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63
363
그가 지적한 대로 수송기를 이용한 화물 운송은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설사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수송기에 싣고 올 수 있는 중량이 제한돼 대규모로 물품을 들여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AN-26 수송기의 탑재량은 최고 5~6톤 정도였고 활주로가 아닌 일반 도로에 착륙해야 된다는 걸 감안한다면 기체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화물량이 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제아무리 값어치가 높은 유물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빼낸 것들은 처분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들은 목록이 정리되어 있어 금방 확인이 쉬울 뿐만 아니라 소유권을 가진 시리아 정부에서 반환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거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알고 있소.”
“그러면 제가 어떤 대답을 할지도 짐작하시겠군요.”
유출 문화재라는 골칫거리를 떠안을 생각이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더 이상 부하들을 위험에 노출시키기 싫었다.
이럴 걸 예상이라도 한 듯 카바트 사령관은 차분한 태도를 보였지만, 이마에 짙은 주름이 잡히는 건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물을 먼저 넘기고 가치 판단도 그쪽에 일임하겠소.”
파격적인 제안에 그는 미간을 좁히며 상대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물론이오.”
이미 결심을 단단히 굳히고 온 듯 카바트 사령관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상대의 제안대로 한다면 유물부터 넘겨받고 가치 산정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상황에 따라서 상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이 가능했다.
“원하는 건 단 하나, 필요한 물품을 최대한 가져다주는 것뿐이오.”
“…….”
솔깃한 제안에 혁권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어차피 그쪽이 이 험한 곳까지 온 건 돈을 벌려는 목적 아니오? 당신은 돈을 챙기고 우린 정부군 놈들하고 싸울 물자를 확보하는 거요.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이니 잘 생각해 보시오.”
마주 앉아 있는 카바트 사령관과 탁자에 놓인 설형문자 점토판을 번갈아 쳐다본 혁권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했다.
위험부담이 상당했지만 거래를 무사히 끝낸다면 지금까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걸 전부 상쇄시킬 정도로 이득이 컸다.
이윽고 혁권은 고개를 들어 카바트 사령관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필요한 물품이 뭡니까?”
카바트 사령관이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그러고는 상의 주머니에서 여러 번 접힌 쪽지를 꺼내 혁권 앞에 내려놨다.
“여기에 적어 놓은 물품을 갖다 주면 되오.”
쪽지를 집어서 펼쳐 본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유물은 이번에 수송기가 도착할 때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염려 마시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쪽에서 강제로 빼앗아 간 무기와 차량을 다시 되돌려 줬으면 좋겠군요.”
“알겠소. 바로 조치를 취해 주겠소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걸 다시 돌려받는 거였기에 혁권은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바트 사령관이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서로 간에 불편한 일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다 털어 버리고 잘해 봅시다.”
“좋습니다.”
괜히 앙금을 가지고 있어 봤자 득 될 것이 없었기에 혁권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상대와 악수를 나눴다.
그렇게 혁권과 새로운 거래를 맺은 카바트 사령관은 고개를 살짝 까닥이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하곤 몸을 돌렸다.
함께 온 부관과 함께 그가 사라지자 혁권은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깊은 상념에 빠진 혁권의 뒷모습을 자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
혁권의 시선은 카바트 사령관이 남기고 간 점토판에 머물러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불현듯 얼굴을 든 그가 품에서 위성전화기를 꺼내 압둘라흐만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세 번 정도 지났을 때, 딸칵 소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그래도 먼저 연락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군.
상대가 누군지 확인할 것도 없다는 것처럼 압둘라흐만이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샤레프는 무사히 도착했습니까?”
-그놈은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게. 그것보다 자넨 괜찮나?
“아직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정부군이 도시를 사방에서 포위하며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했다던데…….
미안함 때문인지 압둘라흐만이 말끝을 흐리자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도시 외곽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반군이 그럭저럭 버텨 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외부의 지원이 없는 이상 도시를 지켜 내기는 어려울 걸세.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다음 수송기가 갔을 때 거길 빠져나와야 되네.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 섞인 목소리였다.
혁권은 속으로 쓴 웃음을 삼키고는 말을 돌렸다.
“나머지 화물은 준비가 다 됐습니까?”
-여기저기에서 급하게 긁어모아 일단 수량은 다 맞출 수 있었네. 내일쯤이면 수송기에 실을 수 있을 거야.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고생은 전쟁터 한복판에 붙잡혀 있는 자네가 더하지. 후우. 괜히 이번 일에 끌어들여서 힘든 상황에 빠뜨린 것 같아 정말 볼 낯이 없네.
“괜찮습니다.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염치가 없지만 그렇게라도 이해를 해 주니 정말 고맙네.
“그건 그렇게 연락을 드린 건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입니다.”
-말해 보게.
상반신을 바로 한 혁권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듣기로 내전 중인 시리아와 이라크 쪽에서 흘러나온 고대 유물들이 암시장에서 상당수 거래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값어치가 어느 정도나 됩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건가? 자네 혹시…….
어차피 유물을 암시장에서 처분하려면 압둘라흐만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에 혁권은 사실대로 카바트 사령관하고 맺은 거래를 털어놨다.
“이들리브 박물관에 있던 유물을 받는 대신 추가로 물자를 공급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압둘라흐만이 펄쩍 뛰었다.
