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11
311
혁권은 웃으면서 서울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로 차를 진입시켰다.
“자동차 극장이라는 거 알아?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좌석 대신에 편안하게 차 안에서 앉아서 영화를 보는 거야. 드라이브도 할 겸, 소현이 너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일부러 골랐지.”
“어, 그거 TV에서 몇 번 소개해 주는 거 본 적 있어요.”
“그치? 예전에 반짝 유행하다가 많이 사라지긴 했는데 아직 남아 있는 곳이 있더라고.”
“재밌겠네. 영화는 뭘 해 준대요?”
“최신작 중에 골라서 틀어 준다고 하던데 오늘은 뭘 하는지 모르겠네. 아마 거기 가 보면 적혀 있겠지.”
“무슨 ‘묻지 마 영화’도 아니고 그냥 무작정 가는 거네요.”
“원래 영화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봐야 재밌는 법이야. 게다가 맛있는 걸 먹으면서 마음대로 수다도 떨 수 있다는 게 자동차 극장의 묘미 아니겠어.”
“아무튼 운전대는 그쪽이 잡았으니 마음대로 해요.”
소현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편하게 등을 뒤로 기대고 본격적으로 드라이브를 즐길 준비를 했다.
늦은 오후에 출발했기 때문에 슬슬 자동차 극장에 다다를 때쯤엔 이미 저녁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도중에 대형마트에 들러서 산 주전부리와 음료수를 꺼내 들고 스크린이 잘 보일만한 자리에 주차하자 소현이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외로 사람이 많네요.”
크게 북적거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장사가 안 되는 수준도 아니라 딱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을 정도였다.
차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것은 대부분 커플들이었고,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건 주로 가족 단위로 놀러 나온 일행이었는데 아이가 있으니 덕분에 분위기가 음침하지도 않고 괜찮았다.
“어린아이가 있으면 영화관에 마음 편하게 데리고 가질 못하니까 이런 데로 오나 봐요.”
“하긴, 애들은 집중을 오래 못 하지.”
영화 관람은커녕 도중에 울거나 나가자고 떼를 쓰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디 맡길 데도 없어서 적어도 애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는 문화생활 따위 꿈도 꾸지 못하는 부모가 많은 걸 생각하면 꽤 좋은 방법이었다.
적어도 자동차 안에서는 어느 정도 방음도 되는 데다 애가 졸려 하면 재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근데 정말 뭘 틀어 주는 걸까.”
소현은 다리를 꼬고 앉아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쭉 빨아들이면서 중얼거렸다.
“아, 이제 시작하려나 보다.”
대형 스크린으로 유명한 영화 제작사의 로고가 떠오르면서 수십 번은 들어 보았을 친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첫 시작은 십 대 고등학생들이 여름 방학을 맞이해서 여행을 가 보자는 이야기로 전개되었다.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금발의 치어리더, 그리고 남자친구인 럭비 팀 주장.
소심하지만 착한 신문부 안경쟁이.
반에 한 명씩은 흔히 있는 불량아.
그리고 어딜 가나 잘 끼어드는 성격으로 감초 역할을 하는 까불이가 카메라를 들고 일행을 촬영하는 형식이었다.
여주인공은 갈색머리에 활달한 여학생이라는 설정이었는데 딱히 유명한 배우는 아닌 듯 이름을 보아도 딱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경쾌한 팝 음악이 흐르면서 등장인물 소개를 겸한 학교 신이 슬슬 끝나고 치어리더가 부모님이 별장을 싸게 샀는데 몰래 가 보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을 때쯤, 혁권은 옆을 슬쩍 돌아보았다.
취향에 맞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소현은 영화에 아주 잘 집중하고 있었다.
가끔씩 음료수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 외엔 꼼짝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의외로 내용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극장에서 보았던 것은 무난한 로맨스 영화였는데 솔직히 혁권은 조금 지루했지만 소현은 괜찮았다고 후한 평을 내렸더랬다.
‘아무래도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가 보네.’
앞으로도 데이트 코스에 종종 영화관을 집어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혁권은 다시 스크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벌써 영화는 스토리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주인공 일행이 다 함께 차를 타고 별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꽤 시골 구석진 곳에 있는 것인지 전파가 안 터진다고 불평하는 대사와 함께 마치 저택 같은 고풍스러운 외관의 별장이 음산한 음악과 함께 등장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관객에게 미리 알려 주기라도 하려는 듯 라디오에서는 오늘 밤 갑작스러운 비바람이 몰아칠 거라는 대사가 스치듯 지나갔고, 밤이 찾아오자 맥주를 마시고 웃고 낄낄거리던 일행들이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아니.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거짓말! 밖에서 누가 비명 같은 걸 질렀다고.
