사무실 겸 숙소로 쓰고 있는 리비아 지사와 달리 이곳은 번듯한 3층 건물에 입주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인원도 현지 직원까지 합쳐 열 명이나 됐다.
내전으로 인해 실적이 거의 없는 리비아와 달리 그리스는 중동과 유럽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혁권도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괜히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들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는 가운데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금발에 늘씬한 몸매의 여직원이 다가와 그리스 억양이 강한 영어로 물었다.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아무리 끈 떨어진 연 신세라고 해도 그래도 명색이 리비아 지사장인데 공항에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은 것에 자존심이 상한 혁권은 자연스럽게 말투가 곱지 않았다.
“트리폴리에서 온 김혁권인데 지사장님 계시오.”
“잠시만요.”
화가 난 듯한 모습에 여직원은 그의 눈치를 보며 얼른 안쪽 책상에 있는 한국인 직원을 데려왔다.
마른 몸매에 금테 안경을 낀 사내는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김혁권 대리님이십니까?”
직책이 아닌 직급으로 자신을 부르자 혁권은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는 버럭 호통을 쳤다.
“방금 뭐라고 했어!”
“……왜 그러시는지?”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내는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움츠렸고 사무실에 있던 다른 직원들도 깜짝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든 말든 혁권은 오히려 더 언성을 높였다.
“아테네 지사에서는 직책보다 직급이 우선하는 모양이지!”
그제야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깨달은 사내는 순간 아차 싶은 듯했으나, 순순히 잘못했다 사과하진 않았다.
여기서 고개를 숙여 버리면 왠지 모르게 지고 들어가는 듯한, 사내의 쓸데없는 자존심이 발동한 탓이었다.
좌천돼서 한직이나 마찬가지인 리비아 지사에 있는 혁권과 달리 자신은 출세가 보장된 A급 지사에 있다는 자부심 같은 거였다.
“죄송합니다.”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기분 나빠?”
“아닙니다.”
새파란 후배 놈이 자신을 무시한 것도 짜증이 났지만 나중에라도 아테네 지사와 또다시 일을 하게 됐을 때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이참에 그가 누군지 확실히 각인시켜 줄 요량이었다.
역효과가 나서 자존심이 상한 아테네 지사 직원들이 혁권의 일에 사사건건 비협조적으로 나올 수도 있었으나 이미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고 있었기에 상관없었다.
“일 똑바로 해. 알았어!”
“……예.”
그때 안쪽에서 마흔 전후로 보이는 중년인이 나와서는 아예 쥐 잡듯이 직원을 몰아붙이고 있는 혁권을 제지했다.
“그쯤하면 알아들었을 테니 이제 그만하지.”
고개를 돌린 혁권은 그리스 지사장인 홍성완 부장인 걸 확인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머리를 숙이며 먼저 인사를 했다.
“홍 지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구먼. 한 2년 만인가?”
“본사 영업부에 있을 때 뵙고 처음이니까. 그 정도 됐을 겁니다.”
“시간 참 빠르군. 그때는 새파란 애송이 대리였는데 말이야. 이제 능구렁이가 다 됐어.”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홍성완 지사장이 일부러 군기를 잡으려고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낸 걸 에둘러 지적하자 혁권은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지사장님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언제 사무실을 온통 시끄럽게 만들며 화를 냈냐는 듯이 능청스러운 태도에 홍 지사장은 고개를 살짝 내젓고는 엉거주춤 서 있는 직원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 조심하고 자네는 그만 가 보게.”
“네.”
고개를 숙인 직원이 눈치를 보며 물러나자 홍 지사장은 힐끗 뒤편에 있는 자말에게 시선을 줬다.
“누군가?”
“리비아 지사 현지 직원입니다. 자말, 인사하게. 그리스 지사장이신 홍성완 부장님이야.”
“자말입니다.”
고개도 숙이지 않고 짧게 영어로 말하는 자말의 모습에 홍 지사장도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자네는 나랑 지사장실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세.”
“그러죠.”
눈짓으로 자말에게 대기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내린 혁권은 홍 지사장을 따라 안쪽에 있는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A급 지사답게 지사장실 역시 상당히 넓고 잘 꾸며져 있었다.
“이거, 사무실이 아주 좋습니다.”
실내를 둘러보며 혁권이 하는 너스레에 홍 지사장은 한쪽에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게.”
“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까 사무실에 들어오며 처음 봤던 여직원이 차를 내려놓고 나갔다.
“리비아는 1인 지사가 아니었나?”
홍 지사장이 턱으로 문 쪽을 가리키면서 묻자 금방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혁권은 찻잔을 집어 들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사람입니다.”
“자네가?”
“그쪽 분위기가 워낙 살벌해야지요.”
“그렇군.”
리비아 내부 상황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홍 지사장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생이 많겠어.”
“저만 그렇겠습니까. 외국에서 영업을 뛰는 직원들 모두 가 힘들겠지요.”
“그래. 당장 어려워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예.”
등받이에 몸을 기댄 홍 지사장은 한쪽 다리를 꼬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더를 따냈다고?”
“오더라고 하기까지는 좀 그렇고 화물 운송 의뢰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게 그거지. 그동안 제대로 실적을 내지 못하던 리비아 지사였는데 역시 능력이 있어.”
