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49
149
“HK펀드라면…….”
“TC인터내셔널 주식을 보유한 외국인 투자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한 곳입니다.”
“나도 알아. 그런데 놈이 왜 자넬 만나자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자 이동철은 결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접촉을 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얼굴도 보여 주지 않고 퇴짜를 놓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흐흠.”
“혹시…….”
“뭐 짚이는 게 있으면 말해 봐.”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동철이 이야기를 했다.
“이번 작전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닐까요?”
김인철이 미간을 좁히는 걸 보며 이동철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연락을 해 올 이유가 없잖습니까?”
나름 설득력 있는 이동철의 이야기에 김인철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조용해진 그를 슬쩍 곁눈질하던 이동철은 혹시 상대의 심기를 거스를까 주저하다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요?”
“만나 봐.”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참에 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리고 이렇게 조용히 연락을 해 오는 걸 보면 뭔가 거래를 하려는 것 아니겠어.”
“그건 그렇습니다.”
수긍하며 이동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계속 찝찝했었는데 오히려 잘됐어.”
“그럼 약속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낮게 내리깐 목소리가 불길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질척질척하게 달라붙는 늪처럼 깊은 어둠이 그의 비릿한 미소를 타고 흘러나왔다.
“일이 아주 재밌게 돌아가는군.”
‘응, 정말 흥미진진한 걸.’
그렇게 말하며 웃는 표정에 이동철은 때아닌 한기를 느끼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한편 서울로 돌아온 혁권은 무기 대금을 정산하기 위해 내키지 않았지만 CIA 요원인 샌더슨에게 연락을 취했다.
일을 진행하는 동안 아지트로 쓰기 위해서 빌린 호텔 소파에 앉아 지난번 받은 명함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그다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스마트폰을 귀에 댔다.
연결 음이 몇 번 울리고 이내 상대편이 전화를 받았다.
-미스터 김.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어떻게 지난번 제안은 생각해 봤소?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그는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선 이미 안 하겠다고 대답을 한 것 같은데요.”
-그렇게 딱 잘라 이야기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시오. 우리가 뒤에서 도와주면 미스터 김이 지금 하고 있는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소?
“반대로 발목이 잡혀서 질질 끌려다닐 수도 있겠지요.”
냉소적인 반응에 샌더슨이 쓰게 웃었다.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니오. 이번 거래처럼 얼마든지 서로가 이득이 될 수 있는데 너무 아깝지 않소.
확실히 위험한 순간이 많았지만 그만큼 돈을 벌기는 했다.
거기다 CIA가 뒤를 봐준다면 여러 가지로 득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 공짜란 없는 법.
도움을 받으면 그만큼 빚을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대가 어떤 식으로 요구를 해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도움을 받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만약 이번처럼 제 부하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닥친다면?
생각만 해도 싫은 기분에 혁권은 진저리를 쳤다.
절대 두 번 다시 똑같은 우를 범하지는 않으리라.
“또다시 그쪽하고 엮기기 싫으니까 괜히 가망 없는 일에 심력을 낭비하지 말고 딴 사람이나 알아보시오.”
-거참.
계속 미적거리면서 상대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혁권은 더 들러붙기 전에 얼른 용건을 이야기했다.
“무기 대금을 보내 줄 테니 계좌를 알려 주시오.”
그러자 샌더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버뮤다 은행, 231-333-7732이오.
번호를 듣는 것과 동시에 혁권의 손이 탁자에 올려 둔 태블릿 PC 위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듯이 탁, 하며 손가락을 튕긴 그가 다시 스마트폰을 입에 대었다.
“확인해 보시오.”
-…….
샌더슨 쪽에선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방금 확인을 끝냈는지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750만 달러가 다 들어왔소. 일 처리 하난 확실하구먼.
“그게 내 장점이라…….”
퉁명스럽게 말한 그는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었다.
“이걸로 이제 거래가 다 끝난 거요.”
-정말 생각이 없소?
“더 할 이야기가 없으니까 이만 끊겠소.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맙시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 자르듯이 딱 끊어지는 게 아니니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전화를 주시오.
“그런 일은 없을 거요.”
혁권이 딱 잘라 말했다.
-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아니겠소.
이에 혁권은 아무런 대꾸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인상을 찡그린 채 기대어 앉아 있던 그는 곧 흥, 콧방귀를 뀌었다.
저런 놈 말 한마디에 이리저리 휘둘릴 필요 없지.
그러곤 가지고 있던 샌더슨의 명함을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화르륵 타들어 가는 명함을 탁자에 있는 크리스털 재떨이에 던져 넣자, 불길이 천천히 삭아 들다 이내 재만 남기곤 사라졌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하킴이 조용히 옆으로 다가왔다.
“보스.”
고개를 돌리자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카민스키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어서 들어오라고 해.”
“예.”
밖으로 나간 하킴은 곧 호리호리한 체격에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백인 중년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안면이 있는지 혁권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년인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가볍게 악수를 나눈 중년인이 객실을 둘러보곤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객실이 아주 좋은데요.”
“일이 끝날 때까지 자네가 지낼 곳인데 잘됐군.”
“그렇습니까?”
그는 히죽 웃으며 반짝거리는 장식장과 벽에 걸린 그림의 액자를 눈으로 훑었다.
