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41
341
부산 신항 부두.
넓은 부두 야적장에는 갓 공장에서 나온 신차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한 채 한 대씩 차례대로 커다란 운반선 안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전부 이번에 혁권이 매입해서 이란으로 가져가는 차량들이었는데, 운반선 안에는 인천에서 먼저 선적한 중고 버스와 트럭 그리고 자동차 부품 들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야적장에 도착하자 며칠 앞서 부산에 내려와 있던 홍선호 부장이 S모터스 직원과 함께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부산까지 내려와서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홍선호 부장은 옆에 서 있는 S모터스 직원을 소개해 줬다.
“선적을 돕기 위해서 S모터스에서 나온 조준형 과장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준형이라고 합니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조준형은 서글서글한 눈매에 인상이 좋게 생긴 사내였다.
“김혁권이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추가 수출 물량이 있을 거라고 하던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거래가 잘 끝나면 고려해 보도록 하겠소.”
어차피 물건을 구매하는 이쪽이 갑이었기에 혁권은 괜히 먼저 서두르지 않고 여운을 주면서 상대가 알아서 기도록 만들었다.
“특별히 신경을 써서 차량을 준비했으니 거친 사막에서 험하게 굴리더라도 10년은 큰 고장 없이 거뜬할 겁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혁권도 회사에 다닐 때 바이어들을 상대하면서 그렇게 많이 행동했기에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다.
“선적은 오늘 안에 다 끝나는 건가?”
막 후방 램프를 통해 운반선으로 올라가는 차량을 보면서 혁권이 묻자 홍선호 부장이 얼른 대답했다.
“오후까지 작업을 다 끝내고 내일 날이 밝자마자 출항하는 걸로 예정이 되어 있습니다.”
“움카스르 항까지 닷새가 걸린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움카스르는 이라크에서 가장 큰 항구이자 유일하게 제대로 된 수출입 부두를 갖춘 곳으로 페르시아 만과 접해 있고 작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쿠웨이트와 국경을 마주 보고 있었다.
원래는 이란으로 곧장 가져가려고 했지만 현지 상황이 좋지 않은 데다 수입 자동차에 이란 정부에서 중과세를 부과하고 있어 그걸 피하기 위해 우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라크 움카스르 항구로 차량을 운송해 가면 하즈사피 쪽에서 사람을 보내 인수하는 걸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현지에서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니까 점검을 확실히 하도록 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준형 과장은 한쪽에 서서 연신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선적 작업을 둘러보는 혁권의 눈치를 살폈다.
혁권이 오기 전에 이번 거래를 진행하면서 많이 친해진 홍선호 부장이 잘 만하면 매달 이만한 수량의 차량을 매입할 수도 있다고 슬쩍 귀띔을 해 줬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수백 대의 차량을 매달 판매한다면 상당한 실적이 아닐 수 없었다.
본사 직원이었기에 영업소 사원들처럼 수당이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큰 실적을 올린다면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 때문인지 혁권 작업 현장을 다 살펴보자 슬쩍 말을 건넸다.
“점심시간인데 함께 식사를 하러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시계를 확인하자 어느새 정오가 다 되어 있었다.
접대를 하려는 걸 알았지만 S모터스의 차량과 옵션 제공에 꽤 만족해하고 있었기에 혁권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럽시다.”
반색을 한 조준형 과장은 행여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말을 받았다.
“근처에 회를 기가 막히게 하는 곳이 있습니다. 부산까지 내려오셨는데 회 한 접시를 드셔야지요.”
머리를 끄덕이며 혁권이 막 걸음을 떼려고 할 때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벨이 울렸다.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혁권은 그 자리에 서서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보스, 저 자말입니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에 혁권은 본능적으로 뭔가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테네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게 아니고 압둘라흐만이 리야드에서 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조직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그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리야드라면 사우디아라비아를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하킴이 홍선호 부장에게 슬쩍 눈짓을 하면서 영어로 말했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으니 먼저 가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홍선호 부장은 그 말을 듣고는 조준형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도록 하죠. 자, 우린 차에서 기다리십시다.”
“아. 뭐, 그러지요.”
홍선호 부장이 조준형을 데리고 멀어지는 사이 하킴은 자연스럽게 몸으로 시야를 가렸다.
혁권은 흘긋 곁눈질을 하고선 이내 통화에 집중했다.
지금까지 후견인처럼 그를 많이 도와줬던 압둘라흐만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혁권은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습격을 당해 함께 있던 경호원이 여럿 죽고 본인도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위중한 상태인 거야?”
-총에 맞았다는 것만 알고 다른 건 정보가 없습니다.
“흐음.”
혁권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조직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보스인 압둘라흐만의 상태를 감추려고 할 테니 쉽게 알아낼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따라다니는 경호원이 적지 않을 텐데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거야?”
거물인 만큼 원한을 가지고 있거나 적대하는 세력이 많았기에 압둘라흐만은 항상 10명 이상의 무장 경호원들과 함께 다녔다.
