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90
290
며칠 뒤.
오늘도 어김없이 이즈미가 운영하는 다이아몬드 세공 공장 앞에 도착한 송진원은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사흘째였다.
“갑자기 뒈지기라도 했나.”
송진원은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듯 발로 애꿎은 철문을 쾅 찼다.
사람을 만나야 멱살을 붙잡고 싸우든, 어거지를 피우든 할 텐데 아예 얼굴을 보질 못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도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싶어 허무한 얼굴로 헛웃음을 터트리는데, 그러다 불현듯 이즈미도 자기 형처럼 몰래 공장을 처분하고 도망쳐 버렸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조급해진 그가 주먹으로 철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이, 안에 있지! 쥐 새끼처럼 숨어 있는 거 다 알아, 얼른 나와!”
그렇게 몇 번을 쾅쾅 쳐 댔지만 대꾸는커녕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형 트럭을 끌고 와서 처박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저 두꺼운 철문이 부서질 리도 없었다.
“하아.”
쿵, 하고 머리를 부딪치자 쇳덩어리의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러고 있은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지난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오랜만에 통화했을 때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니 송진원의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스쳤다.
이젠 진짜 포기해야 할까.
가족들은 그가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국도 아니고 기댈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타국 땅에서 작정하고 잠적한 사람을 찾을 수 있겠냐고.
말 그대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며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지금까지 남아 있었건만 결국은 가족들의 말대로 되었으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디 그뿐이랴.
사업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끌어들인 돈을 몽땅 다 날려 먹었으니 가족들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영혼 없는 시체처럼 넋이 나간 채 끙끙거리고 있으려니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송진원 씨.”
“……?”
이곳에선 거의 들을 수 없는 한국말에 송진원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섰다.
“당신은…….”
일전에 그를 도와줬던 청년이었다.
100달러짜리 지폐 뭉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갑에 들고 다니던 사내.
그리고 그의 뒤에는 저번에 차 안에서 봤던 덩치 큰 아랍인도 있었다.
저 사람은 아마 보디가드쯤 되는 것일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서 있으니 혁권이 다시 말했다.
“잠시 저랑 이야기 좀 나누시겠습니까?”
“무슨 일로……?”
그와의 인연은 저번에 시내까지 태워 준 것으로 끝이 아니었던가.
“자세한 건 가서 이야기를 합시다.”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딱히 지금 다른 할 일도 없었기에 그는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송진원을 태운 승용차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 앞에 멈추어 섰다.
3층 높이의 회색 시멘트 건물인 창고는 오래되고 낡아 칠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고 금이 간 것까지 눈에 띄었다.
주위에 인적도 별로 없고 이 창고만 덜렁 떨어져 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겼다.
승용차에서 내린 송진원은 이리저리 눈을 돌리면서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왜……?”
불현 듯 외국에 나가면 같은 나라 사람을 조심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떠오른 송진원은 이거 괜히 따라온 것이 아닌가 하며 덜컥 겁이 났다.
사업에 실패하고 사기까지 당해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인데 무슨 걱정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끌고 와서 장기를 적출해 판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었기에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송진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혁권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시죠.”
“아. 예.”
꺼림칙했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안 가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한 데다 무엇보다 건장한 사내 여러 명을 혼자서 쓰러뜨렸던 하킴을 당해 낼 자신이 없었기에 송진원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덜컹.
녹이 슬어서 그런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자물쇠 소리를 내며 철문을 열고 세 사람이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출입구 근처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있던 알아바디가 얼른 일어나 혁권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별일 없지?”
“네.”
수고했다는 듯이 가볍게 알아바디의 어깨를 두드려 준 혁권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송진원을 보며 말했다.
“안에 송진원 씨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 말입니까?”
“예.”
몇 년 동안 인도에서 사업을 하면서 제법 많은 사람과 알고 지내기는 했지만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할 이는 없었기에 더욱 불안감이 짙어졌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기에 송진원은 여기서 더 나빠질 것이 뭐가 있겠냐고 생각하며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허름한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부서진 박스 같은 것들이 지저분하게 굴러다니는 공간에 한 남자가 의자에 묶인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뜻밖의 광경에 송진원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혁권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그, 글쎄요.”
“한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아마 아주 반가운 사람일 겁니다.”
“…….”
살짝 입가에 미소까지 지으면서 하는 이야기에 송진원은 더욱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자 송진원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의자에 묶여 있는 사람한테 다가갔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누군지 알아보고는 눈을 한껏 치켜떴다.
군데군데 멍이 들고 부어올라 엉망이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바로 자신한테 사기를 치고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지고 달아났던 왈리였다.
“이, 이놈은.”
“바루치에 있는 별장에서 훔친 다이아몬드 원석을 처분해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더군요.”
자신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정작 사기를 치고 달아난 범인은 마음 편히 지내고 있었다는 것에 분노한 송진원은 와락 앞으로 달려들며 왈리의 멱살을 붙잡았다.
