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94
394
아테네 산타그마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로얄 올림픽 호텔 앞에 검은색 리무진이 멈춰 섰다.
벨보이가 다가오려는 걸 경호 차량에서 내린 하킴이 손짓으로 제지하고는 뒷좌석 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노타이 차림에 짙은 색 선글라스를 낀 혁권이 심복인 자말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혁권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붉은색 할로겐 조명에 대리석이 깔린 로비를 가로 질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러고는 제일 꼭대기 층에 위치한 프레지던트 룸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작게 열린 문 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 것은 검은 피부를 가진 중동인이었다.
그는 복도에 서 있는 혁권과 부하들을 확인하고는 이내 도어체인을 열고 나와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시죠.”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던 압둘라흐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어서 오게.”
“오랜만입니다.”
가볍게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눈 혁권은, 약간 몸이 불편해 보였지만 혼자서 걸음을 옮기는 압둘라흐만을 보면서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소파에 앉은 압둘라흐만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염려해 준 덕분에 이제 다 나았네.”
“다행이군요.”
“지난번 이들리브에서는 자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크게 곤란할 뻔했네.”
“이제 그만하십시오. 자꾸 그러시니까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자네 덕분에 천둥벌거숭이처럼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던 샤레프도 이제 정신을 좀 차렸을 걸세.”
“그때 부상이 심했었는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압둘라흐만이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으면서 말했다.
“아직 침대에 누워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아 좋아졌네. 젊은 놈이니만큼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걸세.”
“그래야지요.”
그다지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자신과 함께하다가 부상을 입었으니, 빨리 쾌차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먼저 계산부터 끝내도록 하지.”
“그러시죠.”
압둘라흐만이 손짓을 하자 뒤편에 서 있던 건장한 사내 한 명이 양손에 커다란 롱백을 들고 와 탁자에 올려놨다.
그러자 자말이 지퍼를 열고 롱백 안을 확인했다.
안에는 비닐도 뜯지 않은 신권 지폐 뭉치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전부 고액권인 500유로짜리였다.
무작위로 돈뭉치를 하나 꺼내 든 자말은 그 자리에서 비닐을 뜯어내고는 진짜 지폐가 맞는지 살펴봤다.
“1,500만 유로일세.”
한화로 182억 원이 넘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안주머니에서 작은 USB 메모리를 꺼내 앞에 내려놓으면서 압둘라흐만이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500만 달러는 여기에 비트코인으로 넣어 놨네.”
비트코인은 지폐나 동전처럼 물리적 형태가 아닌 온라인 가상 화폐로, 이동과 소지가 자유로웠기 때문에 최근 들어 은밀한 거래에 자주 이용되고 있었다.
USB 메모리를 집어든 혁권이 곧바로 주머니에 집어넣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압둘라흐만이 눈에서 이채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건 확인을 안 보는 건가?”
“가방에 든 현금은 카바트 사령관한테 넘겨줘야 되는 거라 확인을 했지만 전 압둘라흐만 씨를 믿습니다.”
“그거 고마운 말이군.”
압둘라흐만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돈이 든 롱백이 한쪽으로 치워지자 압둘라흐만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면서 혁권을 바라봤다.
“이번에 가져온 유물도 다 괜찮은 것들이었는데, 한꺼번에 물량을 너무 많이 풀다 보니 조금 손해 본 감이 있어.”
“당장 돈이 급한 형편이니 어쩔 수 없지요.”
아쉬워하는 압둘라흐만과 달리 그는 별다른 미련이 없었다.
어차피 중계 역할만 했을 뿐인 데다 직접 나서지 않고 압둘라흐만이 실질적으로 유물을 다 처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조금씩 나눠서 처분했다면 이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아까워.”
잠시 말을 끊고 그를 바라보던 압둘라흐만이 은근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카바트 사령관과 유물 거래를 본격적으로 해 보는 것이 어떤가?”
“제가 말입니까?”
“자네가 줄을 잡고 있으니 당연히 그래야지. 유물을 가져오면 처리하는 건 내가 맡아서 하겠네. 어떤가?”
뜻밖의 제안에 혁권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고심했다.
두 번의 거래에서 이미 확인했듯이 유물 매매가 분명히 큰돈이 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위험 요소가 많은 데다 무엇보다 그가 썩 내키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서 소중한 유물을 몰래 빼내 이득을 취하는 것 같아서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무기밀수도 서슴지 않고 하는 주제에 위선적인 생각일 수도 있으나 혁권한테도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다.
더군다나 여러 세력이 뒤엉켜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시리아에 또다시 발을 들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리고 굳이 유물에 손을 대지 않더라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도 이런 생각을 하는 데 한몫했다.
마음을 굳힌 혁권은 압둘라흐만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전 그다지 내키지가 않는군요.”
그러자 압둘라흐만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인가?”
“지금 벌려 놓은 일도 다 챙기기가 어려운데, 유물에 손을 대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원하신다면 카바트 사령관과 직접 거래를 하시죠.”
압둘라흐만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래도 되겠나?”
“전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혼자서 일을 진행하도록 하지.”
“잘되셨으면 합니다.”
“고맙네.”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다음에는 좀 더 여유롭게 만나도록 하세.”
“그러지요.”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소파에서 일어나 압둘라흐만과 악수를 나누고는 객실을 나갔다.