-자네 제정신인가!
“원래 압둘라흐만 씨가 거래하던 곳인데 먼저 양해를 받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지금 있는 화물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보내야 되는 상황에서 그런 거래를 하다니, 뒷감당을 어쩌려고 그러는 건가?
혁권은 담담한 태도로 대답했다.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저들이 제가 거절한다고 해서 순순히 포기하겠습니까.”
-으음…….
“아마도 한다고 할 때까지 절 압박하는 건 물론이고 도시 밖으로 내보내 주지도 않을 겁니다. 그럴 바에야 적극적으로 거래에 임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화물 운송이 쉽지 않다는 것만 빼면 괜찮은 제안이지 않습니까.”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압둘라흐만은 이내 길게 한숨을 내뱉으면 입을 열었다.
-후우.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네. 그래,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나?
“저들이 요구한 물품을 최대한 빨리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넘겨받은 유물을 대신 처분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네. 그렇게 해 주도록 하지.
“유물을 처분하면 대금의 10%를 수수료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압둘라흐만이 대뜸 화를 내면서 말했다.
-됐네. 나 때문에 자네가 그 고생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수수료를 받아 챙기겠나? 사과하는 의미로 그냥 해 줄 테니 그렇게 알고 있게.
“안 그러셔도 됩니다.”
-내가 불편해서 그래.
“뭐,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필요한 물품이 뭔가?
혁권은 카바트 사령관이 주고 간 쪽지를 꺼내 펼쳐 들고는 오더 내역을 이야기했다.
“AK소총탄 5만 발, 기본 의약품과 식량 그리고…….”
“으~음.”
책상 앞에 앉은 지수가 펼쳐 놓은 책을 보면서 끙끙거렸다.
혼자서 하는 모의고사 테스트를 치른 후, 틀린 문제들을 정리하면서 오답노트를 작성 중이었는데 좀처럼 왜 틀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속이 답답했다.
“이상하네…….”
답안지의 해설을 봐도 납득이 되질 않아 결국 기본서 개념의 다른 책까지 꺼내 든 지수는 종이를 팔랑거리면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아하, 그렇군.’
막혔던 부분이 뻥 뚫리자 그제야 뭐가 좀 되는 것 같았다.
지수는 빨간색 볼펜으로 노트에 보충 설명을 적어 놓고는 한참이나 고개를 박고 있던 얼굴을 들어 기지개를 켰다.
두둑거리면서 양 어깨와 날갯죽지 근처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으갸갹, 하고 이상한 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주변이 워낙 조용해 그럴 수가 없었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지수는 뜨끈뜨끈한 실내의 열기에 뺨이 붉어진 것을 느끼곤 잠시 산책이라도 나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수가 다니는 대학교의 중앙도서관은 굳이 시험 기간이 아니더라도 공부하는 학생들로 항상 자리가 차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짐만 놔두고 정작 본인은 어딜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경우도 허다했으나, 대부분은 1학년 때부터 소위 스펙이란 걸 쌓는다는 명분으로 토익이나 자격증 공부에 매달리는 수가 압도적이었다.
지수 역시 토익은 항상 900점대 이상을 유지하도록 애쓰며, 시험 감각이란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매년 여름과 겨울에 정기적으로 응시하고 있었고, 지금은 아나운서 공채를 위해 국어와 한국사 능력 시험을 동시에 대비하고 있었다.
평상시엔 평점을 위해 학과 공부를 우선시하고 있지만 지금같이 시간이 있을 때 짬짬이 봐 놔야 나중에 유리했다.
한동안 공부에 집중을 했으니 휴식을 취할 요량으로 지갑을 찾으며 일어서는데, 출입구 쪽 유리문에 낯익은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반대쪽에서도 그녀를 발견했는지 열심히 손을 흔들어 대는 것을 보자 지수는 웃으면서 실내를 빠져나왔다.
“어쩐 일이야?”
다른 대학교 학생인데 용케 여기까지 들어왔다며 지수가 말했다.
“너 한창 공부하는 중이라기에 응원하러 들렀지.”
그렇게 말한 것은 가벼운 청바지에 흰 셔츠 차림인 소현.
“자, 커피.”
별말 없이 마실 것부터 들이민 것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낯을 하고 있는 도연이었다.
“복도에서 얘기하긴 좀 그러니까 테라스로 가자.”
지수는 친한 친구 둘이 갑자기 찾아온 것에 놀라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앞장서서 안내했다.
중앙도서관에는 곳곳에 의자라든가 벤치 같은 것이 있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마구 지나다니는 곳에선 편히 얘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일부러 조용한 자리를 찾았다.
지수가 선택한 것은 3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였는데, 다른 곳보다 여기 의자가 푹신해서 편한 데다 여자 휴게실이 바로 옆에 있는 금연 구역이라 비교적 청결하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오늘은 볕이 따뜻해서 바깥의 화단이 있는 쪽으로 갔어도 괜찮았겠지만, 구석진 장소에 있다는 이유로 사내놈들이 점령하고 담배를 피워 대는 바람에 편하게 쉴 장소는 못 되었다.
지수는 커다란 야자수 같은 식물이 있는 화분에 가려져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의자가 있는 줄도 모르는 테라스 자리로 가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아, 이제야 좀 살 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