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29
129
# 새로운 거래
곧 전쟁터로 변할 곳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다음 날 일행은 호텔을 나와 다시 프리타운으로 떠났다.
거의 일주일 만에 돌아온 프리타운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길목마다 검문소와 바리케이드가 쳐졌고 시가전에 부서진 건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완전무장을 한 채 서 있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살기가 감돌았고 중심가에 위치한 대통령 궁 주위에는 전차와 장갑차까지 세워져 있었다.
불안한 상황을 보여 주듯 상가들도 모두 다 문을 닫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인도 거의 없었다.
다행히 병원은 정상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었기에 혁권은 프리타운에 도착하자마자 부상을 입은 은완코를 데려가 입원시켰다.
“일주일 뒤에 실밥을 뽑으면 퇴원할 수 있다니까 조금 불편하더라도 그때까지 참아.”
병원 침대에 누운 은완코는 혁권의 말에 감지덕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렇게 치료까지 해 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것보다 일이 바빠서 내일 여길 떠나야 되는데, 어쩌지?”
“염려 마십시오. 조금 통증이 있어서 그렇지 이제 움직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다행이군.”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은완코한테 내밀었다.
“받아.”
“이게 뭡니까?”
“1,500달러야. 약속한 수고비에 병원비를 조금 더 넣었어.”
“너무 많습니다.”
은완코가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다치기도 했고 제대로 치료를 받으려면 필요할 거야. 그러니까 그냥 받아 둬.”
계약 기간 중에 부상을 입어도 보통은 나 몰라라 하기 일쑤인데 이렇게 치료를 해 주고 돈까지 더 쥐여 주니 정말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돈 봉투를 손에 쥔 은완코는 그를 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번에 또 오시면 절 불러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혁권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서 침대에 앉아 있는 은완코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러지. 그때까지 몸조리 잘하고 있으라고.”
“예.”
다시 시에라리온에 돌아온 일이 있을지 몰랐지만 그는 웃는 얼굴로 은완코와 약속을 하고는 병원을 나왔다.
프리타운에 있는 동안에도 현지 정국은 시시각각 급변하면서 불안정한 상황을 이어 가고 있었다.
결국 다음 날 비행기를 타러 나온 공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위치한 코노 지역이 반군인 PASL한테 점령당했다는 뉴스를 들을 수 있었다.
인터넷을 연결해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 장면이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던 혁권은 미간을 찌푸리며 노트북을 덮었다.
“결국 이렇게 됐군.”
옆에 앉아 있던 하킴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코이두까지 정부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걸 보고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도 닷새 만에 주州 하나를 통째로 상실하다니 너무 무력한 것 같아.”
“그러니까 아직까지 몇 개나 되는 반군 세력을 제대로 소탕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긴.”
정부가 제 할 일을 제대로 했으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이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이 1시라고 했지?”
“예.”
“그럼 이제 슬슬 탑승 수속을 해야 되겠군.”
짐을 챙긴 두 사람은 비즈니스 센터를 나와 넓은 청사를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는 출국 게이트로 걸어갔다.
평소에 한산했던 출국장은 벌집을 쑤신 듯 소란으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금발 백인부터 검은 피부의 현지인까지, 남녀노소 모두 국적도 성별도 달랐으나 시에라리온을 떠나려는 목적만은 동일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먼저 정국이 어수선한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발치에 짐을 쌓아 놓고 예약한 비행기가 언제 출발하는지 전광판만을 바라보는 사람, 티켓을 발권해 주는 직원을 붙잡고 실랑이를 하는 사내 등 아주 천차만별의 풍경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정도였다.
아직 반군 세력이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 며칠 전 프리타운에서 벌어진 시가전 덕분에 사람들의 머릿속엔 언제든 여기도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때문에 체류하던 외국인은 물론이고 돈을 가진 부자와 고위층 들까지 앞을 다퉈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 공항에 몰려든 형편이었다.
