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38
438
원유를 가득 채우고 라스라누프를 떠난 혁권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전에 유조선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비행기를 타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갔다.
혁권이 준 쪽지를 펼쳐 본 함단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걸 다 요구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담담하게 머리를 끄덕이자 함단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물량이 엄청난데요. 이 정도면 1개 연대는 완전히 무장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후세인 대령이 건네준 쪽지에는 탄약과 피복, 식량, 의약품은 물론이고 각종 소화기와 RPG-7 대전차 미사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러시아의 험비라고 불리는 GAZ-2330TIGR 사륜구동 차량까지 목록에 적혀 있었다.
요구하는 품목도 다양했지만 함단이 놀란 것처럼 수량이 엄청나게 많아서 커다란 수송선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어차피 원유 판매 대금으로 처리할 테니까, 상관없어.”
예전에 비해서 국제 유가가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VLCC급 유조선으로 한 척만 원유를 싣고 나와도 요구한 물품 가격을 충분히 치를 수 있었다.
“시간 안에 준비가 가능하겠어?”
함단이 잠시 생각을 해 보곤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빡빡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 보도록 하겠습니다.”
“트리폴리에 보내는 것도 차질이 없게 하고.”
“리비아 덕분에 루마니아 친구들이 떼돈을 벌겠군요.”
트리폴리 정부에 보내 주고 있는 탄약과 보급품 대부분이 루마니아군에서 보관 중이던 잉여 물자를 빼낸 것이기에, 관리를 맡은 장교들이 달러를 가득 챙겼다.
씁쓸한 일이었지만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으로 돈을 버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기에 혁권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원래 세상이 그런 것 아니겠어.”
“그런데 혹시 후세인 대령이 딴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요?”
“무슨 소리야?”
함단이 정색을 한 채 이야기를 했다.
“자금이 들어오는 유전 지대를 장악하고 있고 군대까지 있으니 트리폴리 정부에서 독립해 독자 세력을 구축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막말로 후세인 대령이 아부카 여단을 이끌고 떨어져 나간다고 해도 자밀 의장을 상대하기에도 벅찬 샤라빌 대통령으로서는 그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목소리를 낮추며 함단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후세인 대령이 그걸 염두에 두고 보급품을 대거 요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담담한 태도에 함단이 살짝 놀란 얼굴로 그를 봤다.
“이미 생각하고 계셨던 겁니까?”
“보급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하면 아부카 여단에 대한 샤라빌 대통령의 통제력이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 하지만 나중에는 몰라도 당장은 후세인 대령이 트리폴리 정부를 배반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기에는 아직 명분과 세력이 약하니까 말이야.”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한 가지 확실한 건 후세인 대령이 배신을 하게 되면 그 순간 양쪽 날개가 다 꺾인 트리폴리 정부는 끝장이라는 거야.”
혁권의 시선을 받은 함단도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더한 혼란이 리비아를 덮치겠군요.”
그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며칠 뒤 첫 번째 유조선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 원유를 내려놓자 계약대로 DK 정유에서 남은 잔금을 모두 입금시켜 줬다.
그는 자신의 몫을 뺀 나머지 돈을 용병 비용으로 블랙워터에 주고, 일부는 샤라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정부군이 쓸 보급 물자를 구해 트리폴리로 보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보급이 이루어지고 돈이 들어오자 블랙워터가 공격 헬기와 장갑차를 추가로 들여오자 트리폴리 정부군은 재차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다.
한번 망신을 당했던 블랙워터는 이번에는 실수를 하지 않고 상대를 밀어붙였다.
복잡한 시가지 지형을 이용해서 거리 곳곳에 IED를 설치하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3대의 경공격 헬기로 로켓탄을 퍼붓고 장갑차로 밀고 들어오는 블랙워터의 공격에 자밀 의장 측은 급격하게 뒤로 밀려났다.
