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26
326
“나 저렇게 예쁜 사람 처음 봤다니까. 우리 지점에 자주 오시는 손님인가?”
“아, 안타깝다. 창구에 오면 이야기 나눌 수 있을 줄 알고 기대했는데.”
“그러게. 맞다. 어디 본 얼굴이다 했더니 잡지에 가끔씩 나오는 모델 아냐.”
“정말?”
“그래 지난번 지점에 비치된 잡지에서 본 것 같아.”
“어쩐지 얼굴이 일반인이 아닐 것 같더라.”
같은 여자라고 해도 눈이 확 뜨일 만큼 탁월한 미모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단연코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창구에 앉아 고객을 상대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 은행원이라 다음에 오시면 화장품을 뭘 쓰는지, 입은 코트는 어디 브랜드 건지 궁금하다는 얘기가 주로 나왔으나 뒤에 있던 남성들은 꿈이라도 꾼 것 같은 얼굴로 잠시 멍해 있다가 금방 정신을 차리곤 벌게진 얼굴로 설레어했다.
그중에서도 다른 볼일 있는 척하면서 슬쩍 소현의 옆을 지나갔던 남자 은행원은 샴푸 냄새가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다며 황홀해했는데, 다른 이들은 자기도 용기를 내 볼 걸 그랬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하기야 직장에서 고객에게 사적인 일로 말을 걸다가 잘못하면 잘릴 수도 있으니 설령 그럴 기회가 있더라도 쉽게 시도하진 못했겠지만.
한편 은행 지점 입구에 설치된 자동문을 빠져나온 소현은 시원한 바람을 맨 얼굴로 맞으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 하고 스마트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가 멈칫했다.
“으음, 지금이 낮이면 거긴 밤이려나.”
한밤중이면 소현이 보낸 문자 소리 때문에 잠을 깨울 수도 있으니 약간 주저되었다.
결국 소현은 주저하다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뭐, 나중에 연락하면 되지.”
계속 외국에 있을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다시 한국에 돌아올 거니까.
그때가 되면 약속했던 대로 멋진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소현은 생각했다.
역시 지갑에 여윳돈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이번엔 소현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비싼 음식을 고를 예정이었다.
기왕이면 멋진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이 좋겠다.
함께 식사를 하고 나면 호텔 스카이라운지 바 같은데 가서 나란히 칵테일을 마시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소현의 계획이었다.
즉흥적으로 떠올린 계획이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썩 괜찮은 코스라고 생각되었다.
소현은 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찬 바람을 맞아 상기된 얼굴로 집을 향하는 발길을 서둘렀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주 샬럿Charlotte.
혁권은 델타 항공 여객기를 타고 샬럿 시로 향했다.
이반과 아넷사(?)가 워싱턴에 위치한 덜레스 공항에 있었지만, 미국 내에서는 국내선 항공편이 잘 갖춰져 있었기에 그냥 일반 여객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사실 이건 핑계였고 이반이 조종하는 수송기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려는 마음이 컸다.
확실히 화물을 운송하는 데 중심을 둬서 편의성이라고는 극악에 가까운 수송기와 달리, 여객기를 타자 너무나도 안락하고 편안하게 비행을 할 수 있었다.
일등석 창가에 앉은 혁권은 푹신한 시트에 등을 기댄 채 기내 서비스로 제공된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송기가 아니라 전용기를 매입할 걸 그랬군.”
마치 낡은 화물 트럭처럼 덜컹거리는 시끄러운 수송기와 달리, 지금 일행이 타고 있는 보잉 767 여객기는 마치 리무진을 탄 것 같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말이 고개를 돌리면서 묻자 혁권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
그러자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던 자말은 이내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바로 했다.
바로 뒷자리에는 경호원으로 따라온 하킴과 알아바디가 앉아 있었는데, 미국의 엄격한 검열 때문에 총기는 물론이고 호신용 3단봉마저 몸에 지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런지 약간 불안한 모습이었다.
하긴 항상 몸에서 무기를 떼어 놓지 않다가 아무것도 없이 있으려니 마치 발가벗은 채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행을 하는 내내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주위를 경계하며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특히나 바로 앞에 트리폴리에서 저격을 당했었기에 일행은 더욱 예민한 태도를 보였다.
워싱턴에서 샬럿까지 1시간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지 장거리 비행이었다면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머리 위에 있는 작은 스피커에서 기내 방송이 나와 목적지인 샬럿 더글러스 국제공항에 잠시 뒤 착륙한다는 걸 알렸다.
좌석 벨트 사인에 불이 들어와 있는 가운데 둥근 방풍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얀 구름 아래로 샬럿 시의 모습이 장난감처럼 작게 내려다보였다.
한국 사람들한테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아 조금 생소한 곳이었지만, 미국에서 열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였다.
단순히 인구만 많은 것이 아니라 뉴욕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금융도시였는데, 웰스 파고의 동부 지역 본사와 이번에 그가 찾아가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본사가 바로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나스카 명예의 전당이 세워져 있고 NBA와 NFL 등 유명 프로 스포츠 팀의 연고지이기도 했다.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 여객기는 얼마 있지 않아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둔중한 충격과 함께 지상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온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호텔 리무진을 타고 곧장 샬롯 시내로 들어갔다.
샬롯은 군데군데 보이는 녹음綠陰과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마천루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였다.