혁권을 찾아온 백인 중년인의 본명은 카민스키로 뒷세계에서 꽤 알아주는 화이트칼라 사기꾼이었다.
김인철한테 확실히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카드였다.
“자, 일단 앉지.”
“예.”
두 사람은 한쪽에 있는 소파로 가서 마주 보며 앉았다.
“상황 설명은 다 들었겠지?”
“네.”
“그쪽도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니까 실수 없이 잘해야 돼.”
그러자 카민스키가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면서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 놈들일수록 더 쉽게 넘어오는 법이지요. 아주 감쪽같이 속여 넘길 테니까 지켜보십시오.”
“좋아.”
몸을 뒤로 기대면서 그가 눈짓을 하자 한쪽에 서 있던 하킴이 안주머니에서 명함이 든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내 카민스키 앞에 내려 놨다.
“지금부터 자넨 HK펀드 아시아 태평양 투자 담당자인 도노반이야.”
“도노반이라…… 아주 좋은 이름이군요.”
플라스틱 케이스를 열고 명함을 한 장 꺼내 이리저리 살펴본 카민스키는 입가에 얇은 미소를 지었다.
“내일 약속을 잡았으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하킴한테 이야기를 하도록 해.”
“말씀을 들으니까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네요.”
“말해 봐.”
“이 정도 직책이면 수행원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손에 든 명함을 팔랑팔랑 흔들면서 카민스키가 말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중요한 만남이니까 실수하지 않게,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해.”
“밤을 즐기지 못해서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잘 생각했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혁권은 카민스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며 말했다.
“내일 가서 확실하게 속여 넘기고 와.”
“염려 마십시오.”
다음 날.
아침 9시가 넘어 장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예상대로 TC인터내셔널의 주가가 상한가를 찍으면서 미친 듯이 오르기 시작했다.
전날 주식 방송에서 전문가인 오세민이 적극 매수 종목으로 추천하고 목표가를 5천 원으로 제시한 영향이 컸다.
당장 인터넷의 각종 주식 관련 게시판에 TC인터내셔널에 관련된 글들이 줄을 이었고 이런 뜨거운 관심은 강한 매수세로 이어졌다.
여기에 신문과 각종 언론에서 TC인터내셔널이 시에라리온에서 따낸 다이아몬드 사업권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자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오전 중에만 연속으로 상한가를 두 번이나 치면서 512원에 시작한 주식 가격은 순식간에 1천 원을 돌파하고 어느새 1,500원대에 바짝 다가섰다.
그러자 황량한 초원을 어슬렁거리면서 돌아다니는 하이에나처럼 먹잇감을 찾던 다른 작전 세력들까지 뭔가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걸 눈치채고는 너도나도 끼어들어 매입에 나섰다.
이렇게 되자 상승세에 더욱 탄력이 붙으면서 주식시장의 관심이 온통 TC인터내셔널에 쏠렸다.
이동철은 약속 장소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오세민의 전화를 받았다.
-전무님, 오늘 마지막 주가가 얼마를 찍었는지 보셨습니까?
“당연하지. 1,700원까지 올라갔더군. 조금만 더 뒷심을 발휘했으면 2천 원대를 깰 수 있었는데 아쉬워.”
-이제 시작인데 뭘 그렇게 조바심을 내십니까. 이런 추세라면 이번 주가 가기 전에 제가 제시한 목표 주가를 달성하고도 남을 겁니다.
“이번에도 족집게 분석을 한 걸로 시청자들의 찬사가 쏟아지겠구먼.”
-독이 든 사탕인 줄도 모르고 우르르 달려들어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우매한 중생들이지요.
조금 띄워 주자 바로 잘난 척을 하는 모습에 이동철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작업이 다 끝나고 주가가 다시 폭락하면 원망이 쏟아질 텐데 괜찮겠나?”
-어차피 투자는 스스로 판단을 해서 하는 것 아닙니까. 전 단지 조언을 할 뿐이지요. 뭐 조금 불만을 보이겠지만 그래 봤자 얼마 못 가서 다 잊어버릴 겁니다.
“그렇구먼.”
-그나저나 얼마까지 끌어 올리실 생각입니까?
“글쎄.”
-이거, 섭섭하게 저한테까지 감추시는 겁니까? 그러지 마시고, 저 혼자 알고 입을 꾹 다물고 있을 테니까 살짝 귀띔을 해 주십시오.
조바심을 내며 매달리는 모습이 몰래 TC인터내셔널 주식을 사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자신도 김인철 몰래 딴 주머니를 찼으니까 남 욕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아무튼 비밀은 많이 알수록 지키기 어려운 데다 애초에 오세민한테 이런 중요한 정보를 알려 줄 생각이 없었기에 슬쩍 말을 얼버무렸다.
“아직 정해진 것이 없어. 바쁘니까 다시 또 통화하세.”
-저, 전무님.
스마트폰을 끈 이동철은 혼잣말을 하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족제비 같은 놈.”
이깟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확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원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꾹국 눌러 참을 수밖에.
“아직 멀었어?”
입에서 튀어나가는 목소리가 뾰족하니 날카로웠다.
“거의 다 왔습니다.”
결국 애꿎은 운전수에게만 불똥이 튄 셈이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약속 장소인 호텔 앞에 승용차가 멈춰 섰다.
운전수가 열어 준 차 문으로 내린 이동철은 힐끗 호텔 건물을 쳐다보곤 이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