급기야 대통령궁과 정부 청사가 밀집되어 있는 중심가를 완전히 내주고, 자밀 의장은 시가지 남쪽 외곽에 위치한 트리폴리 대학으로 거점을 옮겨야 되는 처지에 몰렸다.
조금만 더 공세를 퍼부으면 트리폴리에서 전투를 끝내 버릴 수 있는 찰나에 주와라 지역을 장악한 ADDI가 자밀 의장을 지지하며 서쪽 국경을 차단해 버렸다.
자칫하면 앞뒤에서 협공을 당할 상황에 처한 샤라빌 대통령은 황급히 정부군 병력 일부를 빼내 ADDI의 공격을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공세가 자연스럽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양측은 서로 숨을 고르면서 소강상태를 이루게 됐다.
그사이 새롭게 구매해 시 프린세스Sea Princess호라고 이름을 붙인 VLCC급 유조선에 한국에서 데려온 선원들을 태워 라스라누프로 보낸 혁권은, 이쪽 일을 자말과 함단한테 맡기고 잡시 서울로 돌아갔다.
“컷! 좋았어, 소현 씨.”
메인 PD인 김진의 말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방영실이 얼른 다가가서는 살수차로 뿌린 인공 비를 흠뻑 젖을 때까지 맞은 소현한테 대형 수건을 둘러줬다.
“어휴. 옷에서 물 떨어지는 거 봐. 완전히 다 젖었네.”
“괜찮아요.”
호들갑을 떨며 방영실이 다른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을 닦아 주고 있을 때 모니터로 방금 찍은 신을 확인한 김진 PD가 의자에서 일어나 앞으로 왔다.
“고생 많았지. 오늘 연기 나쁘지 않던데.”
PD의 호평에 소현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정말이세요?”
“그래. 처음에는 조금 헤매는 것 같더니 이제는 완전히 역할에 적응한 것 같아. 앞으로 이대로만 해 줘.”
“예.”
평소 칭찬을 잘 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소현은 더욱 기뻤다.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 빨리 들어가 봐. 몸 따뜻하게 하는 거 잊지 말고.”
어차피 소현이 등장하는 신은 촬영이 끝났으니 나중을 위해 컨디션 관리를 하라는 말만 남기고 PD는 바쁜 듯 자리를 떠났다.
“춥겠다. 얼른 밴으로 가요.”
이럴 줄 알고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 놨다며 매니저인 도형석이 말했다.
안 그래도 조금씩 몸이 떨리던 차라, 소현은 잰걸음으로 밴 안에 들어가 앉았다.
“갈아입을 옷은 여기 둘게요.”
옷을 챙겨 들고 따라온 방영실이 천천히 하라며 차 문을 닫아 주자 소현은 아직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꾹꾹 눌러 물기를 제거한 뒤 위로 높이 틀어 올렸다.
한창 비를 맞을 때는 몰랐는데 실내로 들어오니 옷의 천이 몸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게 기분 나빠, 재빨리 단추를 풀고 마른 수건으로 꼼꼼하게 어깨며 다리를 다 닦은 뒤 뽀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역시 힘들긴 하네.”
빨리 집에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소현은 손거울로 얼굴을 점검했다.
마스카라가 막 까맣게 번져 있진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의외로 화장이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곤 조금 놀랐다.
촬영 전에 메이크업 담당이 강력한 워터 프루프 제품이라고 자랑하더니 과연 헛말은 아니었나 보다.
‘나중에 어디 브랜드 제품인지 물어봐야지.’
벗은 옷을 정리하고 방영실을 부르려 손을 뻗었을 때, 부르르 진동음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이 혁권인 것을 확인하자 소현은 곧장 통화 버튼을 눌러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목소리가 왜 그렇게 밝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봐.
“그럼 내가 시큰둥하게 받았으면 좋겠어요?”
-하하, 그런 뜻은 아니고.