치어리더가 히스테릭해진 표정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외쳤다.
조금씩 낮게 깔리는 음악이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과 함께 영화의 내용도 점점 긴박감 있게 진행되었다.
-마이크? 대답해!
금발의 치어리더가 불안한 듯 창고 문을 열었다.
계단에는 물에 젖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그녀가 주저하며 안으로 들어선 뒤 불을 켜려고 벽을 더듬는 순간.
-꺄아아아!
퍽!!
둔탁한 소리가 크게 울리고 치어리더의 몸이 계단을 데굴거리며 굴러떨어졌다.
“히익!”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던 소현이 눈을 질끈 감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무서워?”
크게 잔인한 장면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어 옆에서 혁권이 작게 속닥거리자 소현이 어깨를 흠칫거리며 답했다.
“소, 소리가 너무 리얼해서 소름 끼치잖아요.”
“아하.”
“으으. 아, 어떡해 쟤들 밖에 나가면 안 되는데…… 집에 있어!”
하지만 소현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밖을 살펴보겠다며 나간 치어리더와 남자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나둘씩 짝을 지어 수색을 하러 나가는 참이었다.
‘쯧쯧. 저래서야 습격해 달라고 비는 거나 마찬가지겠는걸.’
혁권은 별다른 감흥 없이 화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음악과 연출이 한데 어우러져서 한창 사람 간을 졸이게 하는 부분으로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고작해야 고등학생 여섯 명이 정체불명의 연쇄 살인마와 싸우는 정도 가지곤 딱히 흥미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가상 세계보다 혁권이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현실이 훨씬 더 스릴 넘치고 위험하니까.
‘그것보다…….’
혁권은 곁눈질로 슬쩍 옆을 훔쳐보았다.
그와는 달리 소현은 영화 내용에 푹 빠져 있는 모양으로, 두 다리를 모아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는 마치 의자에 파묻힌 듯한 자세가 되어 있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인지 이따금씩 좌석 사이에 놔 둔 팝콘 통으로 손을 뻗는 것 외에는 한 치의 미동조차 없이 완전히 집중한 표정이었다.
혁권은 그걸 보곤 차라리 극장이 더 나았을까 하고 살짝 후회했다.
차 안에서라면 둘만 조용히 있을 수 있어서 슬쩍 손을 잡아도 될 정도로 분위기 조성이 쉽게 될 줄 알았는데 사이드 브레이크 때문에 약간 떨어져 있다 보니 오히려 스킨십을 시도하기가 더 힘들었다.
게다가 소현이 생각한 것보다 무서움을 덜 타는 것도 예상외의 변수였다.
아니, 공포영화를 무서워하긴 하는 것 같은데 꺄악 하면서 품에 달라붙는 시추에이션을 기대하기엔 너무 재밌게 보고 있는 것이 흠이랄까.
‘명백한 계산 미스로군.’
속으로 그렇게 한탄을 한 혁권은 소현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렴 어떠랴 하는 심정이 되었다.
뭐, 딱히 시간이 오늘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소현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건 혁권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좋게 생각하자며 기분을 바꾼 혁권은 아직 미련을 끈끈하게 남기고 있는 흑심을 멀리 치워 버리고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한편 혁권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소현은, 영화에 잔뜩 집중하고 있다가 주인공 일행이 살인범에게서 도망쳐 이 층 방에 틀어 박혀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농성하는 장면이 나오고 나서야 꾹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계속 쫓고 쫓기다가 한 박자 쉬어 가는 타임인지 스크린에서는 배우들이 별장에서 도망칠 길을 찾으며 여기 오는 게 아니었다고 울먹여 대고 있었다.
소현은 문득 목이 마른 것을 느끼고 손에 들고 있던 테이크아웃 잔을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홀짝거리며 다 마셔버린 듯, 속이 텅 비어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자 소현이 혁권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뒤에 물 있으면 하나 줄래요?”
소현이 빈 테이크아웃 컵을 흔들어 보였다.
“아, 응.”
처음부터 넉넉하게 샀는지라 비닐봉지 안에는 생수병과 과자 몇 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혁권은 뒤로 팔을 뻗어 뒷좌석에 던져 둔 봉투를 뒤적여 생수를 찾아 꺼냈다.
“자.”
“고마워요.”
