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10
310
# 동결 자금
월요일 아침.
조금 늦게 출근한 혁권은 출근하자마자 홍선호 부장을 호출했다.
노크를 하며 홍선호 부장이 안으로 들어와 꾸벅 허리를 숙이자 자리에서 일어난 혁권은 한쪽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그리로 앉아.”
“감사합니다.”
혁권이 먼저 다리를 꼬고 편한 자세로 등을 기대자 홍선호 부장이 왼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시한 자료는?”
“여기 있습니다.”
홍선호 부장이 서류철을 하나 내밀자 그가 받아 들고는 내용을 천천히 훑어봤다.
“흐음.”
그는 한쪽 손으로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쓰다듬으면서 보고서를 한 장씩 넘겼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혁권이 서류철을 덮고는 고개를 들어 홍선호 부장에게 시선을 줬다.
“이거 정확한 거야?”
“코트라KOTRA를 통해서 얻은 자료이니 확실한 겁니다.”
“리비아에 묶여 있는 국내 건설 업체의 미수금이 35억 달러가 넘다니…… 정말 많군.”
“중동 지역 국가들과 함께 오일 머니를 노린 건설 업체들의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보니 아무래도 피해액이 큰 것 같습니다. 특히 리비아는 대수로[Great Manmade River Project, GMR]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한국 업체들에 대한 위상이 아주 높아져 다른 지역에 비해 시장 점유율이 높은 편이었던 것도 큰 요인일 겁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남부 사하라 사막 지역에 있는 지하수를 끌어와서 지중해 연안의 주요 도시들에 식수를 공급하는 초대규모 토목 프로젝트였다.
지름 4미터, 길이 7.5미터에 총연장 4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송수관을 거친 사막을 가로질러서 땅속에 매설해 하루 650만 톤씩 끌어 들이는 거였다.
투자금액만 250억 달러에 달하고 총 4단계에 걸친 공사 예정 기간은 25년이었다.
척박한 사막을 지나는 대형 송수관을 하나씩 땅에 파묻고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지하수를 끌어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계 유수의 건설 업체들도 선뜻 나서길 꺼리던 이 일을 바로 한국 업체가 수주해서 1, 2차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뛰어난 기술과 근면 성실함을 입증했다.
이 대수로 공사가 기폭제가 되어 앞서 홍선호 부장이 설명한 것처럼 많은 한국 건설 업체들이 리비아에 진출해 각종 토목 공사를 수주하며 오일 머니를 벌어 갔다.
한동안 리비아에서 발주되는 대형 토목 공사들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며 화수분처럼 한국 업체들이 달러를 계속해서 벌어들였었다.
그랬던 리비아가 지금은 거액의 미수금이 발생하면서 국내건설 업체들의 발목을 붙잡게 된 거였다.
“이 회사들이 미수금 회수를 다 포기한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지속적으로 미수금을 받아 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카다피 정권 몰락 이후 수년째 지속된 내전에 제대로 된 협상 창구조차 찾지 못하고 그저 속만 태우고 있는 실정입니다.”
혁권은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트리폴리 정부가 있다지만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인데 한국 업체에 줘야 되는 미수금까지 신경 쓸 형편이 아니지.”
“맞습니다.”
“결론은 현재 상황에서 이들이 미수금을 받아 낼 방법이 없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태일건설 같은 경우에는 아예 미수금을 받는 걸 포기하고 불량채권[Bad Debt]으로 묶어 헐값에 내놨지만 거래가 전혀 안 된다고 합니다.”
눈을 반짝이며 혁권이 관심을 보였다.
“그게 정말이야?”
“예. 거래 소등을 통해서 내놨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태일건설에서 내놓은 채권 가격이 얼마지?”
왜 이런 걸 묻는지 의아했지만 홍선호 부장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원래는 10분의 일인 100만 달러에 처분하려고 했지만 매수자가 없자 50만 달러까지 떨어져 있습니다.”
