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36
436
선수금으로 받은 돈은 계약한 대로 정확하게 분배를 했는데, 트리폴리 상황이 워낙 안 좋게 돌아가다 보니 샤라빌 대통령의 몫까지 합쳐 블랙워터에 용병 대금으로 지급했다.
수도인 트리폴리의 통제권을 자밀 의장한테 빼앗기면 지금까지 누리던 권력을 잃게 될 거라는 불안감에 돈 욕심을 버리도록 만들었다.
거기다가 초반에 무기고와 보급 창고를 탈취당하면서 극심하게 겪고 있는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혁권한테 지원을 부탁했다.
트리폴리 정부가 무너지면 그도 비즈니스에 손해가 컸기에 원유 판매 대금을 담보로 잡고 필요한 보급품을 공급해 주기로 했다.
“안 그래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혁권은 방금 전까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함교 난간에 등을 기대고 멀리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쾌청, 바람 또한 선선하니 만약 돛이 달린 배였다면 꽤 속도를 내어 순항할 수 있을 법한 날씨였다.
혁권은 약간 짠맛이 느껴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걷어 올린 린넨 셔츠 소매 아래에 적당히 그을린 피부가 눈에 띄었다.
이런 일을 하면서 선크림을 일일이 챙겨 바를 순 없지만, 슬슬 신경을 쓰지 않으면 한국에 돌아갈 즈음엔 완전히 휴양지에서 마음껏 선탠하면서 놀다 온 사람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스마트폰 너머에서 압둘라흐만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요즘 아주 돈을 쓸어 담는구먼.
“압둘라흐만 씨에 비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이제 리비아에서 제일 큰손이 자네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자리를 잡다니 정말 대단해.
비아냥거리거나 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압둘라흐만은 혁권의 성장을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래 봤자 압둘라흐만 씨한테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그나저나 언제쯤 트리폴리로 돌아오실 겁니까? 설마 튀니지에 계속 계실 건 아니시겠지요?”
-글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에는 욕심이 그리 크게 생기지 않는군. 이제 몸도 불편하고 말이야.
지난번 습격을 당했을 때 목숨은 건졌지만 후유증이 생겨 외부 활동을 오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걸 떠올린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압둘라흐만 씨라면 금방 예전 모습을 회복하실 겁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북아프리카와 중동 일대를 주름잡던 거물이었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쓸쓸하게 무대 뒤로 퇴장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동업자이자 그를 이쪽 세계로 끌어들인 장본인이었기에 더욱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비즈니스를 위해 항상 목숨을 내걸어야 되는 상황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 내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압둘라흐만은 진정한 승자라고 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들리는 압둘라흐만의 목소리에 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자네가 주문한 화물은 모두 준비해 놨네. 수송기에 실어서 보내면 내일 정오까지는 트리폴리에 도착할 거야.
“갑자기 부탁드린 건데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야. 돈을 받고 하는 거니까 그런 말 할 필요 없네.
트리폴리 정부가 요구한 탄약과 보급품을 며칠 사이에 다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가장 믿을 수 있고 발이 넓은 압둘라흐만에게 도움을 구했었다.
“대금은 지금 바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좋지.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야 했지만 어차피 며칠 뒤에 원유를 실은 유조선이 울산에 도착해 남은 잔금을 받게 되면, 이자까지 쳐서 정산할 거였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참. 그리고 ADDI 말이야.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으니까 주와라 지역을 지나는 고속도로를 이용할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압둘라흐만의 말에 혁권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결국 자밀 의장 쪽에 붙기로 한 겁니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네. 주와라 지역에서 나오는 원유에 대한 권리를 모두 인정해 주기로 했다더군.
그동안 트리폴리 정부는 ADDI의 세력이 컸기에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으면서도 원유 생산을 통제하고 이익의 상당 부분을 가져가려고 했었다.
그러니 당연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고 자밀 의장이 솔깃한 제안을 해 오자 바로 노선을 갈아탄 거였다.
어떻게 보면 리비아 전역을 확실히 장악한 것도 아니면서 권력과 재물에 욕심을 부리고 다른 세력을 억압하려고 한 샤라빌 대통령의 실책이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는 거였다.
한마디로 자업자득이라는 뜻이었다.
이러다 보니까 거의 대부분의 세력들이 자밀 의장한테 붙는 바람에, 미국의 측면 지원을 받으면서 블랙워터까지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압도하는 건 고사하고 계속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정말로 ADDI가 자밀 의장 쪽에 합세 한다면 트리폴리 정부는 앞뒤로 적을 상대해야 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거였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움직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또 연락하세.
전화를 끊은 혁권은 좀처럼 굳은 표정을 펴지 못했다.
점점 상황이 안 좋아졌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트리폴리 정부를 버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결국 샤라빌 대통령의 욕심이 모든 걸 다 망쳐 버렸군.”
혼잣말을 내뱉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고심하고 있을 때 하킴이 뒤에서 다가오며 말했다.
“보스, 여기 계셨군요.”
“답답해서 바람을 좀 쐬려고 나와 있었어.”
“이제 곧 라스라누프 항구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원래는 새로 매입한 유조선에 한국에서 오는 선원들을 태워서 보내려고 했지만,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최대한 원유를 많이 확보해 놓기 위해 급히 선박을 한 척 더 임대해서 혁권이 직접 라스라누프로 향했다.
