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37
437
“라스라누프 외곽에 카다피 정권 시절 NOC(리비아 국영석유회사)가 개발한 유정이 있지 않습니까.”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그는 이맛살을 살짝 찡그리면서 말했다.
“내전 중에 시설이 크게 부서져서 원유 생산을 거의 못하고 있는 곳이잖아.”
“그랬었지요.”
“……?”
현재가 아니라 과거형으로 이야기를 하자 혁권은 의아한 얼굴로 자말을 봤다.
“설마 채굴 시설을 복구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아니, 자재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기술자도 없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그는 놀란 표정으로 다그치듯 물었다.
“운이 따랐습니다. NOC 소유의 부두 창고에서 시추 장비 자재가 잔뜩 보관되어 있는 걸 우연히 찾아냈고, 병사들 가운데 예전에 석유 시설에서 일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시설을 다 고쳤다는 거야?”
“예. 비록 파괴된 시추 설비 가운데 하나밖에 복구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려 예상보다 저장 탱크를 빠르게 채울 수 있을 겁니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이군.”
“더 중요한 사실은 이걸 트리폴리 정부에서 아직 모른다는 겁니다.”
“확실한 거야?”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자 자말이 이를 드러낸 채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애초에 트리폴리 정부의 도움 없이 복구가 이루어진 데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유정 주변 경비를 심복인 나이미 중위의 부대에 맡겨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아낸 거야?”
“저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유조선이 들어오기 전에 후세인 대령이 절 불러 넌지시 알려 줬습니다.”
“그 말은…….”
혁권의 눈동자에 빛이 번뜩였다.
“추가로 생산되는 원유를 몰래 넘겨줄 수 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트리폴리 정부를 통하지 않고 넘겨받는 원유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계산기를 두드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혁권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작업을 감독하고 있는 후세인 대령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물량도 많았지만 철선에 옮겨 실으면 그걸 다시 육지까지 가져가야 했기에, 보급품 하역은 하루 종일 계속 이어졌다.
대충 작업이 마무리됐을 때는 이미 해가 져서 주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석양도 수평선 너머로 붉은색 띠 같은 잔해를 남기고는 모습을 서서히 감춰 갔다.
선실로 자리를 옮긴 혁권은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두 개 꺼내서는 그중에 하나를 후세인 대령한테 건넸다.
“안 그래도 목이 칼칼했었는데 고맙소.”
뚜껑을 따자 하얀 거품이 흘러나오는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간 후세인 대령은 시원하게 한 모금을 마셨다.
혁권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슬쩍 자말한테 들었던 유정油井 이야기를 꺼냈다.
“파괴됐던 외곽 유정의 채굴 시설을 일부 복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후세인 대령 느긋한 얼굴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머리를 작게 끄덕이며 사실임을 확인해 줬다.
“맞소. 운 좋게 망가졌던 시추 설비 한 개를 고칠 수 있었소.”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하지요. 추가로 생산될 원유를 저한테 넘기시죠. 물론 트리폴리 정부에 알리지 않고 말입니다.”
“날 보고 정부를 속이라는 거요?”
후세인 대령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혁권을 쳐다봤다.
“속이는 것이 아니라 융통성을 가지자는 겁니다.”
그는 짐짓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솔직히 정부에 생산량이 늘어난 걸 있는 그대로 다 보고한다고 해서 대령님과 부하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당장 필요한 탄약과 보급품도 제대로 지원해 주지 못하는 실정인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그럼 그쪽은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소?”
진지한 태도로 상대가 묻자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솔깃할 만한 제안을 했다.
“원유를 팔아서 나오는 이득을 절반씩 나눠 가지는 겁니다. 그걸로 원한다면 필요한 물자를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보급품을 일부 지원해 주고 있다지만 호시탐탐 라스라누프를 노리는 이슬람 형제단과 전투가 벌어진다면 금방 바닥나 버릴 터였다.