“그냥 오빠 목소리 들으니까 반가워서 그러죠. 얼굴 보고 싶어서 영상통화 걸어도 맨날 통신 상태가 안 좋다고 그러니깐.”
-원래 외국 나가면 다 그래.
어딜 가도 한국만큼 인터넷이 잘되어 있는 곳이 없다며 혁권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래도 조금 있으면 귀국할 테니까 너무 그러지 마.
“아, 정말요? 흐음, 언제 오는데요.”
-지금 출국 대기하는 곳에 있어.
“설마 지금 공항이에요?”
-응.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도 운이 좋으면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한 이삼일 정도는 집에서 푹 쉬려고 해. 소현이 너도 많이 바쁘지 않으면 한번 얼굴 봤으면 좋겠는데…….
“으음, 잠깐만요.”
소현은 가방에서 스케줄러를 꺼내 다음 일정을 체크했다.
“모레는 시간이 비어요. 그럼 그때 볼까요?”
-그래. 저번에 가고 싶다고 했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식사해도 되고.
“거긴 조금 먼데…….”
아무리 그래도 막 외국에서 돌아온 사람을 끌고 돌아다니자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아, 오빠 아직 집들이 안 했죠. 저 놀러 가도 돼요?”
-우리 집에 오려고?
혁권이 의외라는 듯 대꾸했다.
-괜찮긴 하지만……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별로 구경할 게 없을 텐데.
“저도 촬영 때문에 피곤하니까 밖에 돌아다니기 싫거든요. 그냥 앉아서 이야기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먹을 건 제가 밖에서 사 갈 테니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요.”
소현은 집들이 선물로 뭐가 좋겠냐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몸만 오라고 사양하는 혁권과 그래도 빈손으로 갈 수 없다는 소현이 한참 실랑이를 하는데, 밖에서 밴의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현 씨, 다 갈아입었어요?”
밖에서 기다리던 방영실이 아무래도 너무 오래 걸린다 싶었는지 참지 못하고 물어왔다.
“잠시만요!”
소현은 급하게 대답한 후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혁권에게 말했다.
“미안, 이제 끊어야 될 것 같아요.”
-그래. 나중에 집에서 봐.
전화를 끊으면서 통화 시간을 확인했더니 15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별말도 안 했는데 어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밴의 문을 열자 지루한 듯한 표정으로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방영실이 뒤를 돌아보았다.
“오래 기다렸죠? 옷이 젖어 있으니까 아무래도 벗는 게 좀 힘들어서…….”
소현은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방영실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흘리며 열심히 달랬다.
걱정했던 것보다 NG를 거의 내지 않고 소현이 연기를 잘해 준 덕분에 예상보다 촬영이 일찍 끝났지만, 김진 PD는 퇴근을 하지 못하고 다시 방송국으로 들어갔다.
이제 정말 방송 일자가 바로 코앞이었기에 찍은 걸 편집하고 곧 내보낼 1, 2화 방송분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려면 오늘도 밤을 꼬박 새워야 될 판이었다.
“편집실 잡아 놨지?”
“예. 5번 방으로 오시면 됩니다.”
“알았어. 오늘 촬영한 테이프를 가지고 먼저 가 있어.”
막내 조연출을 먼저 보낸 김진 PD는 필요한 물건을 챙기러 드라마국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갔다.
방송국 PD들 책상이 다 그렇지만 제대로 정리가 안 된 채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잔뜩 쌓여 돼지우리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혼돈 속의 질서라는 말이 있듯이, 김진 PD 자신은 나름대로 뭐가 어디에 있는지 다 파악하고 있기에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선배!”
서랍을 열어 뭔가를 찾고 있던 김진 PD가 고개를 들자 후배 한 명이 앞으로 다가오면서 말을 걸었다.
“국장님이 찾으세요.”
“무슨 일로?”
약간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 묻자 후배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야 모르죠.”
“아이, 참, 바쁜데……. 알았으니까 가 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