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39
439
김진 PD는 투덜거리면서 안쪽에 위치한 국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똑.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송영문 국장이 서류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찾으셨습니까.”
“어. 그래. 그리로 앉아.”
자리에서 일어난 송영문 국장은 자신도 소파로 가서 앉았다.
“어때 촬영은 잘되고 있어?”
“뭐. 아직까지는 순조롭습니다.”
“몇 회 차까지 준비가 됐나?”
“촬영은 6회까지 끝냈고 오늘 2회까지 종편 작업을 끝낼 예정입니다.”
“다음 주가 첫 방송인데 조금 빡빡하겠군.”
“최대한 서두르고는 있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한 바람에…….”
그러자 송영문 국장이 살짝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기대했던 그 남자의 여자가 죽을 쑤고 조기 종영까지 당하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한류 스타에 인기 작가까지 붙어서 올해 최고의 기대작이었기에, 방송국에서도 회당 8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자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8%도 안 되는 시청률에 막장 논란까지 일면서 40부작을 32부작으로 줄여서 조기 종영하게 됐다.
손해도 컸지만 야심차게 준비했던 드라마가 쫄딱 망했으니 가슴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조기 종영으로 인해서 비어 버린 시간을 메꾸기 위해 땜빵용으로 급히 편성된 것이 바로 스타일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방송국 내에서도 스타일에 대해서 크게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국장은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리면서 김진 PD를 부른 용건을 꺼냈다.
“바쁠 테니까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지. 극중에 남자 주인공 약혼자로 나오는 배역이 있지?”
“안젤라 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맞아.”
머리를 끄덕이며 송영문 국장이 말을 이었다.
“그 배역을 손주아라는 애로 교체하도록 해.”
“……예?”
난데없는 지시에 김진 PD는 고개를 번쩍 들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촬영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배우를 교체하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안젤라가 등장하는 신은 안 찍었잖아. 그리고 배역에 안 어울리면 배우를 바꾸는 거지. 왜 호들갑이야?”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러시면 어쩝니까? 지금 안젤라 역을 맡고 있는 배우도 저희가 심사숙고해서 뽑은 겁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김진 PD가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말대꾸를 하자 송영문 국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거참, 말이 많네. 그냥 시키는 대로 해!”
“국장님.”
좀처럼 말을 듣지 않자 송영문 국장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서로 흥분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김진 PD를 설득했다.
“김 PD.”
“……말씀하십시오.”
“자네 작품에 누가 간섭하는 것이 싫겠지. 하지만 방송국 사정도 생각을 좀 해야 되지 않겠어.”
“…….”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방송을 코앞에 두고 아직 광고가 절반도 안 붙었다는 건 들었겠지.”
보통 방영을 일주일 정도 앞에 두고 드라마에 붙는 광고가 확정되기 마련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스타일의 광고 판매 실적은 아주 저조했다.
앞선 드라마가 죽을 쑤고 경쟁작들이 워낙 쟁쟁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엄밀히 따져서 그가 책임져야 될 문제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 상태라면 방송을 시작하기도 전에 적자가 날 상황이야.”
“그게 이 문제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송영문 국장이 몸을 뒤로 기댄 채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말했다.
“배역을 교체하는 대신 광고와 협찬이 붙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어.”
“으음.”
그때서야 갑자기 낙하산을 꽂아 넣으려고 하는 이유를 알아차린 김진 PD는 얼굴을 구긴 채 낮게 침음을 흘렸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네. 여기 프로필이 있으니까 가져가도록 해.”
그러면서 송영문 국장이 얇은 서류철을 하나 탁자에 던지듯 내려놨다.
고심에 찬 얼굴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김진 PD는 이내 어깨가 축 처진 채 힘없이 서류철을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하겠습니다~.”
“어서 와.”
현관문 앞에 선 혁권이 웃으면서 소현을 맞이했다.
“밖이 많이 덥지? 들어와서 앉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소현은 혁권이 미리 준비해 둔 실내화를 신고 신기한 듯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와. 여긴 굉장히 넓네요.”