“개자식. 네놈이 이러고도 사람이야!”
몸을 마구 흔들어 대는 통에 기절해 있다가 깨어난 왈리도 상대를 알아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하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오.”
“네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통 속에 지냈는지 알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송진원은 왈리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퍽!
“어이쿠.”
그동안 쌓인 울분을 한꺼번에 다 풀어 내듯 송진원은 마구 주먹질을 해 댔다.
혁권이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옆에 서 있던 하킴이 나직이 말했다.
“그냥 놔둬도 되겠습니까.”
“속에 있는 응어리를 다 풀 수 있게 내버려 둬.”
“하지만 저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살인이 겁나는 건 아니었지만 뒤처리를 하는 것이 번거로웠다.
“저놈을 잡아 올 때 별장에서 성인도 안 된 어린 여자아이한테 몹쓸 짓을 하고 있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 하킴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그럼 쓰레기 하나 치운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바로 수긍한 하킴은 다시 입을 다물고 섰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송진원은 더 이상 때릴 힘이 없는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주먹질을 멈췄다.
생명줄 하나는 질긴지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됐지만 왈리는 숨이 끊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혁권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분은 다 풀리셨습니까.”
고개를 든 송진원은 엉망이 된 채 늘어져 있는 왈리를 사납게 노려보면서 말을 내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목을 졸라 죽여 버려도 시원치 않겠습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
당연히 말릴 줄 알았던 송진원은 혁권을 돌아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도록 뒤처리는 제가 깔끔하게 해 드리죠.”
그냥 던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혁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어디 있는지 찾아내지 못했던 왈리를 단 며칠 만에 이렇게 눈앞에 데려다 놓은 것만 봐도 상대의 능력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한테 고통을 안겨 준 왈리를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막상 그렇게 해 준다고 하니 송진원은 덜컥 겁이 나는 건 물론이고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왈리한테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목숨까지 빼앗을 자격이 있을까.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망설이는 모습에 혁권이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는 구둣발로 비벼 끄면서 말했다.
“감옥에 보내 충분히 죗값을 치르게 하면 되니까 내키지 않으면 그만둬도 괜찮습니다.”
“인도 경찰도 한통속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워낙 크게 불신감이 박혀서 그런지 송진원은 정색을 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뇌물을 받고 뒤를 봐 줬으니 똑같이 해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마 돈만 듬뿍 쥐여 준다면 없는 죄도 만들어 줄 것이었다.
송진원이 약간 누그러진 표정을 짓자 그는 안주머니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 보십시오.”
아무런 생각 없이 가죽 주머니 끈을 풀고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한 송진원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가죽 주머니 안에는 세공이 되지 않은 다이아몬드 원석이 한 가득 들어 있었다.
“이, 이건…….”
“다행스럽게도 송진원 씨의 물건을 처분하지 않고 가지고 있더군요.”
왈리가 숨어 지내던 별장 금고에 있던 다이아몬드 원석들 가운데 대충 송진원이 빼앗긴 액수에 맞춰 넣어 둔 거였지만 원석에 누구 거라도 이름표가 적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다시는 되찾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다이아몬드 원석이 손 안에 들어오자 송진원은 너무 기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것만 있으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송진원은 정색을 한 채 그를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절대 단순한 호의라고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했다.
특히 사업을 하면서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송진원은 세상에 절대 공짜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런 마음을 느꼈는지 혁권은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리저리 돌려서 이야기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저와 함께 일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
바짝 긴장하고 있던 송진원은 뜻밖의 이야기에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다이아몬드 사업을 하려는데 이것저것 일이 많은 관계로 인도에 오래 머물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쪽 일이라는 것이 워낙 큰돈이 오가다 보니 여러 가지 변수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대리인이 필요합니다.”
“왜 하필 절……?”
당연한 의문이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보는 사이인 데다 무엇보다 그는 사업에 실패하고 사기까지 당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이런 수고까지 해 가면서 영입하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선을 받은 혁권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이상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어찌 됐건 실패한 사업가이니까요.”
자존심이 상하지만 사실이었기에 송진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얻어맞을 걸 각오하고 세공 공장을 찾아가는 그 악바리 같은 근성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단순히 그것 때문에…….”
“다른 건 배우면 되지만 타고난 근성은 바꾸기가 힘드니까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찌 됐건 자신을 인정해 준다는 것에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제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혁권의 물음에 송진원은 진지한 얼굴로 고심을 하다 고개를 들며 말했다.
“지금 당장 대답을 해야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충분히 생각을 해 보시고 답을 주십시오. 대신 며칠 있으면 인도를 떠날 예정이니 가급적 그 안에 연락을 받았으면 좋겠군요.”
“그러겠습니다.”
송진원은 혁권이 주는 명함을 공손히 받아 안주머니에 챙겨 넣으면서 의자에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왈리를 힐끗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