“자말하고는 연락이 됐어?”
“예. 안전을 확보해 뒀으니 바로 입항하면 된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해. 특히 바다에서 소형 보트를 타고 공격해 올 수도 있으니 작업을 다 끝낼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마.”
“알겠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혁권은 완전무장 한 열 명의 부하들을 유조선에 태웠지만 그래도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멀리 육지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거대한 유조선은 천천히 속력을 낮추며 항구로 다가갔다.
바다를 가로지며 설치된 거대한 방파제를 지나 항구 안으로 들어간 유조선은 우측에 위치한 전용 부두에 접안했다.
온통 붉은색 모래사막으로 뒤덮인 라스라누프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석유 저장 기지였다.
전용 부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수십 개의 저장 탱크에 수백만 배럴의 원유가 보관되어 있었고 끊임없이 원유를 뽑아 올리는 외곽 유전 지대와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저장 공간이 부족해 생산을 최저로 조절해 두고 있었지만 시설을 정상적으로 가동한다면 매일 수십만 배럴의 원유를 뽑아 올릴 수 있었다.
유조선의 덩치가 너무 커서 선착장에 바로 붙일 수가 없었기에, 크레인으로 해저에 있는 대형 송유관을 끌어 올려 바다에 정박한 채 원유를 옮겨 실었다.
한참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 부두 쪽에서 500톤쯤 되어 보이는 낡은 철선이 한 척 나와 가까이 접근했다.
사전에 접근을 통보받은 선박이었기에 경비를 서고 있던 혁권의 부하들은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총구만 겨누지 않았을 뿐 상황이 벌어지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선박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했다.
혁권도 갑판으로 나와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다가온 선박이 곧 엔진을 멈추자 유조선에 있던 선원이 굵은 로프를 아래로 던져줬다.
상대편이 그걸 받아서 선박 앞뒤에 단단히 묶고는 유조선 옆으로 선체를 바짝 붙여 정박했다.
양쪽이 완전히 고정된 상태에서 선원이 이번에는 밧줄로 된 사다리를 내려 주자 선박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유조선 위로 올라왔다.
제일 처음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라스라누프를 장악하고 있는 아부카 여단 지휘관인 후세인 대령이었다.
그 뒤로 자말과 후세인 대령의 수행원들이 차례대로 올라왔다.
몇 번 안면이 있던 후세인 대령은 그를 보자마자 마치 십년지기 친구라도 만난 듯이 양팔을 활짝 벌려 안으면서 혁권을 반겼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갑소!”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처를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알다시피 썩 좋은 상황은 아니오. 하지만 그쪽 덕분에 겨우 숨통을 트이고 있소.”
지원해 주고 있는 보급품을 말하는 걸 알아차린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듣자하니 우리한테 줄 물건을 가져왔다고 하던데…….”
인사가 끝나자마자 보급품부터 찾는 모습에 어지간히 사정이 안 좋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저겁니다.”
혁권이 한쪽 팔을 들어 가리키는 곳에는 40피트 컨테이너 20개가 넓은 갑판 위에 줄을 지어 놓여 있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물량에 후세인 대령의 눈이 커졌다.
“이게 다 우리 거라는 거요?”
“그렇습니다. 휘발유가 많이 부족하다고 해서 200리터짜리 드럼통으로 60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산유국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내전으로 인해 정유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거나 가동을 멈춰 휘발유를 구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특히나 이슬람 형제단이 아부카 여단을 고사枯死시키기 위해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자를 거의 다 차단시키는 바람에 더욱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안 그래도 걱정이 많았는데 존슨, 당신은 정말 알라가 나한테 보내 준 사람이오.”
극찬에 혁권은 웃으면서 나머지 보급품도 다 보여 줬다.
컨테이너마다 탄약과 식량 그리고 의약품등 아부카 여단에 필요한 물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껴서 쓰면 족히 한 달은 버틸 수 있는 물량에 후세인 대령의 얼굴이 환해졌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후세인 대령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봤다.
“솔직히 그동안 언제 물자가 바닥날지 몰라 조마조마했었는데 이제 한시름 놨소. 정말 고맙소.”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시하자 그는 한쪽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대령님께서 라스라누프를 든든하게 지켜 주셔야 저한테도 좋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자존심을 세워 주는 말에 후세인 대령은 목젖을 보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듣고 보니 그 말도 맞소이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원유는 책임지고 안전하게 공급해 줄 테니 아무런 염려하지 마시오.”
“대령님만 믿겠습니다.”
잠시 뒤 아부카 여단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서 컨테이너에 실려 있는 보급품 상자를 철선으로 옮겨 실었다.
아래로 내리는 건 유조선에 탑재된 크레인을 이용한다지만, 뜨겁게 내려쬐는 태양 아래서 일일이 나무로 된 무거운 상자를 꺼내 그물망을 채우는 것은 상당히 고된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쓸 물건이라서 그런지 다들 아무런 불평 없이 보급품 상자를 옮겼다.
직접 작업을 감독하는 후세인 대령과 떨어지자 조용히 있던 자말이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며칠 푹 쉬었더니 이제 괜찮아졌어.”
힐끗 후세인 대령을 쳐다본 혁권은 이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것보다 이번에 원유를 싣고 가면 저장 탱크가 거의 다 비는 것 아니야.”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러면 다시 저장 탱크를 채우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군.”
자말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