거기다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병사들에게 나눠 줄 돈이 필요했다.
이 모든 걸 트리폴리 정부에서 지원해 줘야 됐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에 자체적으로 해결을 해야 했다.
잠시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후세인 대령이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내 혁권한테 내밀었다.
혁권이 종이를 건네받자 후세인 대령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필요한 보급품 목록이오. 그리고 병사들한테 나눠 줄 달러가 필요하오.”
이렇게 목록까지 적어 둔 걸 보면 처음부터 트리폴리 정부 몰래 그와 손을 잡으려는 생각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대한 빨리 물품과 달러를 가져다 드리도록 하죠.”
“기다리고 있겠소.”
‘그리고…….’ 하면서 후세인 대령이 말했다.
“절대 이 일은 외부로 새어 나가선 안 되오.”
“물론이죠.”
그 정도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었다.
혁권은 잠시 내려놓았던 캔 맥주로 목을 축이곤 생각지도 못한 큰 건수를 올리게 되자, 싸구려 맥주라도 달기만 하다고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자, 한 잔 마시자고.”
상석에 앉은 송영문 DBC 드라마국 국장이 말하자 동석해 있던 도정인이 얼른 술잔을 들어 올렸다.
독한 위스키를 한 번에 쭉 들이켠 도정인은 양주병을 들어 송영문 국장의 술잔을 채워 주면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둘째 따님이 결혼을 하셨다고요. 약소하지만 제 성의입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내 앞으로 내밀자 송영문 국장은 가볍게 손사레를 쳤다.
“뭘 이런 걸 주고 그래. 괜찮으니까 넣어 둬.”
“아닙니다. 그래도 예의가 있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요.”
봉투를 내려놓자 송영문 국장은 못 이기는 척하며 챙겨 넣었다.
“허어. 이것 참 사람 하고는…….”
말이 축의금이지 뇌물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살짝 벌어진 입구 사이로 10만 원짜리 수표가 보이는 것이 액수가 꽤 되어 보였다.
기분이 좋아진 송영문 국장은 옆에 앉아 있던 아가씨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은 채 과일 안주를 받아먹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요즘 사업은 어때?”
“휴우. 말도 마십시오.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죽을 맛입니다.”
“남궁혜린인가 광고도 여러 편 찍고 꽤 잘나가잖아?”
“그러면 뭘 합니까. 지금까지 들어간 투자금을 회수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걸요.”
“그렇구먼.”
두 사람은 고향이 같은 전라도라는 인연으로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한쪽은 잘나가는 방송국 간부이고 도정인은 제법 규모가 있는 매니지먼트사 사장으로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일종의 공생 관계였는데, 이렇게 주기적으로 접대를 하고 뇌물을 주는 대신 소속 연예인들을 방송에 출연시켰다.
오늘도 도정인한테 연락이 왔을 때부터 돈을 찔러 주고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하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슬쩍 눈치를 본 도정인은 조심스럽게 오늘 술자리를 마련한 용건을 꺼냈다.
“저…… 그래서 말인데 DBS 드라마에 저희 쪽 애를 한 명 넣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누굴? 혹시 남궁혜린을 말하는 거야.”
“걔 말고 손주아라고 괜찮은 애가 있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상대가 머리를 갸웃거리자 도정인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러실 겁니다. 원래는 모델 일을 하다가 이번에 연기 쪽으로 데뷔를 하려는 애인데 몸매가 되고 마스크도 괜찮습니다.”
“머리도 안 올린 초짜라는 거야?”
“누구나 다 처음이 있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꾸준히 연기 수업을 받아서 실력도 웬만큼 됩니다.”
아까 받은 돈이 있었기에 송영문 국장은 술잔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좋아. 그럼 단막극에 조연으로 꽂아 주지.”