“아직 홍 지사장님을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
“하하하. 그래, 도와줄 건 없나?”
“지난번에 전화로 부탁드린 대로 화물선을 임차할 수 있도록 다리를 좀 놔주십시오.”
“그 정도야 해 줄 수 있지. 잠깐 기다려 보게.”
소파에 앉은 채 몸을 살짝 돌린 홍 지사장은 협탁에 놓인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삑.
“거기 성석호 있지.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조금 있자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 지사장실로 들어왔는데 뜻밖에도 아까 밖에서 한바탕했던 바로 그 직원이었다.
“이쪽은 우리 그리스 지사에서 해운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성석호라고 하네. 정식으로 인사들 나누게.”
“…….”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홍 지사장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정적을 먼저 깬 건 혁권이었다.
잠시 당황해하던 그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알고 있을 테고 앞으로 도움을 많이 받아야 될 것 같으니까 잘 부탁하네.”
“아. 예.”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악수를 한 성석호는 맞은편 소파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았다.
껄끄러울 텐데도 능청스럽게 먼저 다가서는 혁권의 행동에 홍 지사장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반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는 성석호의 모습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바이어Buyer들을 상대해야 되는 상사맨으로서는 실격이었다.
“리비아 지사에서 업무 협조가 들어온 것이 있을 텐데 어찌 됐나?”
홍 지사장의 물음에 성석호는 한쪽 손가락으로 금테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면서 대답했다.
“임차가 가능한 화물선 가운데 요구하신 규모에 맞는 배를 다섯 척가량 추려 놨습니다. 모두 2천 톤 이상이고 별다른 스케줄 없이 피레우스 항구에 계류 중인 상태라 돈만 지불한다면 당장 화물을 선적할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들은 혁권은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용선비는 얼마나 들 것 같나?”
“일단 46만 달러 정도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불황으로 용선비가 크게 하락했다고 하던데 40만 달러에 맞출 수는 없을까?”
성석호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용선비가 떨어진 건 맞지만 트리폴리에 갔다가 빈 배로 돌아와야 되기 때문에 왕복 비용을 지불해야 되고 무엇보다 어떤 사고가 날지 모르는 불안정한 곳이라 네고Negotiation 자체가 안 됩니다.”
성석호가 단정적으로 말을 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어떤 거래든 협상이 필요하다는 것이 평상시 혁권의 지론이었고 상사맨이 가져야 될 기본 자세였다.
하지만 이미 한차례 얼굴을 붉힌 상태였기에 혁권은 굳이 여기서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용선 가능한 선박에 대한 자료를 보여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성석호가 머리를 끄덕이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홍 지사장이 끼어들며 말했다.
“지금 나가서 김 지사장이 자료를 바로 확인해 볼 수 있게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자리였기에 성석호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탁.
방문이 닫히자 홍 지사장은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면서 그를 봤다.
“어때?”
“뭐가 말씀이십니까?”
“방금 나간 녀석 말이야.”
찻잔을 들어 이미 다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신 혁권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똑똑하기는 한 것 같군요.”
“그것뿐인가?”
하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으면서 홍 지사장이 재차 묻자 혁권은 상체를 펴며 대답했다.
“뭐, 시키는 일은 잘하겠지만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는 떨어지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사일을 하기에는 너무 고지식합니다.”
“상당히 냉혹한 평가군.”
“그걸 원하신 것 아닙니까?”
혁권이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자 홍 지사장은 피식 웃으며 탁자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에 담배를 털었다.
“자네가 좀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쳐 봐.”
“제가요?”
“그래.”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돼서 리비아 사막으로 좌천된 놈한테 뭘 배울 것이 있겠습니까.”
괜히 귀찮은 일을 맡는 것이 싫었던 혁권이 슬쩍 한 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홍 지사장 역시 이 바닥에서 닳고 닳은 능구렁이였다.
“2년 연속 영업 실적 톱을 먹은 사람이 누군데 그래? 그리고 요즘 하는 걸 보니까 얼마 안 있어서 다시 본사로 돌아갈 것 같구먼. 그렇지 않아?”
“도와 드리고는 싶은데 진행 중인 오더가 있어서…….”
“그냥 옆에 데리고 다니기만 하게. 그러다 보면 뭔가 느끼는 것이 있겠지. 어차피 용선 업무를 보려면 성석호의 도움을 받아야 되잖아.”
“그렇기는 합니다만…….”
별로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짓자 홍 지사장이 짐짓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자네도 신입 사원 시절 때 나한테 업무를 배웠지 않나.”
“그거야…….”
“이제 고참이 됐으니 밑에 애들도 챙겨야지.”
홍 지사장의 압박에 혁권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알았습니다. 대신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만 입니다.”
“물론이네.”
혁권이 승낙을 하자 홍 지사장은 만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사장실을 나온 혁권은 사무실 한쪽 편에 앉아 있는 성석호에게 다가갔다.
“아까 말한 자료 좀 보여 주겠나?”
고개를 들어 힐끔 그를 쳐다본 성석호는 얇은 서류철을 하나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로 가시죠.”
“그러지.”
성석호를 따라가며 혁권은 기다리고 있던 자말을 손짓으로 불러 같이 움직였다.
회의실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 한쪽 편을 파티션으로 막고 긴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은 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