자기가 사는 오피스텔과는 비교가 안 된다며 소현이 눈을 반짝거렸다.
“참. 이건 집들이 선물이에요.”
“아무것도 안 사 와도 된다고 했잖아.”
“에이, 그래도 어떻게 빈손으로 와요.”
소현은 고급 제과점에서 산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보통 집들이 갈 때는 휴지나 바디 용품처럼 매일 쓰는 생필품을 가져가는 게 최고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오빠는 그런 것도 필요 없어 보여서…….”
“뭐, 필요한 건 다 사다 놨으니까.”
“그렇죠? 그래서 그냥 먹을 걸로 샀어요. 맛있다고 소문난 가게니까 나중에 같이 먹어요.”
“그래.”
혁권은 소현에게서 케이크 상자를 받아 부엌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그나저나 이사 기념 치고는 좀 늦었죠. 사실은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둘 다 많이 바빴으니까 어쩔 수 없지.”
부모님에게 새 아파트를 사 드리고 혁권이 독립한 지 벌써 한 달은 훌쩍 지났다.
소현의 말대로 집들이치고는 늦은 감이 없지 않았으나, 소현은 드라마 촬영 때문에, 또 혁권은 비즈니스로 바빠서 서로 스케줄을 맞추기가 힘들어 오늘에서야 겨우 시간을 조절해 만든 귀중한 하루였다.
“인테리어는 오빠가 다 했어요?”
“아니. 업체한테 맡겼어.”
거실을 느긋하게 거닐면서 높은 천장이나 깔끔한 화이트 톤의 벽지, 모던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이 나는 인테리어에 감탄하고 있던 소현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오빠 취향이 조금쯤은 들어가 있겠죠?”
“음. 복잡한 건 싫어하니까 최대한 장식물 같은 걸 없애고 심플하게 꾸며 달라고 했던가.”
“아, 그래요? 어쩐지 잡지에나 나올 법한 인테리어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자주 집을 비우는 탓인지 남자 혼자 산다고 하면 으레 연상되는 후줄근한 분위기도 없었다.
“청소는 누가 해요. 설마 오빠가 직접?”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도우미 아주머니를 불러.”
“아하. 어쩐지 깨끗하다고 했지.”
“그래도 혼자 쓸고 닦는 것 정도는 한다고.”
혁권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뭐, 서재랑 침실은 엉망진창이지만.”
“흐응~ 나 온다고 신경 좀 썼나 보죠.”
소현이 거실 한구석에 놓여 있는 향초를 보고 씩 웃었다.
남자가 향초를 켜고 혼자 분위기를 즐기는 일은 흔치 않으니, 아마 집 안 전체에 잡냄새를 없애고 은은한 향기를 내기 위해 부러 사다 놓은 것이 분명했다.
“아, 그런 건 좀 모르는 척해 주라.”
혁권이 쑥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피하자 소현이 다가가 어린애 대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 착해라~. 칭찬해 줄게요. 역시 센스가 남다르다니까.”
“……요즘 너 점점 기어오르는 것 같다? 도저히 연상을 대하는 태도가 아냐.”
“그만큼 친해졌다는 소리니까 좋은 쪽으로 생각해요.”
소현은 처음엔 낯가림을 하다가 가까워질수록 장난도 많이 치고 성격이 많이 밝아지는 타입이라, 이젠 혁권이 그만큼 편해졌다는 증거였다.
혁권이 커피 머신에서 원두를 내리는 등 케이크를 먹을 준비를 하는 사이 소현은 거실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거의 새것이나 마찬가지인 푹신한 소파에 드러누워 보기도 하고, 대형 가전 매장에서나 보았던 최신형 TV를 기웃거리다가 벽에 걸려 있는 현대미술풍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보기도 했다.
“이리 와. 햇빛이 잘 들어오는 장소가 있어.”
혁권은 쟁반을 들고 거실을 가로질러 바깥에 있는 널찍한 베란다로 소현을 안내했다.
“풍경이 너무 멋져요.”
멋들어진 티 테이블과 발을 쭉 뻗고 쉴 수 있는 편안한 의자, 그리고 머리 위엔 차양까지 달려있어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만끽하기에 그만인 곳이었다.
