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36
336
아마 지수가 소현이 입장이었다면 하루 종일 피곤함에 지쳤어도 청춘을 불태워야 하지 않겠냐며 밤에는 또 클럽에서 신나게 춤춰 댔을 것이다.
“셀카만 잔뜩 찍었네. 야, 근데 이 뒤에 찍힌 애 어쩐지 낯이 익다.”
“어디, 나도 봐.”
도연이 지수가 가리킨 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손주아잖아, 채나영 시녀.”
“아아, 괜히 소현이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고 했던 걔?”
그제야 지수도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째려보는 눈빛 봐라. 드라마에 나오는 악녀가 따로 없네.”
“나는 얼굴 예쁘장하게 생겨서 꽤 좋아했는데, 소현이한테 얘기 들은 후로는 걔가 광고하는 제품 다 불매하잖아.”
“헤헤, 사실은 나도 그래.”
지수가 웬일로 마음이 맞았냐며 씨익 웃었다.
“근데 다른 모델들이랑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네.”
“어. 그러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지수가 불쌍한 애를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소현이의 손을 꼭 맞잡았다.
“너 아직도 왕따당하고 사니?”
“풉!”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던 소현이 사례라도 걸린 것처럼 켁켁 기침을 토해 냈다.
“누, 누가 왕따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소현이 소리쳤다.
하지만 소현의 필사적인 부정도 소용없이, 두 사람은 어느새 불우 이웃을 대하는 것처럼 갑자기 상냥해진 태도로 토닥였다.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맞아. 우린 다 알고 있다고. 너 우리 만날 때마다 채나영 패거리가 괴롭힌다고 찡찡거렸잖아. 특히 그중에서도 행동대장 격인 손주아가 제일 재수 없다고 했으면서.”
“저번에 그리스에 갔을 땐 걔들이랑 또 마주치게 됐다고 가기 싫다며 떼를 쓰는 바람에 우리가 힘들었지.”
“응, 응.”
지수가 깊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건 그냥 해 본 말이지. 친구한테 투정 한두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얼씨구. 그리스에서 촬영 첫날에 네가 보낸 메시지만 해도 50건이 넘거든.”
지수의 정곡을 찌르는 발언에 소현은 제가 저지른 짓이 있는 지라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불퉁한 얼굴로 아메리카노만 쭉쭉 빨아 마셨다.
“정말 이해 안 된다니까. 너 정도면 어디 가도 예쁘단 소리 들을 인물인데, 왜 어딜 가나 꼭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 난 애들을 만나나 몰라. 동성에게서 질투를 사는 사주 같은 것도 있나?”
정 힘들면 굿이라도 한 번 해 보라면서 조언 같지도 않은 조언을 하는 지수에게 소현이 째릿, 날카로운 시선을 날렸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소현인 고등학교 때도 왕따라서 꽤 힘들었지.”
“뭐, 그건 일진한테 잘못 찍힌 거였잖아. 걔네들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했을 뿐이지, 사실은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애들도 많았어.”
“그랬어?”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소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야, 너 같으면 같은 반에 모델 지망생이 있다는데, 호기심이 안 생기겠어?”
“하긴 그 나이 여자애들은 그런 걸 동경하지.”
“미를 추구하는 건 본능이란 말씀. 여자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고. 아마 일진한테 찍히지만 않았어도 너 친구 엄청 많이 사귈 수 있었을 거야.”
“그런가.”
이미 지나간 과거지만 소현이 살짝 아쉬운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도연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근데 일진한테 왜 찍혔더라? 지수, 너는 알아?”
“어. 걔네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잘나가는 패거리였는데, 얼굴마담으로 소현이를 끌어들이고 싶어 했거든. 좀 반반한 애가 있으면 여러모로 편리하니까. 그래서 처음엔 일진 애들도 좋은 말로 꼬드기려고 했는데…….”
지수가 소현을 손가락으로 척 가리켰다.
“얘가 단칼에 거절해 버렸지, 뭐야.”
“그럼 어떡해. 난 일진 같은 거 싫단 말이야.”
