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30
130
짐작대로 TC인터내셔널이 작전주라는 걸 확인한 스텐저는 눈을 반짝 빛냈다.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미리 지분을 충분히 확보한 다음 이런저런 방법으로 기업 가치를 크게 끌어 올리고는 적당한 때에 손을 털고 나가는 아주 전형적인 작전이었다.
거기에 개미들의 관심을 끌고 단번에 주가를 올리는 데 외국계의 투자만큼 솔깃한 호재도 없었다.
그렇게 시세 차입을 챙기면 수수료 200만 달러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하이에나 같은 작전 세력으로 마음대로 오해한 스텐저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면서 말했다.
“타이밍만 알려 주시면 거기에 맞춰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왠지 모르게 그의 상상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았으나, 혁권은 굳이 정정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잘 부탁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이야기를 끝낸 두 사람은 서로 팔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홍콩에서 일을 끝낸 혁권은 곧장 비행기를 타고 아테네로 향했다.
한국에서 이틀 정도 시간을 빼 부모님을 뵙고 갈 수도 있었지만, 미뤄 둔 일이 많았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장시간에 걸친 비행으로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공항 로비를 가로지르던 혁권은 문득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비행기 안에서는 전화를 받을 일이 없어 잠시 그 존재를 잊고 있었다.
매너 모드로 바꿔 두었던 설정을 다시 원래대로 돌리고, 혹시 중요한 연락이 온 게 있나 싶어 메시지를 체크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두 통이나 떠 있었다.
2개 다 한국에 있는 집에서 걸려온 것이라, 혁권은 시계를 확인하곤 얼른 연결 버튼을 꾹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르-.
흘러나오는 연결 음을 한 귀로 들으면서 그는 캐리어를 끌고 따라오는 하킴을 향해 잠깐 멈춰 보라는 듯 손바닥을 펴 보였다.
“전화 한 통만.”
마음대로 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고 한 하킴은 캐리어를 세우고는 그 옆에 가만히 섰다.
그러고 있는 사이 철컥하고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리더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어머니, 저예요.”
-혁권이냐?
“예.”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던 듯 와하하, 하고 웃는 예능 프로그램의 익숙한 효과음이 어머니의 목소리와 섞여 흘러나왔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당연히 걱정돼서 전화했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외국에 나가선 여태껏 연락이 없는데 어찌 궁금하지 않겠어.]
“중간에 제가 몇 번 안부 전화 드렸잖아요.”
-그게 벌써 며칠 전 얘기인지 아니?
혁권은 타박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부모한테는 자식 나이가 육십이 넘어도 언제까지나 아이로 보인다더니, 어머니가 딱 그 짝이었다.
혁권도 어디 가서 괜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정도로 건장한 체구를 가진 남성인데, 이 나이에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으니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옆에 서 있는 하킴 보기가 부끄러웠다.
정작 그는 한국말을 하나도 모르니 무슨 대화가 오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이야기가 통했다면 마마보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어머니, 그만 좀 하세요. 연락을 못 드린 건 죄송하지만 저도 나름 바빴다고요.”
-아니, 뭘 하느라 전화 한 통 할 시간도 없다니?
“한동안 전파가 터지지 않는 지역에 있었거든요. 새 거래를 트느라 멀리 지방까지 나갔었어요.”
-일 때문에 그런 거라면 아무 말 안 하겠다만…… 그러니까 얼른 장가를 가야 해. 며늘아기가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멀리서 애를 태우지도 않았을 거 아니니?
“왜 얘기가 그쪽으로 튀어요?”
-너 혼자 외국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닐 걸 생각하니 안쓰러워서 그런다.
“저 밥 잘 챙겨 먹고요, 잠도 깨끗한데서 푹 잘 자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가끔 보면 어머니는 혁권을 다른 사람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갓 스무 살 때부터 외부로 자꾸 돌면서 출장을 자주 다녔던 혁권은 이젠 오히려 곁에 사람이 없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부모님 앞에서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마땅치 않을 뿐이지, 의외로 요리나 청소 등 가사 실력도 꽤 수준급인 그는 지금 당장 혼자 독립해서 나간다 해도 아주 잘 살 게 분명했다.
게다가 성격도 단체 생활에 맞지 않아 결국 이렇게 혼자 하는 사업을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은 다 아는 것을 왜 부모님만 모르는가 싶어 혁권은 답답한 숨을 속으로 삼켰다.
-나중에 한국 오면 너 나랑 잠깐 어디 좀…… 아니, 아니다.