일반 아파트 베란다와는 달리 폭이 충분히 넓어서 그 모든 가구들이 다 들어가고도 한참 여유 공간이 남았다.
거기다 주변은 모두 낮은 집들이고, 멀리 산이 보여서 탁 트여진 넓은 공간에 있다는 기분이었다.
소현은 커다란 등받이가 있는 의자로 달려가 편안한 표정으로 늘어졌다.
“이거 여름에 엄청 시원할 것 같아요. 아, 좋아라~.”
튼튼한 나무줄기 같은 것으로 엮여 있어 바람이 잘 통하고 땀 때문에 살갗이 끈적거리며 달라붙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사실은 해먹 같은 것도 달아 보려고 했는데 그것까지는 공간이 안 되더라.”
“어머, 아쉬워라. 나 해먹 엄청 좋아해요.”
“으음, 나중에 고려해 볼게.”
“헤헤. 달게 되면 연락해요, 바로 달려올 테니까.”
소현은 대리석 바닥에 깔려 있는 시원한 청색 카펫을 발로 탁탁 두드리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여긴 완전 느낌이 다르네요. 약간 휴양지 같은 분위기?”
“휴식하기 위한 장소니까.”
혁권은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럼 어디 소현이가 사 온 집들이 선물을 구경해 볼까?”
안에는 파스텔 톤으로 앙증맞은 크기의 마카롱, 설탕 공예로 화사하게 장식한 조각 케이크, 그리고 차나 우유와 함께 곁들이면 좋을 법한 쿠키가 종류별로 다양하게 담겨 있었다.
전문 파티시에가 만든 디저트답게 하나같이 모양새에 공을 들인 것으로, 이미 이 정도면 음식이 아니라 수공예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음, 맛있겠는걸.”
“이쪽에 있는 쿠키는 남자들이 먹어도 될 정도로 많이 안 달대요.”
“그런데 소현이 너는 괜찮아? 전에는 체중 조절 한다고 밥도 거의 안 먹더니…….”
“여름 시즌에야 혹독하게 관리해야 되지만 이미 지나간 걸요. 패션 업계는 워낙 시즌이 빨라서 이젠 코트나 니트 같은 게 나올 테니 조금 여유를 가져도 괜찮아요. 그리고 요즘 살이 좀 빠져서, 매니저가 일이 킬로그램만 더 찌웠으면 훨씬 보기 좋을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보통 여자 연예인에게는 44나 55사이즈 옷들을 가져오는데, 소현이 입을 땐 허리가 너무 가늘어서 뒤를 옷핀으로 고정시켜야만 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덕분에 협찬받은 옷을 다시 돌려줘야만 하는 코디가 옷이 상한다며 투덜거리기에 괜히 미안해지기도 했다.
“하긴 일이 바쁠 땐 당을 보충해 주는 게 좋아.”
뭐든지 소현이 잘 먹는 걸 보는 게 기꺼운 혁권은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면서 아이스커피를 건넸다.
“오빠가 직접 내려 준 커피를 먹다니, 영광이에요.”
“맛있으면 언제든지 타 줄 테니까 종종 놀러 와.”
“어머나. 음험하기는~.”
“아니, 내 말 뜻은 그게 아니라…….”
“장난이에요, 장난.”
소현은 큭큭 웃으며 의자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커피를 빨대로 쭉 빨아들였다.
시중의 카페에서 파는 커피하고는 확실히 향이라든가 맛이 더 진한 편이라, 소현은 살짝 입맛을 다시고 놀랍다는 듯 말했다.
“응, 맛있다. 원두는 따로 샀어요?”
“여기저기서 사다 날랐지. 소현이도 알다시피 내가 커피를 좀 좋아하잖아.”
“거의 중독에 가깝죠.”
“하하, 아무튼 해외에 나갈 때마다 기회가 있으면 원두 같은 것을 사 모아.”
“흐응. 나름대로 취미인 셈이네요.”
납득했다는 듯 소현이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두 사람은 소현이 사 온 음식을 다과로 삼아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