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41
441
그 자리에서 차를 돌린 혁권은 강남에 위치한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사무실로 갔다.
숨이 막힐 듯한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가운데 상석 자리에 앉은 혁권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울츠에서 일방적으로 모델 계약을 해지했다,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정동식 부장의 대답에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소속 연예인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그냥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다는 건가?”
“물론 항의했습니다만 남아 있는 모델료를 전액 다 입금시켜 준 데다가 잘못하면 소현 씨의 평판이 나빠질 수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지은 겁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일방적인 계약 해지를 당한 거지만 아직은 을乙일 수밖에 없는 소현이 불만을 표시한다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광고주 쪽에서 꺼려 하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계약한 모델료를 떼어먹은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문제를 키워 봤자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더 컸다.
정동식 부장으로서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을 선택한 거였다.
그 역시 정동식 부장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속사 연예인을 떠나 사랑하는 여자인 소현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크게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화풀이를 하는 것밖에 안 됐기에 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도대체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잠시 머뭇거리던 정동식은 이내 사실대로 모든 걸 이야기했다.
“울츠 측에서는 내부적으로 모델 교체를 결정했다고 하지만, 제가 알아본 결과 경영진에서 직접 지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
뭔가 이상한 느낌에 혁권은 미간을 좁혔다.
“저희가 계약 사항을 위반한 것이 없고 오히려 소현 씨가 조연이지만, 지상파 드라마에 출현하게 되면서 인지도 상승이 예상되는데, 남은 모델료까지 지급해 가며 모델을 교체한 걸로 볼 때, 스폰서가 개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스폰서라고?”
“그렇습니다. 최근에 이쪽 바닥에서 새로 교체된 모델이 거물 스폰서를 잡았다는 소문이 있는 걸 보면,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듣고 보니 아귀가 딱딱 맞아 들어갔다.
꽤 규모가 있는 울츠 경영진을 움직인 걸 보면 스폰서도 상당한 거물일 것이 분명했다.
“한마디로 재수가 없었다는 거군.”
혁권이 내뱉듯 중얼거리자 정동식 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째서?”
“저쪽에서 일부러 소현 씨를 찍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자세히 이야기해 봐.”
“원래 손주아 씨와 소현 씨가 서로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음.”
예전에 잠시 얽힌 일도 있었기 때문에 혁권이 모를 리가 없었다.
“뭐, 애초에 손주아 씨가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쪽이긴 했지만요.”
사뭇 씁쓸한 어조였다.
그 역시 소현이 일부 패거리로 몰려다니는 여자 모델들에게서 배척당하는 건 알고 있었으나, 도와주고 싶어도 나서기 애매한 사안이라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했던 걸 뒤늦게 후회하는 듯했다.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이겠죠. 새 모델이 된 손주아 씨가 울츠를 선택한 것도, 소현 씨가 메인 모델이기 때문에 자리를 빼앗으려고 그랬다는 말을 관계자한테 들었습니다.”
지난번 부산에서 봤던 손주아의 태도를 떠올린 그는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고는 정동식을 보며 물었다.
“손주아의 뒤를 봐 주는 스폰서가 누구야?”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은밀하게 진행되는 만큼 손주아가 스폰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정동식의 인맥이 넓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어찌 된 일인지 모든 상황을 파악한 혁권은 몸을 등받이에 기대면서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야?”
“일단 당분간은 현재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에 집중하면서 배우로서 인지도를 높여 나갈 생각입니다.”
“그사이에 모델 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제안이 들어온다면 선별해 드라마 촬영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하겠지만, 무리하게 일을 찾지는 않을 겁니다. 다행히 촬영 현장에 잘 적응하고 있고, 이게 첫 연기 작품이라는 부담감이 없지 않을 테니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줄 생각입니다.”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맞는 말 같군.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나름 심사숙고해서 조심스럽게 대답한 거였는데 너무나도 쉽게 승낙하자 정동식은 내심 깜짝 놀랐다.
장기적으로는 가능성이 있는 소현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것이 나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당장의 수익을 포기해야 됐기에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특히나 소현이 같은 경우에는 최신형 수입 밴에 전담 매니저와 코디, 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스태프를 3명이나 붙여 주고 있어서 발생하는 수익에 비해 지출이 훨씬 더 큰 상황이었다.
솔직히 한 달에 경비로 대략 800~900만 원이 들어가지만 이제 신인인 데다가 조연에 불과한 소현의 드라마 출연료는 회당 5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것도 꽤 비중이 있는 역할이라서 신경을 써 준 거였다.
소현이 받는 출연료를 다 가져간다고 해도 적자를 피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지원을 줄이든가 아니면 최대한 일을 많이 하도록 해서 수익을 올리는 것이 회사 입장에서는 유리했다.
그런데 한동안 적지 않은 액수의 적자가 날 텐데도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정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회사를 인수했을 때부터 혁권이 소현을 각별하게 챙긴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로 정동식은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순간 손주아처럼 스폰서를 받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으나, 소현의 성격으로 볼 때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묻지는 않았다.