리무진이 도착한 곳은 시내에 있는 한 특급 호텔이었다.
현대적인 느낌의 호텔과 잘 어울리는 깔끔한 인상을 가진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그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짐을 풀었다.
침실 3개에 욕실이 무려 4개나 되고 별도의 다이닝 룸과 간단하게 업무를 볼 수 있는 집기들이 갖춰진 서재도 있었다.
면적만 50평이 훌쩍 넘어갈 정도였는데, 하루 숙박료만 4천 달러, 한화로 거의 500만 원 가까이 됐다.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지만 안전과 비즈니스를 위해서 일반 객실과 완전히 분리된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을 이용했다.
발코니로 나가면 멋진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다 들어왔지만, 저격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하킴이 다가가 제일 먼저 두꺼운 커튼을 쳐서 실내를 가렸다.
그러자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었으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혁권도 큰 거래를 앞두고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는 건 바라지 않았기에 별다른 말 없이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며 소파에 앉았다.
하킴과 알아바디가 수상한 것이 없는지 객실 이곳저곳을 확인하고 있을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부르르 떨리며 진동이 왔다.
액정에 아무런 번호도 찍히지 않는 걸 확인한 혁권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여보세요.”
-지금쯤 호텔에 도착했겠군.
무겁게 깔린 샌더슨의 목소리에 혁권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경 써 준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소.”
알링턴에서 만난 이후 뒤에 계속 꼬리가 붙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당히 귀찮았지만 당장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미국 내에 있는 동안은 CIA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기에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샌더슨 역시 상대가 감시를 눈치챌 거라 예상했는지 크게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은행 경영진에 협조를 구하기는 했지만, 아직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확답을 한 건 아니니까 재주껏 잘 구슬려야 될 거야.
혁권은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을 받았다.
“역시 법적 책임 문제 때문에 망설이는 거요?”
-섣불리 돈을 내줬다가 나중에 법적 분쟁이라도 벌어지면 골치 아파지는 건 은행일 테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어.
심드렁하게 내뱉는 이야기에 이럴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혁권은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닳고 닳은 능구렁이 같은 놈들이니까 제대로 준비해 가는 것이 좋을 거야.
“염려 마시오.”
스마트폰 너머에선 잠시 답이 없었다.
-이번에도 엉뚱한 짓을 하면…….
“흠?”
-그땐 가만히 안 둘 테니까 알아서 처신하도록 해.
사뭇 살기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마 저번의 그 일로 단단히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혁권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얄궂은 표정을 지었다.
통화 중이라 샌더슨이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일 정도로 상대의 속을 긁는 얼굴이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요.”
-흥. 두고 보도록 하지.
그러곤 인사도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혁권은 스마트폰을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곤 기지개를 펴듯이 몸을 쭉 늘어뜨리며 양 다리를 탁자에 턱하니 올렸다.
저녁 무렵.
벨소리에 알아바디가 객실 문을 열자 복도에 L&S코프레이션 임원인 스텐저가 일행 두 명과 함께 서 있었다.
소파에 앉아 태블릿PC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던 혁권은 스텐저 변호사와 일행을 보곤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수제 양복에 구두를 신고 한쪽 손에 역시나 명품 가죽 서류 가방을 든 스텐저 변호사는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으면서 그와 악수를 나눴다.
이미 몇 차례 의뢰를 맡아서 처리하며 상당한 수익을 올리게 해 준 혁권은 로펌의 VIP 고객 중에 하나였다.
거기다가 이번에 또 최소 수천만 달러의 수임료를 챙길 수 있는 큰 건을 맡겨 왔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건 당연했다.
가볍게 그와 악수를 나눈 스텐저는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려 함께 온 일행을 소개해 줬다.
“저희 로펌의 변호사인 코미와 호로위츠입니다. 두 사람 다 미국에서 MBA(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과정을 졸업한 인재로, 채권 관련 업무에 아주 밝습니다. 특히 코미 이 친구는 회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자 20대 후반의 호리호리한 백인 사내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코미라고 합니다. 변호사님께서 칭찬을 과하게 해 주셔서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부족하지만 이번 일에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바로 이어서 나란히 서 있던 푸짐한 살집의 흑인 사내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호로위츠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존슨입니다. 이렇게 유능하신 분들이 오시니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하군요.”
아직 실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유능해 보이는 모습에 혁권은 스텐저가 제대로 준비를 해 온 것 같아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나눈 혁권은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그러시죠.”
탁자를 가운데 두고 거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자 알아바디가 한쪽에 있는 바BAR에서 음료를 가지고 와서 내려놨다.
스텐저가 작게 헛기침을 하곤 가지고 온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내 탁자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먼저 매입을 끝낸 채권 상황부터 확인해 보시지요.”
혁권이 서류철을 집어서 펼치고는 내용을 살펴보자 스텐저가 확인하기 쉽게 설명을 해 줬다.
“추가로 채권을 매입해서 모두 액면가 6억 5천만 달러의 물건을 확보했습니다. 소요된 매입 자금은 2,200만 달러입니다. 채권 종류와 원 소유자는 서류에 자세히 정리해 놨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액수와 종류가 다른 채권 목록이 A4 용지 한 장 가득 정리되어 있었는데, 공통점은 모두 카다피 정권에서 발행됐다는 것과 장기간 연체와 회수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불량 채권으로 분류된 것들이라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