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73
373
바깥에서 요란하게 개가 짖는 소리에 혁권은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소파에 누운 채로 그대로 잠이 들어 지금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계속 곯아떨어져 있었다.
“으음.”
불편한 자세로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허리가 뻐근했다.
커튼이 열린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때 또다시 개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경비를 위해 키우는 셰퍼드가 새나 담장에 올라간 고양이를 보고 짖어 대는 것 같았다.
거의 12시간 넘게 잠을 잤으면서도 아직도 몸이 피곤했지만, 할 일이 많았기에 그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곤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시리아에선 수도가 끊기는 바람에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걸 한풀이라도 하듯 혁권은 따뜻한 물을 틀어 놓고 샤워를 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면서 몸을 씻어 내자 잠이 단번에 날아가면서 피로도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서 욕실을 나온 혁권은 탁자에 놓여 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어서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LED TV를 켰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CNN 뉴스에서 멈추자 마침 금발의 매력적인 여자 앵커가 시리아 내전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최근 시리아 정부군이 최대 반군 거점 가운데 하나인 이들리브를 함락시키며 내전에서 승기를 잡아가고 있지만, 그동안 비교적 안전지대였던 수도 다마스쿠스의 치안이 불안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어젯밤 시리아 공군기들이 다마스쿠스 외곽에 있는 반군 주둔지를 집중 폭격했습니다. 극단주의 반군 조직이 수도 주위로 침투해 들어와서 공격을 벌이자 병력이 추가로 가세하는 걸 막기 위해 공습을 가한 것입니다. 내전 구도는 정부군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고 있습니다만, 홈스와 이들리브 같은 주요 근거지들을 상실한 반군은 전투 방식을 게릴라전으로 바꾸며 아사드 정권에 계속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공습으로…….
앵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혁권은 얼굴에 가볍게 스킨을 바르고는 드라이로 머리를 말렸다.
옷장을 열어 가지런히 걸려 있는 옷들 가운데 흰색 셔츠와 면바지를 꺼내서 입었다.
그러고는 가죽끈으로 된 파텍필립 월드타이머 5131R을 손목에 찼다.
한화로 1억이 훌쩍 넘어가는 명품 중에서도 명품으로 손목에 착 감기는 느낌이 좋아 그가 애용하는 시계였다.
목숨을 걸고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 선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시계와 자동차는 그가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취미였다.
물론 소현과 함께 있는 시간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고 정신적인 안정을 가져다줬다.
그때 앵커가 그의 시선을 끄는 이야기를 했다.
-한편 이들리브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 시리아 정부군은 북서부 해안 지역을 회복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순조롭게 공격을 이어 가고 있는 시리아 정부군과 달리 내전에 끼어든 터키군은 IS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고전을 치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정부군이 공격 방향을 바꿨군. 보도가 사실이라면 구석에 몰린 카바트 사령관의 숨통이 조금 트이겠는데.”
근거지를 잃고 위축된 상황에서 정부군이 주공격 방향을 바꿨다는 건 JAF 반군한테 큰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부군의 추격을 피해 국경 지역으로 이동한다면 거기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보스, 일어나셨습니까?”
문밖에서 들리는 자말의 목소리에 그는 텔레비전 음량을 살짝 줄이면서 말했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온 자말은 그를 보며 꾸벅 머리를 숙였다가 바로 했다.
“푹 쉬셨습니까?”
“지금까지 정신없이 잤어.”
“이들리브에 있는 동안 내내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계셨으니 피곤하실 만도 하실 겁니다.”
쓰게 웃은 혁권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자네들도 수고가 많았어.”
“저희야 뭐 보스 뒤를 따라다는 것밖에 없는데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어.”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지포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이며 혁권이 말을 이었다.
“시리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이스켄데룬에 나가 있는 함단보고 화물을 계속 보관하고 있으라고 해. 필요하면 인원을 더 지원해 주고.”
“안 그래도 오늘 조직원 일부를 이스켄데룬으로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잘했어.”
카바트 사령관한테 넘겨줄 화물이 고스란히 다 남아 있는 만큼 그걸 관리할 인원이 필요했다.
혁권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몸을 살짝 뒤로 기댔다.
“압둘라흐만이 돈을 입금시켰다고 하니까 이번에 고생한 부하들한테 5만 달러씩 보너스를 줘. 수송기를 몰고 위험을 감수했던 이반과 승무원들은 10만 달러를 주고.”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아주 좋아하겠군요.”
자말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면서 웃었다.
고생은 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보상이었다.
아낌없이 베푸는 혁권 덕분에 부하들 중에서는 벌써 수십만 달러의 돈을 모은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가족들을 위해서 쓰였고 그리스로 이주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빨리 안정을 찾고 별다른 문제없이 이곳에 적응하는 밑거름이 됐다.
“참, 그리고 이반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하 창고에 놔둔 화물을 내일 중으로 스위스에 보내도록 해.”
“지난번처럼 말씀이십니까?”
“그래.”
유물 거래는 그가 잘 모르는 분야인 데다 정상적인 통로를 거쳐 나온 물건이 아니었기에 오래 붙잡고 있어 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거기다가 위축된 조직을 카바트 사령관이 서둘러 추스르려면 당장 달러와 물자가 필요할 터였다.
“공항을 이용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러자 자말이 자신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항과 부두에 있는 세관 직원들을 전부 다 잘 구워삶아 놨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테네에 터를 잡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필요한 곳에 있는 공무원들을 매수해서 같은 편으로 만드는 거였다.
어려운 그리스의 경제 상황과 맞물려서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협조자들을 만들 수 있었다.