공사 미수금 1천만 달러를 받아 낼 권리를 고작 그 가격에 팔다니 말 그대로 헐값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미수금을 회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면 절대 싼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위험 부담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꺼려지는 금액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혁권은 홍선호 부장을 보며 말했다.
“수고 많이 했어. 그만 나가 봐.”
“네.”
홍선호 부장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자 혼자가 된 혁권은 앞에 놓여 있던 서류철을 집어 다시 한 번 내용을 자세히 살펴봤다.
한국 건설 업체들이 리비아에 가지고 있는 미수금에 대해 고민하는 와중에서도 혁권은 틈틈이 소현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친한 오빠 정도겠지.”
“예?”
“아무것도 아냐.”
마침 옆에 서 있던 하킴이 의뭉스러운 얼굴로 묻자 혁권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냥 혼잣말이었어.”
그러곤 혁권은 다시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 버렸다.
평소라면 하킴이 무표정한 얼굴 위로 굵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리는 걸 예민하게 알아챘겠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어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
소현 정도의 미모라면 당연히 주변에 치근덕거리는 남자들이 차고 넘치겠지.
얼마 전 만났을 때도 잠시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뿐인데 얼마나 이목이 집중되었던가.
혁권이 조금만 더 늦었어도 분명 네댓 명은 전화번호가 뭐예요, 이름이 뭐예요 그딴 걸 물어보면서 수작을 부렸을 걸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야 소현도 만나자고 하면 곧잘 응하는 걸 보면 이성적인 호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뭔가 더 친해질 확실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다가가면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는 소현은 금방 도망가 버릴 것 같고.
끙끙대면서 고심하고 있을 때 하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스.”
“응. 뭐 할 이야기라도 있어?”
“주제 넘는 질문입니다만 혹시 지난번 그 아가씨한테 마음이 있으신 겁니까?”
“…….”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하킴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계속 이었다.
“마음이 가신다면 확실히 붙잡으십시오. 어쩌면 그 아가씨도 보스께서 진심을 보여 주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까?”
“답답하게 고민만 하는 것보다 백번 나을 겁니다. 이러시는 건 빗발치는 총탄 세례도 겁을 내지 않던 보스답지 않으십니다.”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설마 하킴의 입에서 연애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올 줄이 상상도 못 했기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고 있지 않은가.
“……좋은 조언 고맙군.”
어쨌든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자 하킴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별말씀을.”
하킴이 밖으로 나가자 조금은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데이트 장소를 검색하던 혁권은 적당한 곳을 찾아냈다.
“여기가 좋겠군.”
그의 시선에 들어온 데이트 장소는 서울 외곽에 위치한 자동차 전용 극장이었다.
차 안이라면 단둘이 오붓하게 있을 수도 있고, 추운 날씨에 밖을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반쯤은 실내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타인의 눈을 의식할 필요도 없으니 이렇게 완벽할 데가!
혁권은 흡족한 얼굴로 이젠 완전히 외워버린 전화번호를 눌렀다.
-네.
“나야. 무슨 일 있어? 목소리에 기운이 없네.”
-자다가 일어나서 그래요.
수화기 너머로 끄응, 하며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났다.
살짝 목이 잠겨 가라앉은 음성에 이불이 스치는 소리까지 더해지니 왠지 모르게 묘한 상상을 하게 되는지라 혁권은 서둘러 용건을 꺼냈다.
“많이 피곤해? 하긴 부산에서 바쁘게 지내느라 쉴 틈도 없었지.”
-말도 말아요. 그때 들고 간 가방, 아직 풀지도 않고 침대 밑에 던져 둔 채 그대로 있다니깐.
언제 날 잡아서 청소해야 되는데 하면서 소현이 투덜거렸다.
-근데 왜 전화했어요?
“아, 혹시 시간 되면 영화나 한 편 보러 가자고.”
-흐음.
이젠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났는지 일정을 살펴보는 듯 종이 넘기는 소리가 뒤에서 약하게 들려왔다.
-응, 괜찮아요. 오늘이랑 내일, 둘 다 시간 비어 있으니까.
“그래? 다행이다.”