급하게 말끝을 돌리는 행동에 혁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됐다, 됐어. 어쨌든 목소리 들으니 건강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아버지한테도 그렇게 전해 둘 테니 나중에 보자꾸나.
“예. 아마 이번 달 내로 한 번은 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작게 한숨을 내쉰 혁권은 아까부터 옆에서 느껴지던 시선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왜?”
“아뇨.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요.”
“……?”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혁권에게 하킴이 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보였다.
“전화하는 내내 안색이 어두워서 나쁜 소식이라도 있나 생각했습니다.”
“아. 그런 거 아니야.”
혁권은 피식, 힘없는 웃음을 흘리곤 대꾸했다.
“부모님이 좀 극성이셔서 말이지. 몇 살이 되어도 잔소리 듣는 건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야.”
그제야 하킴도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듯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어딜 가나 부모님은 다 그렇죠. 저희 어머니도 저만 보면 걱정이 된다며 이런저런 말을 길게 늘어놓곤 하셨습니다.”
“그래?”
이런 데서 공통점을 발견할 줄 몰랐다며 혁권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생각지도 못한 데서 시간을 꽤 허비했어. 얼른 여기를 빠져나가자고. 좁은 비행기 좌석에 몸을 구겨 넣고 있었더니 뼈마디가 다 쑤셔.”
한시라도 빨리 따뜻한 물로 땀에 젖은 몸을 씻고 깨끗한 시트에 몸을 눕히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며 잠시 멈췄던 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뒤를 하킴이 잠자코 따랐다.
이미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 무리가 셔틀버스를 타고 한차례 지나간 뒤라 공항 청사 앞은 택시와 개인 승용차 말고는 크게 북적거리지 않았다.
태울 사람을 기다리며 차례대로 길게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들 가운데, 자말의 얼굴을 발견한 혁권이 손을 흔들었다.
“일찍 왔군.”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으셔서 안으로 찾으러 들어갈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음, 미안해. 잠깐 통화 좀 하느라.”
뒤에서 하킴이 캐리어를 들어 트렁크에 싣는 동안 혁권은 자말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일단 타시죠.”
“그래.”
혁권이 차에 올라타고, 이윽고 하킴과 자말까지 제 자리를 찾고 나서야 일행은 드디어 공항을 떠날 수 있었다.
청사를 나와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혁권이 답답하게 몸을 조이던 윗도리 단추를 풀며 입을 열었다.
“미스라타에 연락을 해 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자말이 약간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를 봤다.
“굳이 그쪽하고 거래를 하셔야겠습니까?”
“이미 끝난 이야기잖아.”
혁권이 딱 잘라 말하자 자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비율은 지난번과 같이하고 언제든지 물건을 실어 와도 된다고 했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비행기를 타기 전에 면도를 했지만 그사이 수염이 자라 조금 까칠해진 턱을 한쪽 손으로 매만지면서 잠시 고심을 한 혁권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음 출항 때까지 여유가 좀 있지?”
“예. 보름 정도 시간이 있습니다.”
“조금 빠듯하지만 어쩔 수 없지. 사흘 뒤에 출항할 수 있게 준비해 두고 스와이단한테도 그렇게 연락해 놔.”
“배를 띄우는 건 문제가 없습니다만 실고 갈 물품이 없지 않습니까?”
자말의 말에 그는 몸을 가죽 시트에 기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내가 따로 주문해 놨어. 아마 늦지 않게 선적을 할 수 있을 거야.”
“처음부터 미스라타에 가실 작정이셨군요.”
작게 한숨을 쉬며 자말이 쳐다보자 혁권은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리비아로 물자를 보내는 데 거기만큼 좋은 통로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요.”
사실이었기에 자말도 순순히 수긍했다.
“잘만하면 다시 대량으로 물자를 거래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거니까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값어치가 있어.”
“알겠습니다.”
“대신 한번 약속을 어긴 전력이 있으니까 여차하면 판을 엎어 버릴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해.”
“예.”
“또다시 뒤통수를 치려고 들면 그때는 밀수고 뭐고 스와이단 그놈을 아주 갈기갈기 찢어 놓고 말겠어.”
말을 내뱉은 혁권의 얼굴에는 싸늘한 한기가 가득했다.
피레에프스 항구 외곽에 위치한 콘도에 도착한 혁권은 더운 물을 받은 욕조에 들어가 몸을 눕히곤 오랜 비행에 쌓인 피로를 풀었다.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며 욕실을 나온 그는 탁자에 올려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번호 목록에서 홍성완 부장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번호를 눌렀다.
