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12
312
다음 날 정오 무렵, 혁권을 태운 벤츠 승용차가 성북동에 위치한 삼청각三淸閣에 도착했다.
70~80년대 요정 정치의 산실로 불리던 삼청각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옛 위상을 잃고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문을 닫게 되자 서울시에서 인수해 현재는 한식당과 전통 문화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는데, 바로 국정원 요원이자 심인성의 측근인 최기혁이었다.
“팀장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절 따라오시죠.”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뒤에 하킴만 대동하고 건물 안으로 최기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용도가 바뀌었지만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삼청각은, 차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평일 낮이라서 손님들이 거의 없어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홀 안쪽에 위치한 룸으로 들어가자 심인성이 와이셔츠 차림으로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일찍 오셨군요.”
“앞선 일정이 빨리 끝나서 먼저 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손을 맞잡고는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자, 일단 앉으십시다.”
“그러죠.”
테이블에 마주 보면서 앉자 심인성이 미소 띤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식사는 뭐로 드시겠습니까?”
혁권은 메뉴판을 슬쩍 보더니 금방 덮어 버렸다.
“딱히 가리는 건 없으니 추천 메뉴가 있다면 그걸로 하지요.”
“코스 요리가 맛있다던데, 괜찮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심인성이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여종업원을 불러 말했다.
“궁중수라 2인분 부탁해요.”
“예, 알겠습니다.”
메뉴판을 챙긴 여종업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곤 자리를 비켜 주었다.
룸 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심인성이 앞에 놓인 둥글레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먼저 입을 뗐다.
“지난번에 한 제안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요?”
단순히 거절을 할 생각이었다면 그냥 전화로 이야기를 끝냈을 거였기에 심인성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어렸다.
그런 상대를 보며 혁권은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먼저 요구 사항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게 충족된다면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죠.”
“말해 보십시오.”
“우선 미수금 회수에 대한 전권을 제게 줬으면 합니다.”
“전권이라면……?”
“말 그대로 이번 일에 대해 모든 걸 저한테 맡기라는 겁니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작업인데 하나하나 간섭과 승인을 받아야 된다면 제대로 일을 진행할 수 없을 테니까요.”
심인성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는 갑니다만 그래도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고는 있어야 되지 않겠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필요한 경우 상의를 하겠지만 충분한 제량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냥 해당 기업이나 정부에서 미수금을 해결하지 저한테 일을 맡길 필요가 없겠지요.”
“흐음.”
상대가 일정 부분은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리고 제 몫을 확실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정도를 원하는 거요?”
그는 미리 생각해 둔 대답을 했다.
“미수 채권 액면가에서 정확하게 절반을 받아 드릴 테니 나머지 액수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3억 8천만 달러에서 절반이면 거의 2억 달러에 달하는 거액인데, 그건 너무 많지 않소이까?”
그러자 혁권이 정색을 하면서 상대를 쳐다봤다.
“그건 아니지요. 설마 심 팀장님께서는 미수 채권을 액면가 그대로 다 회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전부는 고사하고 일부라도 받아 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기에 심인성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절반이라도 돈을 건질 수 있다면 감지덕지感之德之일 텐데요. 그리고 작업을 위해서 여기저기 뿌리는 걸 감안하면 그게 다 제 몫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그게 아깝다고 한다면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혁권이 딱 잘라 이야기를 하자 상대가 황급히 그를 달랬다.
“아, 아니오.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소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제시한 조건들을 모두 들어주는 겁니까?”
“내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일당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소.”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살짝 목을 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두정건설 외에 국내 업체가 리비아에 물려 있는 미수금을 전부 다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뜻밖의 이야기에 심인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부 발전소 건을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괜히 무리하는 거 아니오?”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이왕 하는 거 미수금을 한꺼번에 다 받아 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게 가능하겠소이까?”
우려 섞인 심인성의 시선에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 걸 하라고 저한테 일을 의뢰하는 것 아닙니까?”
한쪽 손으로 턱을 긁으면서 잠시 고심하던 심인성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좋소.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소이다.”
미수금을 받아 낼 가능성이 아주 낮은 상황이었기에 대부분의 기업들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때마침 노크를 하며 여종업원이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대화를 마무리 짓고 식사를 했다.
“흠. 그러니까 이게 요구한 조건이라는 거지?”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덮어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도병진 3차장이 묻자 오른쪽 소파에 앉은 심인성이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는 느릿하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도병진 3차장을 보면서 심인성이 말을 이었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저희나 두정건설 모두 절반이라도 받아 내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도병진 3차장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순순히 수긍했다.
“그리고 일을 진행하는데 누가 옆에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나하나 간섭을 한다면 저 같아도 짜증이 날 테니까요. 더군다나 상대가 별다른 도움도 되지 않고 잔소리만 해 댄다면 더욱 귀찮겠지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니, 이봐. 그래도 명색이 한국 최고의 정보기관인데 자기 비하가 너무 심한 것 같군.”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도병진 3차장이 말하자 심인성은 바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헛 나왔습니다.”
