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86
386
미국에서 돌아온 혁권과 만나기로 한 날.
수건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열심히 뺨을 토닥거리면서 스킨케어를 하던 소현은 부웅 하는 진동음을 듣고 문자를 확인했다.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상품이 제작 완료되어 매장에 입고되었습니다.
“아.”
소현이 입을 벌리고 기뻐하는 빛을 떠올렸다.
그동안 혁권에게 받기만 하고 통 돌려준 것이 없어, 자신도 소소하게 선물을 해 주자 생각해 주문을 맡겨 둔 물건이 완성되었다는 문자였다.
“조금 일찍 나가야겠네.”
소현은 느긋하게 준비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약간 손놀림을 빨리했다.
등을 완전히 덮는 긴 머리라서 제대로 하려면 드라이기로 말리는 것만 30분 정도 걸리지만, 갑작스런 일정이 생겼으니 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도 어제저녁에 오늘 입을 옷을 미리 정해 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소현은 속눈썹이 더욱 풍성하고 길어 보이도록 정성스레 마스카라를 발랐다.
그렇게 서둘러서 집을 나온 소현은 택시를 타고 종로에 있는 주얼리 숍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자동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직원이 인사하며 그녀를 반겼다.
큼직하니 넓은 실내에 주로 흰색과 검은색을 사용한 모던한 느낌의 가게였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찾으시는 제품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상냥한 웃음을 띠며 다가왔다.
이에 소현이 대답을 하려던 찰나, 제일 안쪽의 쇼윈도 너머에 있던 젊은 여성이 그녀를 알아보곤 말했다.
“정소현 씨?”
“안녕하세요.”
“주문한 거 찾으러 오셨군요. 아는 분이니까 내가 직접 응대할게. 대신 차 준비 부탁해요.”
“네, 점장님.”
“소현 씨는 이쪽으로 와서 잠깐 기다려 주세요.”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좋은 향기가 나는 따뜻한 차를 홀짝이고 있으니 여자가 장갑을 낀 손으로 작은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원래는 보통 일주일 정도 걸리는데, 이번엔 세공 때문에 이틀 정도 더 늦어졌어요. 그래도 손이 많이 간 만큼 결과물은 만족스러우실 거예요.”
그 말에 소현이 기대하는 눈빛을 하자, 여성이 웃으면서 상자를 열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에 납작하면서도 얇은, 직사각형의 형태를 한 담배 케이스였다.
겉면은 완벽한 무광 블랙이었으며 눈에 띄는 장식이 없는 대신 밀짚을 엮은 것 같은 빗살 무늬 모양이 여러 각도로 새겨져 있어 단조로움을 피했다.
“테두리는 말씀하신 대로 24K 순금입니다. 얇은 띠처럼 둘러져 있어서 날렵해 보이죠.”
담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있는 끈도 케이스와 색깔을 맞춰 검은색이었다.
요모조모 둘러보며 확인한 소현은 마감이 깔끔하게 잘되어 있는 것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음. 마음에 들어요.”
“그러실 거라 생각했어요.”
“혹시 선물 포장도 되나요?”
“그럼요. 보아하니 오늘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러 나오신 모양이죠.”
어떻게 알았냐며 눈을 깜박이는 소현에게 여성이 우아한 미소를 날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여자는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나오거든요.”
“에? 제가요?”
소현은 약간 부끄러워져 괜히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도연 씨한테 들었어요. 남자친구가 굉장히 멋있는 분이시라던데요.”
“걔가 그런 말까지 했어요?”
뜻하지 않은 데서 혁권의 칭찬을 들은 소현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꽤나 남자 보는 기준이 까다로운 아이인데 그런 말을 해서 저도 뜻밖이었죠.”
소현과 이 가게를 연결시켜 준 사람이 바로 도연이었다.
뭔가 독특한 선물을 하고 싶은데, 국내에 파는 담배 케이스는 죄다 겉모양이 요란한 것밖에 없고 해외 직구를 하자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지인이 운영하는 숍이 있는데 거기에 주문 제작을 맡기는 건 어떠냐며 권해 준 것이었다.
말로는 그냥 아는 언니라고 했지만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물건을 고가에 팔아 치우려면 어지간한 감각 가지고는 안 될 것이었다.
전에는 카페 주인, 이번엔 주얼리 숍 점장이었으니 다음엔 또 뭐가 튀어나올지 궁금하다고 물으니 이제 와서 뭘 새삼스레 그러냐며 반문하던 얼굴이 떠올라, 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금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가방에 넣고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가슴이 들떠서 입매가 자꾸만 슬슬 올라갔다.
분명 좋아하겠지?
어디 나갔다 올 때마다 소현에게 줄 선물을 잊지 않고 사 오던 혁권의 기분이 이랬을까.
누군가의 기뻐하는 얼굴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카페에 앉아 있으니 정확히 약속 시간 10분 전에 혁권이 나타났다.
벌써 와 있을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소현의 앞에 마주앉은 혁권은 항상 하던 대로 샷을 잔뜩 추가한 커피를 시키더니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어? 내가 집으로 데리러 간다고 해도 거절하고.”
“아, 잠깐 들를 데가 있었거든요.”
싱글싱글 웃으면서 대꾸하니 혁권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것처럼 눈썹 끝을 치켜 올렸다.
“짜잔. 오늘은 깜짝 선물이 있답니다!”
“어?”
감춰 뒀던 장난감을 꺼내는 어린애처럼 상기된 표정으로 상자를 내밀자, 혁권이 불시에 습격을 당한 것처럼 당황한 기색으로 엉겁결에 두 손을 내밀어 받았다.
“내 생일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꼭 무슨 날이어야 주나요.”
