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37
337
“일본이나 화교 자본이 연관되어 있는지도 모르겠군.”
콘웨이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을 받았다.
“그럴 수도 있지만 한국 쪽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이라고?”
“예.”
이야기를 들은 스파이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국이 꽤 큰 금융 시장인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과감한 투자를 하는 해지 펀드는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기는 한데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지급 요구를 한 채권 상당수가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 들이 보유하고 있던 겁니다.”
“액수가 얼마나 되는데?”
“35억 달러가 조금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뭔가 냄새가 나는군.”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이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거 같습니다.”
“자네 생각이 맞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장 규모하고 달리 황당할 정도로 아마추어 같았던 한국 금융기관들이 이런 식의 투자를 하다니 대단한 일이지 않습니까.”
콘웨이의 이야기에 스파이서는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20여 년 전에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혹독한 수업을 치렀는데 발전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하긴 그 말씀도 맞군요. 당시에 아주 재미가 쏠쏠했다면서요?”
눈을 반짝이면서 관심을 보이자 스파이서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멋진 무용담을 늘어놓듯 이야기를 했다.
“나도 당시에는 햇병아리 트레이드여서 직접 작업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대단했지. 수십, 수백억 달러의 자산 가치를 지닌 한국 회사와 은행 들이 얼마 안 되는 단기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줄줄이 도산하고 한국인들은 패닉에 빠져서 알짜 주식을 헐값에 마구 집어 던졌지. 당시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 전체가 말 그대로 혼란 그 자체였어.”
스파이서는 얼굴 가득 탐욕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외국 투기 세력의 진입을 가로막는 온갖 규제들이 많았지만 국가 부도에 직면한 상태에서 IMF가 생명줄 같은 달러 보따리를 한 손에 들고 협박을 하자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빗장을 열어젖혔지. 그 뒤로는 따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도 짐작이 되겠지?”
“승자들의 파티가 시작됐겠군요.”
“빙고!”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낸 스파이서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M&A는 물론이고 부동산에 채권까지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닥치는 대로 다 쓸어 담았지. 그때 한국의 알짜배기 자산들은 외국 투자자한테 다 넘어가 버렸어. 당시에 우리 회사도 아주 짭짤하게 재미를 봤지.”
“양털 깎기를 제대로 했군요.”
콘웨이의 말에 스파이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맞아. 그때 이후로 한국은 우리 같은 헤지 펀드들의 현금 인출기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지.”
실제로 IMF 사태 이후 금융규제가 대폭 완화되면서 한국은 외국 투자자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시장을 쥐락펴락 가지고 노는 놀이터로 전락해 버렸다.
오죽했으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시장이 안 좋아지면 제일 먼저 달러가 대량 유출되며 타격을 받는 곳이 바로 한국이었다.
“저쪽에서 저희 제안을 거부했는데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다시 접촉을 해 봐야지.”
“저희가 끼어드는 걸 상대편에서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왠지 불만스러워하는 모습에 스파이서는 몸을 뒤로 기댄 채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리면서 말했다.
“우리 같은 해지 펀드의 가장 큰 미덕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객의 돈을 크게 불려 주는 것이지 않습니까.”
“맞아. 그렇다면 쉽고 빠르게 이득을 취할 방법이 있다면 그걸 선택하는 것이 맞는 거 아니겠어.”
“그게 이번 재판에 합류하는 거다, 이 말씀이군요.”
“처음에 세워 둔 계획대로 헐값에 사들인 채권을 묻어 두고 리비아 정세가 안정되길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현금화시킬 방법이 있는데 그럴 필요는 없지 않겠어.”
혁권의 짐작과 달리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에서는 장기적인 투자로 리비아 정부의 불량 채권을 매입한 거였다.
“그런 거라면 저희도 저쪽과 똑같은 방법을 써서 동결되어 있는 카다피 비자금으로 채권 지불 명령을 받아 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들은 스파이서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가 속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힘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까도 이야기했다시피 쉬운 길이 있는데 가시밭길을 걸어갈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어.”
“최소한의 투자로 가장 큰 이득을 얻는 것이 목표다, 이 말씀이지요.”
“그렇지.”
“알겠습니다. 다시 접촉을 해 보도록 하죠.”
“L&S코퍼레이션은 어차피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대리인일 뿐이니까, 이번에는 뒤에 있는 진짜 주인공을 찾아서 직접 대화를 해 보도록 해.”
“그러지요.”
“참. 추가로 채권을 매입하는 건 어떻게 됐어?”
스파이서의 물음에 콘웨이가 머리를 가볍게 내저었다.
“시장에 나와 있는 매물이 전혀 없어서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스파이서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벌써 소문이 퍼진 모양이군.”
“이번 고소로 채권을 회수할 수 가능성이 보이자 다들 손에 꽉 움켜쥐고 내놓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손실 처리를 하려던 채권을 온전하게 회수할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헐값에 파는 멍청이는 없을 터였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 스파이서가 말했다.
“채권을 더 끌어 모았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군.”
“다른 쪽에서 뱅크 오브 아메리카를 상대로 고소를 걸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렇지.”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러웠는지 몰랐다.
스파이서 역시 이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들 못지않는 유능한 인력과 자금을 갖춘 거대 금융기관들을 상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데다 무엇보다 동결 자금은 정치적인 문제까지 끼어 있어서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일이 골치 아파지기 십상이었다.