그때는 모델로 데뷔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한창 바쁠 때였다.
어릴 때부터 바라던 꿈이 이뤄지기 직전인데, 일진이니 뭐니 하는 쓸데없는 것에 정신을 팔 겨를이 아니었다.
물론 과도한 다이어트 때문에 학교에 오면 지쳐서 잠만 자느라 성적도 같이 떨어졌지만.
“어쨌든 그래서 일진 애들이 자존심이 상한 거지. 성적도 평균이지, 도연이네처럼 집이 막 부자인 것도 아니지. 자기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주제에 콧대만 높아서 뭐라도 된 것처럼 군다고 뒤에서 험담이 장난 아니었어.”
“그거 어쩐지 익숙한 이야기다…….”
소현이 우울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때 일은 확실한 계기라도 있지, 채나영이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건 딱히 마음에 짚이는 것도 없어서 더욱 상대하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2학년 때 소현이가 모델 데뷔를 딱!”
지수가 씨익 웃으며 낄낄거렸다.
“걔들 완전 코가 납작해졌지. 그 전까지만 해도 소현이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이젠 정식으로 데뷔까지 했잖아. 혹시 연예인처럼 유명해지면 자기들만 손해니까 그때부턴 손 안 대더라.”
“그래도 시비만 안 걸었지, 교실에서 은근히 분위기를 잡는 바람에 소현이는 내내 친구 없는 채로 살았잖아.”
“응. 우리가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냐. 고마워해라.”
당시 지수는 좀 노는 축에 속하긴 했지만 학교에 출석만은 빠지지 않고 했고, 성적도 나무랄 데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에게 신뢰받았다.
게다가 활발한 성격 덕에 남자애들하고도 잘 어울려 다녀 여기저기 발이 넓은 지수에게 굳이 싸움을 걸려고 하는 일진은 없었고, 도연은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다.
한마디로 일진 애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두 사람만이 소현과 친해져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소리였다.
“그나저나 우리 다음엔 어디 갈래?”
한동안 고등학생 때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던 중 지수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냥 밥 먹고 헤어지는 건 재미없잖아. 클럽 가자, 클럽.”
“그래. 여자 친구가 없으면 애인이라도 사귀어. 맨날 심심하다고 쓸데없이 문자하지 말고.”
좀처럼 그런 말을 하지 않는 도연이조차 옆에서 부추기는 것을 보니 소현이 우울해 보이긴 한 모양이었다.
“필요 없거든.”
“헐. 남자가 싫다니.”
“그게 아니라 단순히 필요 없다는 거야.”
애매모호한 대답에 지수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도연이 헉, 하면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너 남자 생겼지!”
“뭐야? 이년아, 얼른 사실대로 불지 못할까!”
지수가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댈 기세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으. 그게, 정확히 사귀는 건 아니고 그냥 대충 그런 분위기랄까?”
“도연아, 얘가 뭐라는 거임?”
“나도 모르겠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라는 두 친구의 독촉에 소현은 결국 혁권의 이야기를 털어놓고야 말았다.
“시발, 너 염장 지르냐? 그게 사귀는 거지, 뭐야!”
지수가 레몬에이드에 들어 있던 얼음을 아그작 씹었다.
“데이트도 몇 번이나 했다면서. 너도 그 사람 좋아하고, 그쪽도 호감이 있는 게 확실하다며. 근데 왜 아직 확신을 못 해?”
“그치만 장난식으로 애인이라고는 불러도 확실하게 사귀자는 말을 안 했단 말이야.”
“그것 빼곤 다 했잖아.”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거니까. 마음 같아선 오빠가 확실하게 좋아한다고 고백해 줬으면 좋겠는데 예쁘다, 보고 싶단 말은 많이 하면서 그 말은 안 해 준다고.”
“흐음. 우리보다 훨씬 연상이라고 하니까 조금 걱정은 된다. 그냥 간만 보다가 뒤통수치는 경우도 있으니까.”
도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물은 잔뜩 받았지만…….”
“어, 그래? 뭔데?”
