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71
171
첫 번째 하역 작업을 모두 끝낸 혁권은 포세이돈 함을 타고 몰타의 수도인 발레타Valletta로 향했다.
그리스가 아니라 몰타로 방향을 잡은 건 1천 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는 아테네와 달리 발레타는 미스라타까지 400km밖에 안 되기 때문이었다.
거리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포세이돈 함이 공기부양정 가운데 세계에서 제일 큰 주부르급이라고 해도 일반 화물선에 비해 적재량이 적어 여러 번 왕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운항 거리를 절반이나 줄이는 건 엄청난 이점이었다.
더군다나 발레타에는 그가 예전에 트리폴리로 물자를 밀수하면서 갖춰 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더욱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발레타 항구는 마치 고향처럼 포근한 느낌을 줬다.
위장 블록으로 무장을 가린 포세이돈 함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면서 부두 한쪽에 위치한 공터에 상륙했다.
“연료 보급과 화물 선적이 끝나면 바로 다시 미스라타로 가야 되니까 힘들더라도 수고를 해.”
“염려 마십시오.”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케노스 함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혁권은 몸을 돌려 하킴과 함께 포세이돈 함을 내렸다.
그러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함단이 앞으로 다가왔다.
“보스!”
“나와 있었군.”
“일이 잘 끝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시작인걸. 그나저나 선적 준비는 다 됐어?”
“예. 1차로 가져온 건 이쪽 야적장에 쌓아 뒀고 나머지 화물도 일주일 안에 모두 도착할 겁니다.”
시선을 돌려 함단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단단히 포장된 화물들이 옮기기 좋게 플라스틱 파레트Pallet 위에 놓여 있었다.
대충 봐도 포세이돈 함으로 서너 번은 옮겨야 될 물량이 되는 것 같았다.
“수고했어.”
“아닙니다.”
언제나처럼 짧게 대꾸한 함단이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했다.
“저, 보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그는 미간을 좁혔다.
“뭔데 그래?”
“발레타 외곽에 창고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미스라타로 가져갈 화물이 상당히 많은 데다 CIA가 넘겨준 물건들은 외부에 노출되면 곤란했기에 그가 소유한 창고에 넣어 둘 계획이었다.
“이곳에 와서 확인해 보니 저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난민들이 창고에 무단으로 들어와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뭐야?”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혁권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끼이익.
흙먼지와 함께 커다란 덩치의 SUV가 창고 앞에 멈춰 섰다.
그 안에 타고 있는 것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직접 가서 자기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다며 서둘러 움직인 혁권이었다.
차 문을 열고 내린 혁권은 창고 부지 근처에 세워져 있는 난민 캠프를 보고 선글라스 속에 가려진 눈매를 찌푸렸다.
녹이 슨 철조망 너머, 구호단체에서 나눠 준 텐트와 크고 작은 허름한 천막들이, 마치 어린아이가 어설피 만들어 놓은 모형처럼 제멋대로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이 있으면 물건이 늘어나는 법인지 빈손으로 제 고향을 떠나온 난민이라도 세간살이 한두 개 정도는 있는 법이라 한 가족이 차지하는 면적이 꽤 되어 보였다.
배급받은 식량으로 만든 묽은 수프에 딱딱한 빵 조각을 적셔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동차를 타고 나타난 혁권을 향해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중간쯤엔 커다란 적십자 마크를 단 천막이 하나 있었는데, 아마 UN 같은 데에서 지원을 온 무리 같았다.
시설이 열악한지라 해 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예방접종이나 가벼운 상처 치료 정도겠지만, 그 정도도 이 사람들에겐 큰 힘이라 줄이 어디까지인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혁권은 난민 캠프에서도 가장 북적일 장소에서 눈을 돌리고는 목표한 창고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 근처는 임대형 창고가 많아서 볼일이 있는 사람 말고는 인기척이 전무한 곳인데, 어쩐 일인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부산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불길한 예감을 안고 한 발 한 발 걸어간 혁권은 단단히 닫혀 있어야 할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사람이 너무 황당한 일을 겪으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된 것처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얏!”
까르르 웃으면서 튀어나온 아이가 혁권의 다리에 부딪히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빠르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마 조심하라고 욕설이라도 내뱉는 것 같았다.
방해된다는 듯 아이가 어깨로 툭 치고 지나가자 혁권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분명 꼼꼼하게 포장된 화물들이 창고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어야 마땅했다.
한데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삼삼오오 둘러앉은 여인네들, 구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노인과 사내,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장난치며 놀기 바쁜 아이들뿐이었다.
그들은 마치 구역이라도 정해 놓은 것처럼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텐트를 밀거나 발로 침범해 들어오면 성질을 내면서 예민한 반응을 보였는데, 혁권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단 침입을 한 것도 모자라 제 집처럼 편하게 누워 있는 데다 멋대로 영역표시까지 해 놨으니, 누구라도 당연히 화가 날 상황.
다만 그가 여기서 폭발하지 않은 것은 너무 황당무계한 일을 맞닥뜨리니 순간적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지, 딱히 마음이 넓거나 착해서이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함단.”
“예.”
“난민캠프 책임자가 누구지?”
그러자 함단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시청에서 관리를 하고는 있는데…….”
“그런데?”
그가 눈꼬리를 추켜올리자 함단이 연신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난민들 숫자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어나는 바람에 시청에서도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랍니다. 이렇게 된 걸 확인하자마자 제가 항의를 했습니다만, 자기들도 딱히 방법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더군요.”