나름 신경을 써 준 거였지만 도정인은 그걸로 만족을 못 하는지 앞으로 몸을 바짝 당겨 앉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단막극보다는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스타일에 배역을 주시면 이미지도 맞고 딱 좋을 것 같습니다만.”
“스타일이라면 다음 주에 첫 방송이 나가는 거잖아.”
“맞습니다.”
그러자 송영문 국장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미 배역이 다 정해지고 촬영까지 들어갔는데, 그건 안 돼.”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어허.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미간을 찌푸린 송영문 국장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안 되는 일인데 자꾸 고집을 부리는 것에 살짝 짜증이 난 거였다.
“대본도 전부 뜯어고쳐야 되고 까딱 잘못하면 드라마 밸런스가 깨져 버릴 수도 있는데, 어느 감독하고 작가가 그러려고 하겠어. 나중에 좋은 배역이 나오면 꽂아 줄 테니까 이번에는 그냥 단막극에 만족해.”
파트너 아가씨의 어깨에 팔을 두른 송영문은 핀잔을 주듯 말했다.
이쯤 하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려고 할 때 도정인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태일건설 아파트 광고를 붙여 드리고 협찬도 받게 해 드리겠습니다.”
“태일건설에서 광고하고 협찬을 물어다 준다고?”
술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송영문 국장이 관심을 보이자 도정인이 얼른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송영문 국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을 열었다.
“이봐, 도 사장.”
“예.”
“꽂아 달라고 부탁하는 애가 혹시 태일건설에서 스폰을 받는 거야.”
아주 민감한 물음이었지만 송영문 국장 역시 이쪽 바닥에서 닿고 닿은 능구렁이였기에 도정인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쪽 사장님께서 손주아를 예쁘게 여기시는 건 맞습니다.”
살짝 에둘러 이야기를 했지만 상대가 안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번 일을 도와주시면 제가 하이난[海南島]에 모시고 가서 제대로 대접을 하겠습니다.”
위스키를 마시면서 송영문 국장은 생각에 잠겼다.
가뜩이나 앞서 방영되던 드라마가 애국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조기 종영되는 바람에 급히 편성된 스타일에 들어갈 예산이 부족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판에 태일건설 같은 큰 기업에서 광고를 주고 협찬까지 해 준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다.
그러면 드라마를 좀 더 여유롭게 제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청률이 낮게 나오더라도 방송국의 손실을 줄이고 어느 정도 면피가 가능했다.
문제는 드라마 제작을 맡고 있는 PD와 작가가 갑작스러운 낙하산을 받아들이느냐는 거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송영문 국장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어 도정인을 쳐다봤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송영문 국장의 말에 도정인은 얼굴을 활짝 펴며 머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국장님.”
“대신 아까 말했던 걸 꼭 지켜야 돼.”
“하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도정인은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듯이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송영문 국장의 술잔에 위스키를 따라 줬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그래.”
술에 취한 송영문 국장이 한쪽 손을 대충 흔들며 파트너 아가씨와 함께 대리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떠나자 꾸벅 허리를 숙이고 있던 도정인이 몸을 바로 하고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카악. 튀. 하여튼 더럽게도 밝힌다니까.”
오늘 술값하고 뒤로 찔러 준 돈을 다 합치면 1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기사가 차를 가지고 오자 그는 바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가.”
“예.”
차가 출발하자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도정인은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손주아한테 전화를 걸었다.
-이야기는 잘 끝나셨어요?
다짜고짜 결과부터 묻는 모습에 도정인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큰 스폰서를 끼고 있었기에 그런 티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배역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을 받았어. 대신 이미 촬영이 꽤 진행된 상태라서 중반부나 되어야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수고하셨어요.
인사도 없이 툭 끊어지는 전화에 도정인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건방진 계집애 같으니.”
고작해야 몸뚱이 굴리는 재주밖에 없는 주제에 기세등등하기는.
도정인은 언제고 네년이 바닥에 꼬라박을 때 실컷 비웃어 주마, 하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