-오늘 만날 거예요? 그럼 지금부터 씻고 준비하게.
“보자…… 1시간 쯤 후에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오케이. 나중에 봐요.
전화를 끊은 혁권은 얼른 사장실 벽에 걸려 있는 작은 거울 앞으로 가 얼굴을 점검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추레한 차림으로 다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여자를 만날 때에는 신경이 더 쓰이는 탓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다행히 오늘 아침에 깔끔하게 면도도 했고 옷차림새도 나쁘진 않았다.
소현의 집으로 가기 전에 미용실에 잠깐 들러 머리 모양만 매만져 달라고 하면 완벽하게 준비가 끝나는 셈이었다.
“하킴.”
사장실 문을 열고 부르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다가왔다.
“오늘은 더 이상 다른 스케줄 없지?”
“예.”
“좋았어. 그럼 지금 퇴근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댁으로 가실 겁니까?”
“아니. 데이트가 있어.”
“알겠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소현과 만남을 가지는 걸 봤기에 군말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좋은 저녁 되십시오.”
“고마워.”
아무리 충직한 부하라고 해도 보스의 사생활은 존중해 줘야 하는 법이었다.
물론 알아바디와 함께 뒤를 따라오겠지만 그건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킴이 조용히 물러난 뒤, 혁권은 남아 있던 사소한 잡무들을 순식간에 처리한 후 책상을 정리하는 것도 나중 일로 미룬 채 서둘러 재킷을 손에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약속한 대로 시간이 딱 정시를 가리키자 길 저편에서 소현이 가방을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야.”
“안녕.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혁권이 소현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것에 익숙해진 것처럼 소현도 그의 옆자리에 타는 것이 이젠 많이 자연스러워진 듯 스스럼없이 차에 올라탔다.
“부산에서 보고 처음이지.”
“고작해야 며칠 전이지만요. 이것저것 일이 많아서 그런가 엄청 오래된 것 같아요.”
“발목은 좀 어때? 의사가 푹 쉬라고 했잖아.”
“많이 괜찮아졌어요. 집에서 뒹굴거린 덕분에 살찐 거 봐요.”
“그래? 그럼 다음에는 나랑 부산에 놀러 다시 한 번 가자고. 바다도 보고 오고, 회도 먹고.”
“나 그 바다에 있는 대교 보고 싶어요. 그게 광안리에 있댔나? 밤 되면 조명도 예쁘게 켜 놓는다던데 못 보고 온 게 사실은 조금 아쉬웠거든요.”
“하하, 좋았어. 약속이다.”
어린애들처럼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흉내까지 내면서 혁권이 말했다.
“근데 뭐 볼 거예요? 저번에 같이 영화관 간 것 말고는 통 뭘 보러 간 적이 없어서. 요즘 상영하는 게 뭔지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아. 오늘은 조금 멀리까지 나가 볼까 해.”
“영화 보러 간다면서요?”
소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렇긴 한데 저번에 극장 갔을 때 사람들이 알아봐서 조금 불편했잖아.”
잠시 음료수를 사러가느라 소현을 로비에 혼자 앉혀 놓은 것이 실수였다.
혁권이 돌아왔을 땐 나이 어린 소녀들이 소현을 둘러싸고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카메라 렌즈를 향해 활짝 웃어 주면서도 혁권에게 미안하다는 듯 눈짓을 해 보였었다.
“고작해야 한두 명뿐이었는데 뭘요. 내가 무슨 TV에 나오는 연예인도 아니고, 알아봐 주면 오히려 감사한 일이죠.”
모델 중에서 일반인들도 알아볼 정도로 인지도가 쌓이는 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소현은 비록 계단을 차곡차곡 밟아 올라가는 단계에 있긴 했으나 화려하게 생긴 마스크가 유행인 요즘 트렌드에 비해, 오히려 옛날 여배우처럼 고전적인 느낌이 나면서도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때문에 새침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 매력적이라며 인터넷상에서 소소하게 팬이 있는 모양이라 소현은 그게 기쁜 모양이었다.
“그래? 네가 괜찮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