혁권이 부하들과 함께 안타키아 동남쪽 터키와 시리아 국경 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틀 뒤 정오 무렵이었다.
레바논 산맥에서 발원해 서부 지중해로 흘러가는 오론테스 강Orontes River을 자연 경계선으로 두고, 터키와 시리아 영토가 나뉘어 있었다.
풍부한 수자원 덕분에 주위는 올리브와 목화 등을 재배하는 경작지가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미리 준비한 보트를 타고 시리아 쪽으로 건너가자 군복을 입은 카바트 사령관이 그를 맞이했다.
“시간을 딱 맞춰서 도착했군.”
그러자 혁권이 카바트 사령관 뒤에 약간 떨어져서 서 있는 반군 병사들을 힐끔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난 약속은 꼭 지킨다고 하지 않았소.”
약간은 퉁명스러운 말에 상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그쪽 말은 믿을 수 있지. 이번에 보내준 화물은 잘 받았소.”
턱짓으로 카바트 사령관이 뒤에 세워져 있는 차량을 가리켰다.
신형 도요다 랜드 크루져와 러시아제 PK 중기관총이 장착된 픽업트럭으로 유물을 처분해서 만든 돈으로 구입한 거였다.
이것 말고도 각종 차량과 총기류, 탄약 그리고 식량까지 JAF(정복군)이 한 달은 너끈히 버틸 수 있는 군수품을 넘겨줬다.
근거지인 이들리브를 빼앗기고 국경 지대로 밀려난 JAF 반군이 재정비를 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였다.
카바트 사령관은 군복 바지에 있는 건빵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뱃갑 귀퉁이가 험하게 구겨져 있고 이리저리 눌린 자국이 역력해도 다행히 불을 붙여 피우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혁권이 손짓을 하자 부하 두 명이 군용 더블백 네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와서는 카바트 사령관 앞에 내려놨다.
“먼저 넘겨준 물품 대금을 빼고 420만 달러요.”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부관이 앞으로 나와 더블백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10, 20, 50달러 지폐가 묶음으로 한가득 들어 있었다.
고액권으로 가져오는 것이 운반도 쉽고 여러모로 편했지만, 카바트 사령관의 요구에 따라 반군 병사들한테 월급을 지급하기 편하도록 일부로 이렇게 준비를 해 온 거였다.
양이 많아 일일이 다 확인하기 어려웠기에 부관은 진짜 돈뭉치가 맞는지만 살펴보고 고개를 들어 카바트 사령관을 봤다.
“맞습니다.”
“차에 실어.”
“옛.”
부관이 병사들을 불러 현금 다발이 든 더블백을 랜드크루져로 옮겨 싣자 카바트 사령관이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말했다.
“덕분에 숨통이 트이게 됐군.”
“이걸로 이제 거래는 다 끝난 거요.”
확인을 하듯 혁권이 말하자 카바트 사령관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이 지긋지긋한 내전을 치러 오면서 수많은 일들을 겪었지. 그러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 뭔지 아나?”
“…….”
그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카바트 사령관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거야.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진짜 무서운 건 사람이라는 거지. 어제의 동지가 등 뒤에 칼을 꽂고 이득을 위해 배신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 바로 사람이야.”
“요점만 말하지.”
말을 놓으면서 혁권이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자, 카바트 사령관이 거의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는 군홧발로 비벼 껐다.
“결론은 이거야. 내가 본 자네란 사람은 아주 믿을 만한 인물이라는 거.”
모처럼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이런 소리를 내뱉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서로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제라도 잘 지내보고자 하는 말일세.”
이만하면 카바트 사령관으로서는 상당히 양보한 편이었다.
언제 그가 이렇게 빙빙 돌려서 친해지자고 하는 말을 해 본 적이 있겠는가.
“상관없지만, 후에 또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군.”
“압둘라흐만이 연락을 해 왔는데 유물에 아주 관심이 많은 모양이더군.”
며칠 전에 호텔에서 만났던 걸 떠올리며 혁권이 말을 받았다.
“난 더 이상 관여하기 싫으니 두 사람이서 알아서 하시오.”
“혼자서만 빠지겠다는 건가?”
그러자 혁권이 정색을 하며 상대를 쳐다봤다.
“애초 두 사람 사이의 거래 아니었나? 난 어쩌다 보니까 끼어든 것뿐이고 말이오.”
의도적으로 또박또박 끊어 가면서 말했다.
“그랬었지. 하지만 이제 내가 믿는 사람은 압둘라흐만이 아니라 바로 자네야.”
카바트 사령관이 손가락 끝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혁권은 눈가를 찡그렸다.
자꾸만 유물 밀매에 엮어 넣으려고 하자 혁권은 차가운 시선으로 상대를 보면서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그러든 말든 난 관심이 없소. 그럼 더 할 말이 없으니 이만 가 보겠소.”
그대로 몸을 돌린 혁권은 부하들과 함께 보트를 대놓은 강변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은 채 카바트 사령관은 그런 혁권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한번 맺은 인연의 실은 그렇게 쉽사리 끊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사령관님, 이곳에 오래 있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 이제 그만 가시지요.”
언제 정부군이나 쿠두스 병력이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 지역인 데다 거액의 현금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관의 말대로 빨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나았다.
“좋아. 주둔지로 돌아간다.”
“예.”
이내 카바트 사령관과 반군 병사들을 태운 차량은 뿌연 흙먼지를 피워 올리면서 동쪽 방향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