“이거. 목걸이랑 시계. 직업상 외국에 나갈 일이 많다는데 올 때마다 하나씩 사 주고 그래.”
선물 받은 뒤로 항상 몸에서 떼지 않고 다녔다.
일 때문에 바쁠 텐데도 생각해 주는 마음이 고맙고, 몸에 지니고 있으면 혁권이 함께 있는 것 같아서 든든했다.
“선물 고르는 센스는 있네.”
남자에게서 받는 선물엔 깐깐한 지수가 합격점을 내렸다.
“브랜드도 적당히 비싸면서 너무 명품급은 아닌 걸로 잘 골랐어.”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고급품엔 익숙한 도연도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사진 없어? 얼굴 좀 보자.”
“으응. 안 찍었는데.”
“크…… 아쉽다.”
지수가 역시 사람은 얼굴을 봐야 인성을 안다면서 한탄했다.
그러자 도연이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었다.
“그럼 불러내자.”
“엥?”
“어? 누굴?”
어리둥절해 있는 지수와 소현을 보고 도연이 이래서 니들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 혁권이란 사람이지.”
“오, 그거 좋다! 굿 아이디어!”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지수와 달리 소현은 엄청나게 당황했다.
“안 돼! 우리랑 다르게 오빠는 사업하는 사람이라 바쁘단 말이야. 게다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불러내는 것도 실례잖아.”
소현이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이미 계획까지 다 짜 놓고 있는 둘을 혼자서 막아 내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럼 다음에 꼭 약속 잡고 보기로 하는 거다.”
“그래. 설마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하는데 거절하겠어? 핑계대고 안 나오면 그거야말로 뒤가 구리다는 증거지.”
“니들 정말…….”
소현이 울상을 지었다.
“뭐, 우리도 급하게 보채는 건 아니니까.”
“시간 날 때 한번 보자는 거야.”
“하아. 일단 말은 해 볼게.”
대체 어떻게 해야 어색하지 않게 말을 꺼낼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앞이 막막했다.
소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끄응, 고뇌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제안을 거절했다고?”
엘리엇 매니지먼트 산하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의 이사인 스파이서가 검정색 가죽 의자에 기댄 채 고개를 들며 묻자 수석 매니저인 콘웨이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희와 손을 잡을 생각이 전혀 없다면서 딱 자르더군요.”
“아주 흥미롭군.”
스파이서는 재미있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살짝 위로 비틀어 올렸다.
앞에 있는 책상에는 대형 LCD모니터 3개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는데, 다양한 색깔의 그래프와 숫자가 전 세계 채권과 주식 시장 동향을 실시간으로 표시해 주고 있었다.
옆에는 아래층 딜링 룸Dealing Room에서 근무하는 트레이더들한테 바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어느 정도는 예측된 결과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반응이다, 이건가?”
시선을 받은 콘웨이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와 모종의 합의가 있다면 중간에 저희가 끼어드는 것이 껄끄러울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그 역시 같은 입장이었으면 당연히 똑같은 태도를 보였을 거였기에 스파이서는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소장에 나온 투자회사 이름이 뭐라고 했지?”
“HK 펀드입니다.”
“수십억 달러짜리 거래를 하는 걸 보면 아예 족보가 없는 놈들은 아닌 것 같고. 배후가 어디야?”
“버진 아일랜드에 주소를 둔 페이퍼 컴퍼니라는 건 확인됐습니다.”
“그렇겠지.”
탈세와 법적 제약을 피하기 위해 버진 아일랜드 같은 조세 회피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서 운영하는 건 해지펀드들이 흔히 쓰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
“이번에 재판을 맡은 홍콩의 L&S코퍼레이션에서 설립을 도와준 것까지 알아냈고, 조사를 계속 진행 중입니다.”
“처음부터 두 곳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거군.”
“예.”
L&S코퍼레이션이라면 스파이서도 이름을 들어 본 로펌이었다.
하지만 홍콩과 아시아 지역이 주 활동 무대인 L&S코퍼레이션이 이번 일에 끼어 있는 건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