연결 음이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홍성완 부장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한쪽에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접니다. 김혁권.”
-안 그래도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어딘가?
“아테네입니다.”
-뭐야? 그리스에 돌아온 거야.
“네.”
-그런데 연락도 안 하고…… 서운한데.
“지금 전화를 드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오늘 막 도착했습니다.”
-그나저나 어딜 돌아다니기에 통화 한번 하기가 이렇게 힘들어?
“조금 바빴습니다.”
-난 또 왕창 오더를 내놓고 잠수라도 탄 줄 알았잖아.
“하하하. 설마 그러려고요. 그리고 이미 물품 선금을 다 받으셨으니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습니까.”
웃으며 이야기하자 홍성완 부장도 능글능글한 태도로 말을 받았다.
-계속 연락이 안 되면 화물을 다른 데 넘겨 버리고 슬쩍 입 닦아 버리려고 했는데 아쉬워서 그러지.
그러자 혁권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엄살을 떨었다.
“이거 그러기 전에 얼른 화물을 받아 가야겠군요.”
-그러든가.
“말이 나온 김에 납품 일자를 조금 앞당겼으면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언제로 말인가?
“가능하면 사흘 안에 받았으면 합니다.”
홍성완 부장이 바로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다른 물품들은 이미 다 준비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의약품을 실은 화물 열차가 내일 도착하니까 충분히 가능하네.
“다행이군요.”
-지난번처럼 피레에프스 항구로 보내 주면 되나?
“예. 그리고 이번에 발주했던 오더만큼 추가 물량을 다음 달까지 가져다주십시오.”
-그만큼을 더?
“그렇습니다. 똑같은 조건에 구체적인 오더 시트는 내일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홍성완 부장은 입이 귀에 걸렸다.
-이거, 자네 덕분에 이번 분기 실적은 걱정 안 해도 되겠구먼.
“큰 변수가 없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오더가 이어질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거 말만 들어도 좋군.
불황으로 실적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을 때 적지 않은 액수의 오더를 계속해서 내주는 혁권이 홍성완 부장은 아주 예뻐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럼 납품을 차질 없이 끝내 주십시오.”
-내가 직접 챙길 테니 염려 말게.
“그래 주시면 저야 좋지요.”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통화를 끝낸 혁권은 핸드폰을 탁자에 내려놨다.
그동안 이런저런 신세를 진 걸 되갚는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 자신이 주는 오더에 맛을 들인 홍성완 부장은 웬만해서는 그를 배신하지 못할 터였다.
사흘 뒤.
기한을 맞춰 가져온 화물을 모두 선적한 혁권은 예정대로 배를 출항시켰다.
위험 지역인 데다 항구에서 편의를 봐주기로 약속한 스와이단을 신뢰할 수 없었기에, 함단만 남겨 가족들을 보살피게 하고 나머지 부하들을 모두 데려갔다.
그리고 지난번보다 물량이 늘어나서 거의 800톤이 넘었다.
때문에 갑판 아래 선창마다 화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이 정도면 아직 토크에 들어가 수리 중인 포세이돈 함이 다섯 번은 왕복해야지 옮길 수 있는 물량이었다.
이것만 봐도 이번 거래를 통해 미스라타 항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많은 이득이 될지 계산이 나왔다.
순조로운 항해를 이어가 이틀 뒤 멀리 미스라타 항구가 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저기 예인선이 오고 있습니다.”
함교에 서 있던 혁권은 갑판장의 말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커다란 방풍창 너머로 작은 보트 두 척이 하얀 물살을 가르면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쌍안경으로 예인선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크게 수상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몰래 무장 병력을 숨겨 놓고 있다가 방심한 틈을 이용해서 배에 올라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에 경계를 풀지 않았다.
잠시 뒤 엔진 출력을 거의 줄인 화물선은 양옆에 바짝 붙은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항구에 접안했다.
결박을 완전히 끝내고 사다리를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스와이단이 두 명의 부하만 대동하고 승선했다.
얼굴이 두껍게도 스와이단은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다가왔다.
“하하하!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소이다.”
상대가 손을 내밀었지만 혁권은 무시를 하곤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로 하역을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무안한 상황이었지만 스와이단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쓰게 웃으면서 팔을 집어넣었다.
“그럴 줄 알고 하역장은 비워 놨으니 바로 내리면 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