덕분에 사업을 하면서 공항과 항구를 별다른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신경을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얇은 레깅스로 감싸인 긴 다리를 위아래로 쭉쭉 뻗을 때마다 사이클의 페달이 빠르게 회전했다.
액정에 표시된 시간은 벌써 40분을 넘어 있었고, 허벅지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져 다리를 위로 들어 올리면 무겁고 아팠지만 이미 익숙해진 고통이었다.
“핫, 핫.”
짧은 숨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뱉으며 소현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킨 채 정확히 5분이 지나길 기다렸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운동할 때 듣기 좋은 빠른 템포의 음악이 끊이지 않고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등허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이미 축축해졌다.
시간이 45분으로 바뀌자, 소현은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휭휭 돌리던 사이클을 느릿하게 바꾸고 겨우 한숨 돌렸다.
“휴우~.”
소현은 잠시 쉬어 가는 타임을 이용해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계속 빠르게 돌리는 것보다 5분은 전속력으로, 2분 쉬고 다시 돌리는 인터벌이 훨씬 운동 효과가 좋았다.
사람 몸이란 게 처음엔 죽을 듯이 힘들었던 운동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 때때로 이렇게 하는 방식을 바꿔 줘야만 했다.
소현은 옆의 거울로 자신의 몸매 라인을 점검하면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음.”
배는 군살 하나 없이 안으로 쏙 들어가 있고, 오랜 발레 연습 덕에 어깨와 등 라인도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번에 닭다리를 만들어 버릴 쫙 달라붙는 스포츠 레깅스마저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날씬한 몸이었지만, 소현의 눈으로 보면 아직 다듬어야 할 곳이 남아 있었다.
“역시 복근이야. 아랫배가 튀어나오면 안 되지.”
소현은 상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마른 사람이라도 지방이 많은 여자의 신체 특성상 앉으면 아랫배가 어느 정도는 잡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현은 일반인이 아니라 모델이었기 때문에, 그런 하나의 결점조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세계에 살았다.
실제로 그녀의 배는 단단하게 잘 자리 잡은 복근 덕분에 아무리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도 한 줌의 살점조차 없이 탄탄했으나 한시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게다가 여자 모델에게 주어지는 기대치는 엄청 높아서, 복근이 있는 것은 좋지만 남자처럼 눈에 띌 정도로 두드러지게 모양이 잡혀도 예쁘지가 않다고 한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말랑한 살과 근육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걸 동시에 완벽하게 추구하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어서 매일 몸매 관리에만 시간을 통째로 쏟아붓는 소현에게도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좀 있으면 혁권 오빠도 돌아올 텐데, 식사는 맛있게 해야지.”
소현은 조만간 돌아온다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보통 남자들은 깨작거리며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소현 역시 그와 함께하는 식사시간은 소중했기 때문에 기분 좋게 보내고 싶었다.
그러려면 혹시라도 살이 찔까 걱정하는 것보다 이렇게 평소에 관리를 열심히 해서 하루 정도 식사를 풍족하게 하는 것 정도론 몸이 변하지 않게 다듬어 두는 것이 중요했다.
부우우웅-.
소현이 그렇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을 짜고 있을 때 핸드폰이 진동하며 전화가 걸려 온 것을 알렸다.
정 실장님.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소현은 이어폰을 빼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좋은 아침. 혹시 헬스장이야?
“네.”
-역시. 왠지 숨이 거칠어져 있기에 운동하고 있는 중인가 싶었지.
그러면서 정 실장은 통화해도 되냐며 물었다.
“괜찮아요. 혼자 사이클 돌리고 있었거든요.”
오전 시간이라 헬스장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저녁 6시만 되어도 퇴근하고 온 직장인들로 북적이는 데다 소현은 단순히 자세를 확인하기 편해서 입는 거지만, 전신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운동복 탓에 남자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일부러 사람이 적은 시간대를 택해 오는 편이었다.
-그럼 나중에 샤워하고 사무실에 잠깐 들러.
“괜찮지만…… 왜 그러시는데요?”
-지금 한창 S/S 화보 촬영할 시기인 건 알지? 월간 에 실릴 수영복 화보가 있는데 소현이 네가 찍게 됐어.
“진짜요?”
소현이 페달을 천천히 돌리던 걸 멈추고 깜짝 놀라 반문했다.
라면 전 세계 100개국 이상에서 발간되는 유명한 패션 잡지다.
커버를 장식하려면 적어도 세계 모델 랭킹 탑 10위권 안에는 들어야 했으며, 그 안에 실리는 화보를 찍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경력이 될 터였다.
그런 곳에서 자신을 선택했다니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번 의류 브랜드 광고와 부산에서 열린 패션쇼에 선 게 효과가 있었어. 슬슬 여기저기서 입질이 들어오는데 지금 이 기세를 잘 타고 가야 해.
“예, 예! 열심히 할게요!”
-그래.
소현의 열띤 목소리에 정 실장이 만족스러운 듯 대답했다.
아마 실장도 뒤에서 여러 가지로 힘을 썼을 게 틀림없었다.
-그럼 약속 잊지 말고 나중에 보자.
“네!”
전화를 끊은 소현은 까맣게 변한 액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좋아서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방방 뛰었다.
“세상에, 어쩜 좋아.”
빨리 이 기쁜 소식을 혁권에게도 전해 주고 싶었다.
소현은 메신저 앱을 켜서 열심히 글자를 입력하다가 금방 생각을 바꾸곤 다시 내려놓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볼 거니까.
‘그때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하늘을 뚫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좋아, 오늘은 기념으로 1시간 더 돌리자!”
아자, 아자!
소현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열의를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