“뭐, 어찌 됐건 여기까진 나도 동의하겠는데, 마지막에 이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군.”
등받이에서 몸을 뗀 도병진 3차장이 오른쪽 집게손가락으로 서류 한곳을 툭툭 두드렸다.
굳이 확인을 하지 않아도 뭘 지적하는 건지 심인성은 알 수 있었다.
“저도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만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서 딱히 손해 볼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이대로 떼이게 생긴 미수금을 받아 낼 수 있으니 해당 기업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겠지요.”
“그건 돈을 제대로 받아 냈을 때 일이고. 괜히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니냐, 이거야.”
“저도 넌지시 그렇게 우려를 표시 했습니다만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자신 있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러자 도병진 3차장이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만들어 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이걸 다 받아 낼 수 있다고?”
절반만 받는다고 해도 조 단위가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그걸 정부도 아니고 일개 밀수 상인에 불과한 자가 해결할 수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제아무리 리비아에 상당한 끈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눈가를 찌푸린 채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모습에 상관의 생각을 읽은 심인성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두정건설 외에 다른 미수금을 일부라도 회수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심인성의 이야기대로 받아 내면 좋고 실패하더라도 어차피 본전이니 딱히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잠시 고심을 한 도병진 3차장은 이내 반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끄며 결정을 내렸다.
“이대로 진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김혁권 이 친구 생각보다 배짱이 큰 것 같군.”
다시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도병진 3차장이 툭 던진 말에 심인성이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중에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군.”
“자리를 만들어 볼까요?”
심인성의 말에 도병진 3차장은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었다.
“이번 일을 처리하는 것이 급하니까 다음으로 미뤄 둬.”
“예.”
약간의 여지를 남겨 두는 걸 보고 도병진 3차장이 혁권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같은 시각, 김종원 회장의 장남이자 태일건설 사장직을 맡고 있는 김성균은 등을 구부정하게 숙이면서 들어오는 손종환 상무를 보며 의자에 앉은 채로 등을 바로 폈다.
“리비아 미수 채권을 구매하겠다는 곳이 나타났다고?”
“그렇습니다. 판매 대행을 의뢰한 증권사를 통해서 매입 의향을 전해 왔습니다.”
“그럼 바로 처분해 버리지 않고 뭘 망설이는 거야?”
국내 건설 활황을 타고 큰 성과를 올리고 있는 태일건설의 발목을 잡는 것이 바로 리비아 미수 채권이었기에, 김성균 사장의 얼굴에는 어서 털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것이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니?”
김성균 사장이 눈을 치켜뜨며 쳐다보자 손종환 상무는 쭈뼛거리면서 이야기를 했다.
“저희가 내놓은 가격보다 낮은 30만 달러에 인수를 하겠다고 합니다.”
“뭐야!”
이야기를 들은 김성균 사장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정크Junk로 분류될 만큼 가치가 낮은 채권이라지만 1,000만 달러짜리를 액면가의 이십분의 일도 안 되는 가격에 사겠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허어. 아주 날로 먹으려고 작정을 했군.”
“최소 50만 달러를 받아야 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제시한 금액 이상은 절대 줄 수 없다며 협상 자체를 거절했습니다.”
“30만 달러라…….”
팔짱을 낀 채 김성균 사장은 상대가 제시한 액수를 되뇌다가 시선을 들어 책상 앞에 서 있는 손종환 상무를 봤다.
“채권을 매입하겠다는 곳이 어디야?”
“블랙골드라는 투자회사입니다.”
김성균 사장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처음 들어 보는 곳이군.”
그러자 손종환 상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얼른 이야기했다.
“버뮤다에 거점을 두고 있는 헤지펀드Hedge Fund라고 합니다.”
“헤지펀드라면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들일 텐데, 이 채권에 왜 관심을 보이는 거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아 가격이 무려 이십분의 일로 떨어진 최하급의 채권이었다.
그런 부실 채권에 헤지펀드가 관심을 보인다고 하자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원래 NPL(Non Performing Loan)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헤지펀드들이 하는 일이, 회수가 어려운 채권을 최대한 낮은 가격에 사들였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권리를 행사해서 이득을 챙기는 것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1,000만 달러짜리 채권을 고작 30만 달러에 사 간다면 거저나 다름없지요.”
“리비아에서 미수금을 정산해 줄 가능성은 없겠지?”
“희박하다고 보시는 것이 맞을 겁니다.”
미수금을 회수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써 봤지만 실패했기에 김성균 사장은 이내 마음 한구석에서 일던 의구심을 떨쳐 버렸다.
“30만 달러에 넘겨 버려.”
“그래도 되겠습니까?”
“계속 가지고 있어 봤자 짐만 될 뿐이잖아. 가뜩이나 이집트에서도 공사 대금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아서 골치 아픈데 이거라도 정리를 해 버려야지. 그리고 어차피 50만이나 30만 달러나 그게 그거잖아.”
심드렁하게 내뱉는 말에 손종환 상무는 군말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시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이번 결정을 얼마 있지 않아서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라고 이때까지만 해도 김성균 사장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