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35
335
그러다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쪽에서 뭘 노리고 우리한테 접근하는 것 같습니까?”
엘리엇 매니지먼트 같은 헤지 펀드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움직일 리는 없었다.
분명 그들의 탐욕을 채워 줄 먹잇감을 발견했을 테고, 그것이 카다피 정권 시절 발행한 리비아 채권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스텐저 변호사의 입에서 예상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1차적인 목적은 이번 재판에 끼어들어서 자신들이 확보한 채권을 현금화시키려는 것일 겁니다.
해지펀드의 가장 큰 목적은 돈일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현재 재판을 벌이려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 은행에는 동결된 카다피 정권의 자금이 무려 100억 달러나 계좌에 들어가 있으니 지급해 줄 돈도 충분했다.
문제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 경영진과의 합의를 통해 이쪽에서 요구한 채권액 이외의 금액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지불 요구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거였다.
물론 이건 혁권한테만 해당되는 일이었으나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재판에 함께 참여해서 채권 지급을 요구한다면 합의를 어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채권자들이 뱅크 오브 아메리카를 타깃으로 삼아 지급 요구와 고소를 남발하는 걸 촉발시킬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부담감을 느낀 뱅크 오브 아메리카 측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며 이쪽과의 합의를 뒤집어 버릴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한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엘리엇 매니지먼트에서 지급을 요구할 채권액이 얼마라고 합니까?”
-저쪽에서 이야기를 한 건 1억 달러 정도입니다.
혁권은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한화로 1천억이 넘는 돈이니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엘리엇 매니지먼트 같은 거대 해치 펀드가 움직이기에는 뭔가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것밖에 안 된단 말입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스텐저 변호사의 말에 그는 눈을 반짝였다.
“숨겨진 꿍꿍이가 더 있다는 거군요?”
-제 생각에는 이번 재판을 통해서 판례Precedents를 만들려는 것 같습니다.
“판례라면……?”
-뱅크 오브 아메리카 같은 업계 1위의 거대 은행이 카다피 정권의 동결 자금으로 채권을 지급했다는 판례를 만들어 낸다면, 다른 금융 기관을 통해서도 비슷한 판결을 받아 낼 가능성이 높아지니까요.
“그런 거라면 굳이 이번 재판에 끼어들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자신들한테 유리한 판례를 원하는 거라면 그냥 재판을 지켜만 봐도 충분히 얻어 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냥 판례를 가져다가 쓰는 거하고 직접 판결을 받은 당사자가 되는 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저희와 뱅크 오브 아메리카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판을 만들고 지루한 법정 공방을 벌이기보다는 이쪽에 슬쩍 끼어들어서 필요한 것들을 챙기려는 속셈인 것이지요.
이제야 모든 것이 명확하게 이해가 됐다.
“한마디로 이쪽에서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와서 배를 채우겠다, 이거군요.”
-그거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흐음.”
그는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냥 무시해 버리기에는 하이에나 같은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존재가 계속 거슬렸다.
그렇다고 함부로 재판에 끼워 줬다가는 판 자체가 엎어져 버릴지도 몰랐다.
한참 머릿속으로 득실을 따져본 혁권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또 연락이 오면 함께하기 어렵겠다고 확실히 이야기를 해 주도록 하세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스텐저 변호사 역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그쪽하고 엮여서 우리한테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이번 재판에 기웃거리는 걸 알면 뱅크 오브 아메리카 측에서 몸을 사릴 수도 있으니까 혹시라도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일이 없게 신경 쓰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중간에 다른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혁권은 스마트폰을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뱉었다.
좀처럼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것이 왠지 이대로 조용히 안 넘어갈 거 같았다.
“아, 여기, 여기!”
소현이 커피숍에 들어서자마자 하이 톤에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1층의 창가 자리, 햇빛이 잘 들고 푹신한 소파와 쿠션이 있는 가장 안락한 위치의 4인용 소파를 여자 둘이 점거하고서 소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휴. 못 본 사이에 살이 더 빠진 거 같다?”
“우리 먼저 마실 거 시켰어. 너도 하나 주문해.”
소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양쪽에서 재잘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모델 일은 할 만하냐? 애가 날이 가면 갈수록 수척해져 가요.”
들어오는 모습을 위아래로 쫙 스캔하더니 대뜸 몸매 얘기부터 꺼내는 사람이 문지수.
소위 말하는 아나운서 스타일의 짧은 단발에 선명한 붉은 립스틱.
그리고 크림색 블라우스와 슬랙스로 멋을 낸 소현의 친구였다.
아무리 궂은 날씨여도 여자의 자존심은 하이힐이라며 항상 구두를 신고 다니는 지수는, 오늘도 버건디 색으로 반짝거리는 예쁜 신발을 신고 늘씬한 다리를 도도하게 꼬고 앉아 있었다.
“넌 왜 보자마자 시비야? 소현이 얘는 원래부터 말랐잖아.”
“아냐. 분명히 허리 사이즈가 1인치는 더 줄었을걸.”
내 눈은 속일 수 없다며 지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티가 나? 조금 살이 빠지긴 했는데…….”
“역시!”
지수가 테이블을 손으로 탁 치면서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비법이 뭐야. 1일 1식? 아니면 아침 공복 운동? 맞다, 너 발레랑 헬스도 꾸준히 다니지.”
“크게 뭐 한 건 없는데…….”
“크읏, 분하다!”
지수가 가슴에 총을 맞은 시늉을 하며 엎어졌다.
“제기랄. 나도 내일부터 요가할 거야.”