“허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혁권은 헛바람을 내뱉었다.
전에 봤을 때보다 난민 숫자가 몇 배로 늘어난 건 그도 눈으로 봤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명백하게 사유재산을 침해받고 있는데, 행정 기관에서 손을 써 줄 수가 없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이대로 그냥 놔두라는 거야?”
“구호단체들 때문에 직접 공권력을 투입하는 건 곤란하지만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해 개인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건 적당한 선에서 눈 감아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보고 알아서 난민들을 쫓아내라, 이거야?”
“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난민 숫자에 골치를 썩이고 있지만 지중해를 건너오다 익사를 하는 등 처참한 실상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행정 기관에서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니까 은근슬쩍 일을 떠넘기는 거였다.
혁권은 인상을 확 찡그리면서 기분 나쁜 티를 아낌없이 드러내었다.
이럴 때는 가만히 놔두는 게 상책이지만, 그래도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입을 여는 함단의 안색도 그리 좋지 못했다.
“사람들을 시켜 정리를 할까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려 초라한 행색의 난민들을 바라본 혁권은 이내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둬.”
“예에?”
당연히 난민들을 쫓아낼 거라 생각했던 함단은 깜짝 놀라 혁권을 봤다.
“여기서 밀어내면 딱히 갈 곳도 없는 사람들이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누구보다 난민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내가 저들을 다시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지.”
내심 난민들을 측은하게 여기던 함단은 안도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하지만 창고를 못 쓰게 되면 곧 도착할 화물들은 어떻게 하지요?”
다른 것도 아니고 살상용 무기를 다른 화물과 함께 사방이 다 노출된 야적장에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무기 상자들을 컨테이너에 넣어 정상적인 화물로 위장했다지만 그래도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은 것이 없었다.
잠시 고심을 하던 혁권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이집트에 건설 자재를 옮겨 주는 날짜가 언제지?”
“이 주 뒤입니다.”
“그럼 일주일 정도 여유가 있군.”
“……?”
함단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예. 그렇습니다.”
“화물을 내리지 않고 그냥 배에 놔두고 있다가 포세이돈 함에 바로 옮겨 싣는 거야. 그렇게 하면 창고에 보관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안전하지 않겠어.”
이야기를 듣자마자 함단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화물선을 항구에 며칠간 정박시켜 놔야 했지만 어차피 제일 마지막에 무기를 실어 올 계획인 데다 방금 말한 대로 운항 일정도 며칠 여유가 있었기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좋아,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고 여긴 당분간 이대로 놔두자고.”
“알겠습니다.”
곁눈으로 슬쩍 창고 안에 있는 난민들을 한 번 더 쳐다본 혁권은 그대로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탔다.
다음 날 새벽 연료 보급과 화물 선적을 모두 끝낸 포세이돈 함은 다시 거친 파도를 가르면서 미스라타로 향했다.
트리폴리 항구 봉쇄가 풀리면서 잠시 중단됐던 발레타 특급이 미스라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루에 200톤씩 물자가 공급되자 극심한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던 미스라타 주민들의 숨통이 트였다.
민병대 역시 포세이돈 함이 가져오는 군수품에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당장 도시를 포위한 채 압박을 가하던 IS 계열 무장 단체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물자 공급선이 다시 이어지면서 서서히 미스라타 민병대를 고사枯死시키려던 그동안의 노력이 모조리 물거품이 되게 생긴 것이다.
우수만이 긴장한 채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기다렸지만 한참이 자나도록 무하마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물자가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자살 공격대를 짜서 포세이돈 함이 상륙하는 해안 공격을 시도했으나 민병대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벌써 일주일 동안 1,400톤이 넘는 물자가 미스라타 민병대의 손에 들어갔으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해안에 접근도 못 했다고?”
이를 부드득 갈면서 묻자 우수만은 죄인처럼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방어가 너무 단단해서…….”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무하마드가 눈을 부릅뜨자 우수만은 다시 머리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쯧.”
크게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은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공격이 실패한 건 우수만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목줄이 걸려 있는 만큼 미스라타 민병대 역시 전력을 다해 포세이돈 함의 상륙지 주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특히나 CIA를 통해 새로 공급된 신형 RPG-7과 중기관총을 다수 배치하고, 시가지 내부와 달리 탁 트인 시야를 활용해 적이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멀리서 타격을 가했다.
이러다 보니 아무리 공격을 해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인상을 구기고 있는 무하마드를 보며 우스만이 말했다.
“내일 다시 공격해 이번에는 꼭 성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만둬.”
“……예?”
하지만 결연한 우스만과 달리 무하마드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트리폴리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소득도 없는 곳에 계속해서 병력을 소모시킬 수는 없어.”
“그렇지만…….”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해야 돼!”
“아, 아닙니다.”
우스만은 짐짓 어깨를 움츠려 의기소침한 태도를 내보였으나. 속으로는 더 이상 위험한 공격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혼자 분을 삭이려 힘들게 애쓰던 무하마드는 머리가 아프다는 것처럼 관자놀이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내가 말한 건 어떻게 됐어?”
그러자 우스만이 자세를 바로 하면서 곧장 대답했다.
“비선秘線을 통해 지시를 내렸으니 조만간 행동에 나설 겁니다.”
무하마드가 눈을 매섭게 번득이며 뱉듯이 말했다.
“감히 성전을 가로막는 놈이 어떻게 되는지 이번에 똑똑히 보여 주고 말겠어.”
순간 천막 안은 싸늘한 살기가 진하게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