그 역시 정동식의 눈초리가 달라진 걸 알아챘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 일이었기에 그냥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사소한 거라도 또다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매니지먼트사를 나와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탄 혁권은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굳은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다가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몇 번 들리고 난 뒤 방갑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한 가지 시킬 일이 있는데 가능하겠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에 방갑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
“누구 뒷조사를 좀 했으면 하는데…….”
-그쪽 일은 접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장님께서 시키시는 일인데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말씀만 하십시오.
그는 차창 너머로 스쳐지나가는 거리를 슬쩍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손주아라고 알지?”
-그 여자가 또 신경을 거슬리는 일이라도 한 겁니까?
“그건 알 것 없고. 손주아가 최근 스폰을 받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도록 해.”
-흐음. 언제까지 해 드리면 되는 겁니까?
“빠를수록 좋아.”
-알겠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바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혁권은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얼마나 대단한 스폰서가 뒤에 있는지 궁금하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눈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오픈을 며칠 앞둔 오후, 혁권은 마지막 점검 차 강남에 준비 중인 숍을 방문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수고하는군.”
직접 문을 열어 주면서 맞이하는 최정욱 과장에게 혁권이 가볍게 턱을 끄덕여 인사했다.
“오픈 준비는 잘되어 가나?”
“하하, 들어오셔서 눈으로 확인해 보시죠.”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듯 최정욱 과장이 허리를 굽혀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혁권이 실내로 들어서자 새것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내부 리모델링 공사는 얼마 전에 다 끝났지만 아무리 열심히 환기를 시켜도 완벽하게 없애진 못한 모양이었다.
다만 불쾌한 종류가 아니고 오히려 민트 향까지 살짝 섞여 상쾌한 기분까지 들게 했기에, 혁권은 머리 위의 천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요즘은 봄마다 황사나 미세먼지로 말이 많고, 실내이니만큼 답답한 느낌이 나지 않게 공기 순환 시스템에 신경을 좀 쓰라고 했더니, 확실히 효과를 보여 주고 있는 듯했다.
혁권은 공기 청정기와 에어컨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걸 확인한 후 실내를 가볍게 쭉 둘러보았다.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들이 빈 진열장을 채우기 위해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루는 물건이 고가품인지라 수술용 장갑과도 비슷한 걸 손에 끼고 흠집 하나라도 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보석들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사뭇 경건해 보일 정도였다.
진열장 안에는 금과 보석의 반짝임이 더욱 극대화되도록 작은 조명들이 붙어 있었고, 특히 오픈 기념으로 판매할 한정 상품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모셔 놓았다.
혁권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자 일부 시선을 눈치챈 여직원들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일하는 직원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굳이 거창하게 나와서 인사할 필요 없다고 최정욱 과장을 통해 말을 전해 놓았기 때문에 그들 또한 크게 소란을 떨지 않는 것이었다.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조끼와 치마라는 평범한 유니폼 차림이었으나, 최정욱 과장이 직접 면접까지 하면서 뽑은 직원들답게 행동거지에 나무랄 데가 없었다.
다들 스튜어디스나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것은 물론,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 톤이어서 손님에게 신뢰를 주기에도 쉬울 것 같았다.
이는 혁권과 최정욱 과장이 함께 상의해서 결정한 부분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고급화 정책을 취하고 있는 만큼 손님을 상대하는 직원 또한 어느 정도 격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하에 채용 기준을 잡았었다.
특히 단정하고 깔끔한 인상을 가진 사람을 선호했으며, 웃는 얼굴이 자연스럽거나 쥬얼리에 대해서 전문 교육을 받았다면 가산점을 주었다.
혁권은 속으로 최정욱 과장이 꽤 사람을 잘 선별해서 뽑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내부 인테리어로 눈을 돌렸다.
대체적으로 그레이, 블랙, 화이트를 조합하여 만든 모던하면서도 세련된 풍을 강조했는데, 같은 색깔 안에서도 톤에 조금씩 변화를 줘 실내가 단조로워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손님들을 위해 곳곳에 마련한 소파와 대리석 테이블 또한 적절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고, 치마를 입은 여성 고객은 무릎에 덮을 수 있는 부드러운 담요까지 사용할 수 있어 세심한 배려심이 돋보였다.
기왕 내친김에 혁권은 계단을 올라 2층도 둘러보기로 했다.
2층은 VIP 라운지로, 아래층 보다는 훨씬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한쪽에는 간단한 음료수와 다과를 주문할 수 있는 바가 마련되어 있었고, 전체적인 색조는 밝은 베이지와 크림색의 내추럴한 톤으로 그야말로 휴식 공간이라는 느낌이었다.
“음, 괜찮군.”
여기가지 둘러본 혁권이 마침내 입 밖으로 소감을 꺼내자 곁에서 그를 수행하던 최정욱 과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아까는 자신만만해하더니 이젠 또 약한 소리를 하나?”
갑자기 장난기가 동한 듯 짓궂은 투로 묻자 최정욱이 멋쩍게 대답했다.
“제 나름대로 자신은 있었습니다만 원래 개인 취향이란 게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분명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최정욱 과장이 여러모로 힘을 쓴 게 느껴졌다.
그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혁권은 어깨를 두드려 그를 격려해 주고는 다시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