“그거 한다고 살 안 빠져.”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도연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소현이는 모델이잖아. 몸매가 곧 돈이 되는 업계인데 우리 같은 일반인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도연은 휘핑이 잔뜩 올라간 바닐라 라떼를 홀짝이면서 지식인다운 논리를 펼쳤다.
낯을 가려 첫인상은 항상 차갑고 도도할 것 같다는 말을 듣지만 은근히 소녀 감성을 가진 소현, 직설적인 말투에 도회적이면서 세련된 이미지를 가진 지수.
그리고 말랑한 순두부 같은 얼굴이라 세 명 중에선 가장 말을 걸기 쉬운 이미지지만 사실은 제일 까칠한 민도연.
이 셋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이었다.
채나영 패거리 때문에 숨 막힐 것 같은 모델 생활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소현이 마음 놓고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는 소중한 친구들이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진로가 갈라진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서 오늘처럼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기로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래도오~.”
부럽잖아, 하면서 오징어처럼 팔다리를 꼬아 대는 지수를 도연이 제대로 앉으라고 등을 찰싹 때렸다.
“쟨 그야말로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살 걸. 네가 괜히 따라 했다간 이틀도 못 하고 나가떨어질 거다.”
사실 그 말도 틀린 건 아니라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소현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매일 그러고 사는 건 아니야. 나도 사람이니까 가끔은 외식도 하고 그러는걸.”
“그래도 평소엔 야채랑 과일만 깨작거릴 거 아냐, 이 초식동물아.”
“맞아. 소현이 너 고등학교 때도 도시락이 완전 풀밭이었지.”
세 사람이 나온 학교는 엄연히 급식이 제공되었지만 매일 꿋꿋하게 도시락을 싸 오던 소현이 새삼 떠오르는 듯 지수와 도연이 아련한 눈빛을 했다.
“나 그거 보고 완전 기겁했잖아. 반찬 훔쳐 가려고 뒤에서 젓가락으로 기습했는데 세상에 죄다 초록색이야! 고기가 없어! 이런 비극이?”
한때 연극부 출신답게 지수가 또박또박 잘 들리는 발성으로 매우 슬픈 표정을 하곤 고개를 흔들자, 도연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며 장단을 맞췄다.
“아, 몰라. 먹는 얘기 그만하고 서로 근황 보고나 하자. 다들 잘 지냈어?”
“나는 항상 똑같지, 뭐. 학교 다니고, 스펙 쌓고…… 시벌, 저번 학기 기말 망친 게 다시 생각나네.”
“그래도 A 받았다며?”
“A+가 목표였단 말이야.”
“대단하다. 지수 넌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하더니 지금도 여전하구나.”
소현의 칭찬에 지수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아나운서가 되려면 지금부터 학점 관리는 필수니까. 원서 보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학벌이랑 점수로 거르는 거 잘 알잖아.”
“어디든 안 그렇겠어.”
취직을 걱정하는 것은 도연도 마찬가지인지 대꾸하는 목소리에서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모델로 데뷔해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한 소현과 달리 다른 두 사람은 대학교에 진학해서 전공 공부에 열심이었다.
지수는 방송신문학과.
아나운서가 하고 싶어서 골랐다는 말에 처음엔 놀랐지만,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고 강심장을 가진 지수에게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도연이는?”
“음.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아, 얼마 전에 새 그랜드 피아노를 샀어. 조율을 하는 게 힘들었지만 소리가 엄청 예뻐. 너희들 나중에 시간되면 한번 들으러 와.”
“네 방에 원래 있던 건 어쩌고?”
“중고로 처분했지. 덕분에 용돈도 쏠쏠하게 챙겼어.”
“와, 좋겠다.”
지수의 감탄에 도연이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연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비롯한 악기들을 음악 학원에 다니며 배웠는데, 결국 최종적으로 고른 것은 피아노였다.
이유는 연주할 때 입는 드레스가 예뻐서.
이상한 데 꽂히는 경향이 있는 도연이다운 이유였지만, 어릴 때부터 배운 실력도 있고 해서 적성에 맞는지 나름 무난하게 학교생활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이제 내 차례인가, 하면서 소현이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여러분 주목. 중대 발표가 있음.”
“뭔데.”
“헐. 애인 생겼냐? 배신자!”
제각각인 반응 앞에서 소현이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 패션 화보 찍었다!”
“오오, 정말?”
“보여 줘, 보여 줘!”
생각했던 대로 열렬한 환호성이 터지자 소현이 스마트폰을 꺼내 갤러리에 저장해 두었던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이거야.”
“음~ 괜찮은데.”
“예쁘게 잘 나왔다.”
도연과 지수는 머리를 나란히 맞대고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들을 휙휙 넘기며 친구가 조금씩 꿈을 이루어 나가는 걸 축하했다.
“너 이렇게 단독 화보 찍은 거 거의 처음이잖아. 그것도 유명 메이커.”
“소현이도 이제 슬슬 유명해질 때가 됐다는 거지.”
“뭐야? 그럼 나 미리 사인 받아 놔야 돼?”
“어.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주라.”
언제나처럼 실없는 대화를 나누던 도중 지수가 어, 하고 손가락을 멈췄다.
“패션 위크도 갔었어? 여기 어디야 서울 아닌 것 같은데.”
“응, 부산. 추워서 구경은 많이 못했지만 바다 냄새는 맡고 왔지.”
“부산까지 가서 짠 내만 맡고 왔냐? 애잔하다, 애잔해.”
지수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