생수병을 받아 들고 일단 목을 축이려는데 혁권이 빈 컵은 이리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이에 컵을 건네주려는데 둘 다 시선을 영화에 고정시키고 대충 감으로 팔만 움직이고 있던 탓에 거리 감각이 애매해져서인지 소현의 손을 혁권이 감싼 형태가 되었다.
아무리 체격 차이가 있다곤 하지만 소현도 여자치곤 키가 커서 손이 큰 편인데, 혁권과 비하니 거의 어린아이의 것처럼 작아 보였다.
게다가 유달리 피부가 흰 소현의 손에 혁권의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손이 겹쳐지니 흑백의 대비가 묘하게 느껴졌다.
길쭉하면서도 남자답게 마디와 선이 굵은 손가락을 잠시 감상하듯 훑어보던 소현은 혁권이 손을 움직이자마자 화들짝 놀란 듯 생각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녜요.”
잠시 스쳤다 지나간 온기에 넋을 빼앗긴 소현에 비해 혁권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단둘뿐인 공간에, 그것도 제법 분위기 좋은 밤인데.
굳이 따지자면 별것 아닌 접촉이었지만 괜히 자신만 상대를 의식하고 혼자 두근거리는 것 같아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저 사람은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방금 전 같은 상황에선 불꽃이 튀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소현은 뚜한 얼굴로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입속에서 우물거렸다.
어쨌든 날 좋아하는 건 맞겠지?
소현은 의심 서린 눈초리로 혁권을 슬쩍 훔쳐보았다.
딱히 영화에 집중하는 것 같진 않은데 전혀 이쪽으로 시선을 안 돌린다.
왜 저렇게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거야.
거의 입에 가져다 대지도 않은 듯 반 이상 남아 있는 혁권의 음료수 컵을 힐끔 쳐다보고선 소현이 다시 눈을 데굴데굴 굴려 그를 향하니 그제야 뚫어지게 보고 있었던 걸 눈치챈 듯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왜?”
소현은 그 얼굴을 가만히 주시하다가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작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좋아하는지 시험해 볼까.
좀처럼 말해 주지 않는 혁권의 속내를 한 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도 확실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혁권은 그 나름대로 죽을 맛이었다.
기껏 사람이 온갖 번뇌를 끊어 냈더니 느닷없이 일어난 스킨십 덕분에 다시 신경이 곤두서고야 말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나이는 먹을 만큼 먹어 가지곤 고작해야 손이 한번 닿은 것 정도로 이렇게 당황하다니, 누가 들으면 실컷 웃어 댈 일이었다.
스스로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몸이 잠깐 가까이 기울었을 때 슬쩍 느껴지던 비누 향을 다시 한 번 맡고 싶다는 욕심이 그를 자꾸만 충동질했다.
갑자기 어깨를 끌어안으면 깜짝 놀랄까.
싫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것만 같아서 섣불리 시도를 못 하겠다.
그런 잡념들을 어른스러운 표정 아래 가린 채 혁권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보고 있으니 소현이 불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
“응?”
“이리 줘 봐요.”
갑작스러운 요청에 혁권은 의아해하면서도 덩달아 손바닥을 쫙 펴서 내밀었다.
그러자 소현이 손바닥을 마주 대곤 저보다 한 마디 이상 큰 혁권의 손 크기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손이 꽤 크네요.”
“어? 고마워해야 하나?”
애매하게 웃고 있으려니 소현이 손가락을 구부려 깍지를 꼈다.
마치 자신과는 아예 종족이 다른 것처럼 부드럽고 하얀 손이었다.
언제까지나 손안에 가둬 놓고 만지고 싶을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 감촉이었으나, 그만큼 뼈가 가늘고 꽉 쥐면 부서질 것 같아서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그러자 소현이 약간 화난 것처럼 힘을 꾹 주었다.
그게 빨리 잡아 달라는 재촉처럼 느껴져서 혁권이 굳어 있던 손가락을 움직여 마주 잡으니 그제야 만족한 것처럼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지?
한껏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다 떠다녔다.
“나 수족냉증 있거든요.”
“어?”
“원래는 겨울 되면 손난로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오늘은 급하게 나오느라 못 챙겨 왔으니까 그쪽이 대신 손 좀 잡아 줘요.”
그러면서 소현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장차 잘나가는 슈퍼모델이 될 건데, 손에 동상이라도 걸리면 안 되잖아요. 그쵸?”
처음부터 계속 히터를 틀어놔서 차 안은 충분히 따뜻했지만 둘 다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래. 나는 몸에 열이 많은 편이니까 체온을 딱 반씩 나누면 되겠네.”
다만 그렇게 말하면서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는 소현의 손을 꽉 힘주어 잡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