이렇게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이 갑자기 늘어난 가운데, 혁권 일행이 동시에 함께 탈 수 있는 두 사람분의 티켓을 손에 넣은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출국 게이트에는 이미 탑승을 기다리는 승객들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혁권이 탈 에어 프랑스기 외에도 비슷한 시각에 출발하는 비행기가 몇 대 더 있어, 안 그래도 그다지 넓지 않은 게이트는 완전히 포화 상태였다.
금속 탐지기 앞에서 좀처럼 줄이 줄어들지 않자 빨리 좀 서두르자며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원성이 점점 커졌다.
혁권과 하킴은 미리 탐지기에 걸릴 만한 시계나 벨트 같은 것을 다 푸르고 준비를 끝마쳤지만, 그러고도 한참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금속 탐지기를 통과할 수 있었다.
벗어 놓았던 신발을 다시 챙겨 신으며 출국 심사까지 손쉽게 통과한 혁권은 도장이 찍힌 여권을 손에 들고 다른 승객들과 함께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한계까지 아슬아슬하게 사람을 가득 채운 버스가 활주로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높은 빌딩을 옆으로 눕혀 놓은 것처럼 거대한 크기의 비행기를 가까이에서 목도한 사람들은 이런 와중에도 신기하다는 듯 작은 탄성을 흘렸고, 계단 아래에 스튜어디스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여기까지 왔으면 남은 건 비행기가 뜨는 것뿐이었으니 위험에서 멀어졌다는 생각에 다들 안심한 것이리라.
설치된 트랩을 올라 비행기 내부로 들어선 혁권은 제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승객들 틈바구니에서 가까스로 좌석번호를 확인하곤 후우, 깊은 숨을 토해 냈다.
“힘드십니까?”
“좁은 공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약간 답답해서 그래.”
혁권은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푸르며 대꾸했다.
가방을 건네받은 하킴이 머리 위의 선반에 두 사람분의 짐을 밀어 넣는 동안 혁권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깥을 구경했다.
그래 봐야 삭막한 시멘트 색의 활주로와 비행기뿐이었으나, 오늘은 여기에 조금 색다른 풍경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좀 전에 혁권 일행이 타고 온 것처럼 비슷한 모양의 미니버스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승객들을 운반했고, 우르르 내린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스튜어디스의 지시에 맞춰 열을 지어 비행기에 탑승하는 모습을 보며 혁권은 옛날에 보았던 헐리우드 재난 영화를 떠올렸다.
거기서도 이런 비슷한 장면을 보았던 것 같은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란군이 총탄을 퍼붓는 전장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진짜 있었던 일이었나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당장 차를 타고 몇 시간만 달려도 피와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전쟁의 흔적을 목격할 수 있다.
저쪽에선 누군가가 고통에 신음하며 죽어 나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편안한 시트에 앉아 비행기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는 이 극명한 간극에 혁권은 뭐라 말 할 수 없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에어 프랑스 A-239기에 타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기장 장 마르셀이고, 파리 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분의 비행을 책임질 것입니다. 스튜어디스들의 지시에 잘 따라 주시고…….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기장의 목소리와 함께, 비행기의 육중한 동체가 활주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진동이 시트를 통해 전해져 왔다.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풍경이 점점 빠르게 흘러가고, 몸이 아래로 처박혔다가 다시 위로 붕 뜨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과 동시에 귀에서 사이렌 소리와도 비슷한 이명이 느껴지는 순간.
혁권은 느릿하게 감았던 눈을 뜨고는 제 눈높이와 비슷한 곳에 있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프리타운이 어느새 발아래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파리에 도착한 혁권은 거기서 하루를 묵으면서 여독을 푼 뒤 그리스가 아니라 홍콩으로 향했다.
국제 금융 중심지인 홍콩에서도 HSBC, 중국은행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금융기관들이 모여 있는 센트럴은 심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사면이 유리로 된 마천루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열대성 기후답게 야자수가 늘어선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인파가 바쁘게 오갔다.
눈에 잘 띄는 빨간색으로 칠한 택시 한 대가 멈춰 서자 깔끔한 정장에 라이벤 선글라스를 낀 혁권이 하킴과 함께 내렸다.