“아니, 이런 걸 준비했을 줄은 상상도 못 해서…….”
그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포장지의 리본을 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손을 허둥거렸다.
항상 주는 것만 생각하다 보니 자신이 뭘 받을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태도였다.
“풀어 봐도 돼?”
“당연하죠. 얼른요.”
혁권은 혹시나 리본이 구겨질까 봐 걱정스럽기라도 한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천히 포장을 풀었다.
“이건…… 담배 케이스네.”
그는 금속의 차가운 감촉을 음미하는 것처럼 몇 번 가볍게 쥐어 보다가 이내 적당한 무게와 함께 손아귀에 착 감겨드는 느낌이 맘에 드는 듯 느슨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데? 가볍고 얇아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되겠어.”
“다행이다.”
소현은 상상하던 대로 기뻐하는 혁권의 얼굴을 보고선 만족해하며 등 뒤의 쿠션에 몸을 기댔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선물은 어떻게 생각해 낸 거야?”
“저번에 담배가 다 떨어졌다면서 편의점에서 잠깐 사 왔잖아요? 근데 보니까…… 되게 징그러운 사진이 붙어 있더라고요.”
소현은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매일 그걸 보면서 어떻게 담배를 피우나 몰라.”
“법으로 정해진 거니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이젠 거의 습관이라 끊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아무튼 앞으론 좀 귀찮아도 여기에 넣어 다녀요. 알았죠?”
“그래. 모처럼 받은 선물이니까 유용하게 활용해야지.”
혁권은 보란 듯이 들고 다니던 담뱃갑을 꺼내 케이스에 가지런히 옮겨 담았다.
내용물은 똑같은데, 각진 케이스에 담배가 일렬로 늘어선 것을 보니 어쩐지 훨씬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고마워. 잘 쓸게.”
그 말에 소현은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회사에 출근한 혁권은 곧 출시할 주얼리 브랜드의 디자인 샘플을 살펴보고 있었다.
로즈 골드에 작은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박아서 상당히 심플하게 만들어진 반지를 손에 들고 꼼꼼하게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흠집 하나 없이 세공이 아주 잘됐군.”
그러자 다시 시에라리온 광산으로 간 김덕현 전무 대신 회사 업무를 맡고 있던 홍선호 부장이 얼른 말을 받았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재주가 뛰어난 건 익히 알려진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탁자에 늘어져 있는 샘플들을 훑어보며 약간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디자인이 대체적으로 무난하군.”
“마음에 안 드십니까?”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그는 뒤로 등을 기대면서 대답했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너무 특징이 없고 평범한 것 같군. 다른 유명 브랜드처럼 미리내 하면 ‘아, 이거다.’ 하는 그런 것이 눈에 안 띄어.”
미리내는 은하수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 이번에 새로 론칭 하는 주얼리 브랜드의 이름이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해 왔지만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모습에 홍석호 부장은 약간 기가 죽은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다이아몬드가 들어가 그리 작지 않은 가격이다 보니까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을 선택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무난한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런 고가의 주얼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많은데, 다른 브랜드와 차별되는 특별한 무언가가 없다면 고객들의 흥미를 제대로 끌어내기 어렵지 않겠어.”
날카로운 지적에 할 말이 없어진 홍석호 부장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머리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고객들의 머릿속에 우리 브랜드를 각인시키려면 이것 가지고는 아무래도 부족한 것 같군. 디자인을 전부 다 새롭게 뽑도록 해.”
혁권의 지시에 홍석호 부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하면 예정된 브랜드 출시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그러자 혁권이 눈가를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래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제품을 고객들한테 내놓자는 거야!”
“그, 그건 아닙니다만…….”
“많은 돈을 들여서 준비하는 건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제품을 내놓는다면 어느 누가 사겠어! 차라리 그럴 바에는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아예 디자인이 완벽하게 갖춰질 때까지 출시일을 늦추는 것이 더 나을 거야.”
단호한 말에 홍선호 부장은 자신이 너무 출시일에만 집착한 나머지 더 중요한 걸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바로 디자인팀이 이야기를 해서 새 걸 뽑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고객들한테 미리내라는 브랜드를 확실히 각인시켜 줄 수 있는 그런 디자인이 필요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한쪽 다리를 접어 무릎에 올리며 말했다.
“기존 팀의 역량이 부족하다면 외국 유명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수도 있겠지. 아니면 상금을 크게 걸어 공모전을 여는 것도 괜찮고.”
그러자 홍선호 부장이 눈을 크게 뜨면서 되물었다.
“공모전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실력 있는 외국 디자이너한테 일을 의뢰하는 건 몰라도 공모전을 여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거였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혁권은 탁자에 놓인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이야기를 했다.
“학력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폭 넓게 참여할 수 있는 공모전을 개최한다면, 그 속에서 뜻밖에 좋은 디자인을 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않겠어. 그게 아니더라도 실력 있는 인재를 발굴해 낼 수도 있으니 나쁘지 않은 생각 같은데…….”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요. 잘하면 브랜드 출시를 앞두고 마케팅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 그런 식으로 이슈를 만들어 내는 거야.”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1등 상금으로 한 1억쯤 내걸면 사람들의 관심을 확실히 잡아 끌 수 있지 않겠어.”
“1억이나 말씀이십니까?”
큰 상금액에 놀란 표정을 짓는 홍선호 부장과 달리 혁권은 그 정도쯤이야 하는 얼굴로 말했다.
“고급 브랜드를 표방할 건데 그쯤은 되어야지.”
브랜드를 출시하기도 전에 1억 상금의 공모전을 열 생각을 하다니, 홍선호 부장은 혁권의 통이 크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공모전 계획을 세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참 외국 유명 디자이너한테 의뢰를 넣는 것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