-보안이 잘 갖춰져 있는 호텔 안이라 방심한 모양입니다.
“쯧.”
작은 방심으로 인해서 치명적인 결과가 나온 것에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경호원들이 있는 상태에서 습격을 가해 압둘라흐만한테 중상을 입혔다는 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나섰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혁권은 이마에 깊은 주름살을 만들면서 물었다.
“일을 벌인 배후가 어디야?”
-그것 역시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압둘라흐만과 경쟁 관계에 있는 세력 중 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번 일이 그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바로 알려 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저 그리고 보스…….
“더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해 봐.”
-이참에 경호를 좀 더 강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돼.”
-그리 가볍게 생각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 일도 있고 이미 몇 차례 보스를 노린 습격 시도가 있었지 않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기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으나 언제까지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혁권의 눈가가 한순간 움찔거렸다.
윗사람한테 하는 말 치고는 조금 도를 넘은 발언이 아닌가.
굳이 조언을 청한 적도 없는데 훈계와도 같은 충고에 그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으나 이내 치켜 올라갔던 눈썹이 살며시 누그러졌다.
생각해 보면 자말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건방지다고 크게 화를 냈을 일이었지만, 혁권은 특유의 유연한 사고를 발휘해 금방 기분을 전환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럼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겁니까?
“백성균이 합류하면 경호원 숫자가 셋으로 늘어나니까 그렇게 다니는 걸로 하지.”
자말 입장에서 그것 가지고는 부족한 감이 있었으나 더 이야기를 하면 그마저도 안 할지 몰랐기에 일단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통화를 끝내자 옆을 지키고 있던 하킴이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러자 혁권은 스마트 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압둘라흐만이 습격을 당했다는군.”
“……!”
놀랐는지 하킴의 눈이 커졌다.
“나한테까지 불똥이 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 경호에 신경을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굳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하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혁권은 차량을 세워둔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한테로 걸음을 옮겼다.
예전 같았으면 운반선이 출항하는 것까지 봤겠지만 홍선호 부장한테 일을 일임한 혁권은 그날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뒷좌석에 탄 혁권은 아파트 경비실 앞에 어머니가 같은 동 아주머니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곤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시지? 여기서 세워.”
“옛.”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 하킴을 혁권이 제지하면서 말했다.
“괜찮으니까. 그냥 타고 있어.”
“네.”
그사이 하킴도 혁권의 어머니가 앞에 있는 것을 발견한 차였다.
얌전하게 대답하는 그를 차 안에 두고 내린 혁권은 줄곧 걷고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포즈로 아파트 입구를 향했다.
“어머니!”
몸을 뒤로 돌린 어머니는 혁권을 발견하곤 반색을 했다.
“부산에 내려갔다 온다고 하지 않았니?”
“일이 빨리 끝나서 일찍 올라왔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뭐 하시고 계셨어요?”
혁권의 물음에 어머니가 살짝 이마를 찌푸리시면서 대답했다.
“낮에 전기가 나간 것 때문에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정전이 됐었어요?”
“그래.”
“뉴스에 그런 이야기는 없던데…….”
“그럴 거다. 우리 아파트만 전기가 끊겼거든.”
“아니, 왜요?”
“그게 뭐라더라?”
어머니가 생각이 안 난다는 표정을 짓자 함께 있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변압기라고 했잖아요.”
“그래. 맞아. 변압기가 너무 낡아서 과부화가 걸렸대나 어쨌대나 그러더라고.”
“아. 예.”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린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파트에 설치된 장비 용량보다 더 많은 전기를 쓰자 변압기가 견디지 못하고 고장 나 버린 것이다.
주로 오래된 아파트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예전과 달리 냉장고, 텔레비전, 컴퓨터, 에어컨 등 가전제품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제때 변압기를 증설하거나 교체해 주지 않으면 과부화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여름철에 발생하는 일인데 이런 계절에 과부화가 걸렸다고 하니 조금 의아했다.
“그래도 빨리 고쳤나 보네요.”
한쪽에 불이 들어와 있는 가로등을 힐끔 쳐다보자 어머니께서 속상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말했다.
“그럼 뭐 하니, 3시간이나 전기가 끊어지는 바람에 냉장고 안에 넣어 뒀던 음식들이 다 상해 버렸는데.”
“이런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도대체 관리 사무소에서는 뭘 하는지 몰라.”
“그러게요.”
말이 많기로 유명한 아주머니 한 명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툭 말을 내뱉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주민들도 동조했다.
미리 예방을 하지 못한 관리 사무소의 잘못도 있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아파트가 너무 오래됐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현재처럼 한 가구가 이렇게나 많은 전기를 쓸 줄 몰랐기에 적당한 용량의 변압기를 설치했는데, 그게 지금에 와서 부족해진 거였다.
그리고 아파트에 설치된 변압기를 교체하려면 비용 부담이 상당히 컸기에 관리 사무소에서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걸 알고 있었지만 괜히 말을 꺼냈다가 아주머니들이 귀찮게 할까 봐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