거기다가 재판으로 가게 되면 최종 판결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한도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질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렵게 판결을 받아 낸다고 해도 요구한 액수를 전부 다 받아 낸다는 보장도 없었고, 패소를 당해 오히려 큰 손해를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던 건데 엉뚱한 곳에서 겁 없이 일을 벌였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판부에 집중 심리가 신청되고 그게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는 등 일사천리로 흘러가는 상황을 보고 뭔가 모종의 거래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슬쩍 한 발을 걸쳐 놓기 위해서 얼른 움직인 거였다.
처음이 어렵지 일단 한번 선례가 생기면 그다음부터는 일을 풀어 나가기가 한결 쉽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끼어들 타이밍을 놓칠지도 모르니까 가능한 한 서두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스파이서는 그동안 긁어모았던 리비아 정부 채권으로 벌어들일 수익을 떠올리며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 후, 소현의 머릿속은 꽤나 복잡해졌다.
지수는 학창 시절부터 인기가 많아 지금도 길거리를 걷다 보면 전화번호를 따려는 남자들이 끊이질 않고, 클럽 같은 데서도 항상 합석 신청이 들어와 귀찮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도연은 부유하게 자란 영향인지 양갓집 규수 같은 분위기가 흘러 어디서건 호감을 잘 사는 유형이다.
이렇다 보니 두 사람 다 연애는 남들 못지않게 해 봤고, 솔직히 말해 이 둘에 비하면 소현은 숙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남자에 관해서라면 혹독한 평가를 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두 친구가 혁권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이러쿵저러쿵 해 댈지 기대되면서도 살짝 두려운 심정이었다.
어차피 누군가를 사귄다면 친구들에게 소개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므로 한 번은 부딪쳐야 하는 일이겠지만, 혁권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 좀처럼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하아…….”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한숨에 혁권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왜 그래? 음식이 맛없어?”
고개만 끄떡이면 바로 일어나 딴 가게로 갈 기세였다.
이렇게 다정하고 착한 사람을 피에 굶주린 승냥이 떼에 내던져야 하다니.
소현은 양심을 콕콕 찌르는 죄책감에 결국 포크를 내려놓았다.
반도 다 먹지 못한 파스타는 소스를 이리저리 헤집은 흔적만 가득했다.
“혹시 몸이 안 좋은 거라면 집에 데려다줄게.”
편히 쉬는 게 낫지 않겠냐는 혁권의 말에 소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기…….”
“응, 말해 봐.”
요 며칠 계속 안색이 어두워서 안 그래도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잘됐다는 듯 본격적으로 들을 태도를 취하는 혁권에게 소현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저, 얼마 전에 친구들을 만났거든요. 근데…… 혁권 씨 얘길 했더니 자기들도 만나 보고 싶다 하더라고요.”
“어?”
“그렇게 무거운 자리는 아니고요! 그, 걔들도 그냥 가볍게 얼굴만 보자는 거예요. 처음엔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찍은 게 없어서……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갔는데! 혁권 씨가 부담되면 안 나가도 돼요. 어차피 여자들끼리 수다 떨다가 나온 말이니까.”
“괜찮아.”
“그렇죠, 갑자기 이런 얘기 들으면 싫겠……. 네?”
“난 또 뭐라고. 그것 때문에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혁권은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걱정하던 게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닫고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걸 가지고 뜸을 들여? 소현이 친구들이라면 당연히 만나 봐야지.”
“어? 정말요, 괜찮아요?”
“그럼. 드디어 친구들한테 날 소개시켜 줄 생각이 든 건가 싶어서 솔직히 좀 기쁘기도 한 걸.”
“아…….”
소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몸에 힘을 풀었다.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건지 어깨에 근육이 뭉쳐 딱딱해진 느낌이었다.
“으이구, 소심하기는…….”
혁권은 잠시 멈췄던 손을 들어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었다.
“설마 내가 소현이의 부탁을 거절하겠어?”
“그치만 왠지 친구들한테 평가받는 기분이 들잖아요, 이런 건. 그래서 싫어할 것 같았다고요…….”
우물우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소현이 변명했다.
“소현이랑 친구할 정도니까 분명 괜찮은 애들이겠지.”
“치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원래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거든.”
혁권은 식사에 가볍게 곁들인 와인으로 목을 축이면서 싱긋 웃어 보였다.
어쨌든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소현은 그날 밤 혁권과 헤어진 뒤 바로 지수와 도연에게 문자를 보내 오케이 사인을 받아 냈다고 연락했다.
-시원시원해서 맘에 드네. 그럼 어디서 볼래?
-처음 만나는 거니까 식사까지는 좀 부담스럽고, 그냥 카페에서 보자. 내가 괜찮은 가게를 알아.
-그럼 장소 섭외는 도연이한테 맡길게. 후후 간만에 힘 좀 주고 가야겠는걸.
-지수 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에이,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소현이 너보단 우리가 연애를 더 많이 해 봤으니까 믿고 맡겨. 둘이서 네 예비 남친을 샅샅이 해부해 줄 테니까.
-그래. 남자에 관해선 우리가 전문가지.
-그게 제일 걱정된다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좌절하는 모습의 이모티콘을 올린 소현은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글자들을 보면서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진심으로 친구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한 치도 예상이 안 가는 게 제일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