두 사람은 고층 건물들 가운데서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높은 국제금융센터[IFC]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높은 오피스 빌딩인 국제금융센터는 높이가 무려 415.8미터에 달했다.
엄청난 높이에 걸맞은 명물인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70층에 올라간 혁권은 ‘L&S코프레이션’이라는 팻말이 붙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검은색 치마 정장을 입은 미녀가 안내 데스크에 서서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혁권은 능숙한 영어로 말했다.
“스텐저 씨와 약속이 되어 있을 텐데요.”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존슨입니다.”
신분을 감출 때 쓰는 가명을 대자 미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여직원이 바로 사무실 안쪽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절 따라오시죠.”
여직원이 데려간 곳은 긴 탁자와 의자가 놓인 회의실이었다.
별다른 실내 장식 없이 깔끔한 가운데 한쪽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어 홍콩 시내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것이 장관이었다.
“곧 스텐저 변호사님이 오실 겁니다.”
여직원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며 잠시 앉아 있자 유리문이 열리며 중년의 백인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이비색 스트라이프 정장에 행커치프Handkerchief를 꽂은 중년 사내는 그를 보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스텐저라고 합니다.”
“존슨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회의용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바쁘신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스텐저는 가져온 서류철을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모두 6개의 투자회사 설립을 끝마쳤습니다. 각 회사마다 설립 일자를 다르게 조정했고 파나마에 위치한 별도의 페이퍼 컴퍼니를 소유자로 등록해서 추적이 어렵게 만들어 놨습니다.”
서류철을 펼쳐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한 혁권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럼 한국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겁니까?”
“관련 허가를 다 받아 뒀으니 오늘부터라도 주식 거래를 하실 수 있습니다.”
스텐저의 대답에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하는 일인 걸요.”
유능한 변호사답게 상당히 프로다운 태도로 스텐저가 답했다.
단순히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닌, 돈을 받은 이상 본인 업무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철저히 처리하겠다는 그런 사고방식이 언뜻 엿보였다.
이런 사람이라면 비싼 수수료가 아깝지 않다.
혁권이 그리 생각하는 동안 스텐저는 능숙하게 다음 화제를 꺼냈다.
“원하신다면 저희가 투자 자문이나 운영을 도와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쪽에서 지정하는 회사의 주식을 은밀하게 매집해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L&S코프레이션은 페이퍼 컴퍼니의 설립과 법적 자문 이외에도 자산 관리 서비스도 함께 병행했다.
“관심을 가지고 계신 회사가 어디입니까?”
“TC인터내셔널입니다.”
“처음 들어 보는 곳이군요.”
“그럴 겁니다. 코스피KOSPI에 상장되어 있는 회사로 주가 총액이 3천만 달러가 채 안 되는 곳입니다.”
주가 총액을 들은 스텐저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투자 액수가 클수록 떨어지는 수수료가 많은데 기대했던 것보다 덩어리가 너무 작았다.
총액이 3천만 달러라면 대주주를 비롯한 이런저런 지분을 빼면 실제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은 절반에 미치지 못할 터였다.
“그리 크지 않는 회사군요.”
“수수료로 200만 달러를 주도록 하지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제시하자 스텐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지금 200만 달러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혁권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텐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거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먼저 이런 제안을 한다는 건 숨겨진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그런 걸 다 제쳐 두고서라도 이 정도 일에 수수료로 200만 달러를 받는다면 나쁘지 않았다.
이내 스텐저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원하시는 대로 깔끔하게 처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한 한 최저 가격에, 그리고 이쪽에서 주식을 사들이는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 줬으면 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지분을 얼마나 매집하길 원하십니까?”
혁권이 바로 대답했다.
“일단 30% 정도를 확보해 주십시오.”
그러자 스텐저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사를 해 봐야 되겠지만 이런 종목 같은 경우에는 보통 시장에서 거래되는 유동 주식이 30~40% 수준인데 원하시는 만큼 매집을 하려면 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혁권이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곧 시장에 주식이 대거 풀릴 테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