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42
442
3층은 디자인실과 주얼리 제품 가운데 고급 라인을 숙련된 장인들이 직접 만들어 내는 세공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디자인실은 사무실 특유의 딱딱한 분위기를 전혀 풍기지 않고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자리를 자유롭게 꾸밀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복장 역시 굳이 정장을 강요하지 않고 반바지 같은 캐주얼한 옷차림을 해도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는데, 이 모두가 창의성을 살려 주기 위한 거였다.
넓은 공간에 비해서 아직 디자이너들이 몇 명 되지 않았지만, 브랜드를 정식 출시하고 회사 규모를 키워 나가면 차츰 인원을 늘려 나갈 계획이었다.
한쪽에 마련된 커다란 탁자에 둘러 앉아 회의를 하고 있던 디자이너들이 최정욱 과장의 안내를 받으며 그가 들어오는 걸 보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일하고 있는데 방해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디자인 실장인 정빛나가 한 손에 쥐고 버릇처럼 돌리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해외 출장 가셨다더니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남자처럼 딱딱한 말투만큼 겉모습도 빈틈없이 완벽한 정장 차림인 그녀였다.
편하게 뒤로 묶은 머리인데도 마치 미용실에서 드라이를 받은 것처럼 모양새가 났고, 귀에는 화려한 느낌의 귀걸이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올해 서른한 살로 비교적 젊은 나이였지만 외국에서 유명 디자인 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고급 주얼리 브랜드인 쇼메Chaumet가 경력을 쌓은 인재였다.
다른 국내 브랜드들과 차별화된 디자인을 보여 주기 위해서 거액의 연봉을 주고 어렵게 영입해 와 디자인 업무를 전적으로 맡기고 있었다.
웬만한 남자 못지않은 당차고 신뢰가 가는 모습에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며칠 안 됐어. 그건 그렇고 일해 보니까 어때?”
그러자 정빛나 실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서 이것저것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일을 못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눈치를 보는 것 없이 직설적인 이야기에 안절부절못하며 최정욱 과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버렸다.
옆에 있던 다른 디자이너들도 힐끗 혁권의 눈치를 봤다.
기분 나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정빛나 실장의 말을 받았다.
“그거 다행이군. 디자인실은 정 실장한테 일임을 했으니까 지금부터 하고 싶은 대로 내실을 꽉꽉 채워 나가 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이야기를 하고.”
“안 그래도 요구 사항을 정리해 올릴까 생각 중이었는데 잘됐군요.”
정빛나 실장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지금 바로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혁권이 머리를 끄덕였다.
“말해 봐.”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미리내가 고급 제품이라는 걸 심어 주기 위해 주얼리 쇼Jewelry Show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주얼리 쇼는 새롭게 선보이는 주얼리를 셀러브리티나 전문 모델이 착용하게 해서 무대에서 워킹을 선보이는 거였다.
주로 명품 브랜드에서 주로 활용하는 홍보 방법으로 효과가 클 뿐만 아니라 어떤 셀러브리티가 주얼리를 착용하고 나오느냐에 따라서 수준이 확 올라갔다.
“주얼리 쇼라…….”
팔짱을 낀 채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한 혁권은 긍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군.”
강남에 대형 플래그십Flagship 매장을 내고 외국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출시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만큼의 인지도를 확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주얼리 쇼를 열어 이슈를 모은다면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유명 셀러브리티를 모델로 세우고 기자들을 불러모아 이슈를 만드는 것이 쉬운 건 아니었지만, 돈을 들인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혁권은 엉거주춤 서 있는 최정욱 과장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브랜드 론칭에 맞춰서 주얼리 쇼를 개최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 봐. 사람들이 모두 주목할 수 있게 가장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말이야.”
브랜드 론칭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주얼리 쇼라니 최정욱 과장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더군다나 혁권이 원하는 수준의 주얼리 쇼를 열려면 준비해야 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더욱 시간이 촉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오너가 직접 내린 지시였기에 최정욱 과장은 내심 정빛나 실장한테 원망의 말을 쏟아 내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일을 진행시키겠습니다.”
그때 정빛나 실장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주얼리 쇼를 열어도 일시적인 이슈 끌기로 끝날 뿐이에요.”
자신이 의견을 내놓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자 혁권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정빛나 실장을 봤다.
“다른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 같군.”
정빛나 실장은 탁자에 놓여 있던 태블릿 PC를 집어 들어 몇 번 터치를 하고는 그에게 내밀었다.
“얼마 전에 홍콩 크리스티 경매장에 출품된 물건이에요.”
그녀가 보여 준 건 영롱한 빛을 발하는 타원형의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밀레니엄 주얼 8이라는 이름을 가진 7.4 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예요. 이걸로 스페셜 작품을 만들어 주얼리 쇼에서 발표한 뒤에 전시한다면 엄청난 홍보가 되지 않겠어요.”
이 정도 크기의 흠집이 없는 블루 다이아몬드는 아주 희귀했기에 분명 이슈를 끄는 건 물론이고 미리내 브랜드의 이미지도 상당히 높일 수 있을 터였다.
대신 얻는 것이 있는 만큼 투자가 필요했다.
정빛나 실장과 시선을 맞춘 그는 태블릿 PC를 돌려주면서 입을 뗐다.
“가격이 꽤 나갈 것 같은데…… 예상 낙찰가가 얼마나 되지?”
“250만 달러 정도는 될 거예요.”
액수를 듣자마자 최정욱 과장이 헛바람을 삼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250만 달러면 한화로 29억 원이 조금 안 되는 거액이기 때문이었다.
“홍콩에서 열리는 경매면 중국 큰손들이 대거 참여할 테니까 300만 달러를 넘길 수도 있겠군.”
“그럴지도 모르죠.”
액수를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십억을 너무나도 쉽게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최정욱 과장은 졌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티파니 다이아몬드처럼 활용하겠다, 이거군.”
혁권이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보자 정빛나 실장은 흔하지 않는 미소를 지으면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잘 알고 계시니 구구절절 왜 이 블루 다이아몬드가 필요한지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옐로우 다이아몬드로 기록된 티파니 다이아몬드The Tiffany Diamond는 단순히 비싼 것만이 아니라 티파니라는 브랜드 그 자체를 상징하는 보석이었다.
원석의 절반을 날려 버리는 손실을 각오하고 총 82면으로 마치 안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으로 정밀하게 세공되어, 크기보다는 광채를 더 중요시하는 티파니만의 기준의 보여 줬다.
이걸 리본 로제트Ribbon Rosette 목걸이로 만들어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유명한 영화에 선보이면서 티파니라는 브랜드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 차례 새로운 디자인으로 티파니 다이아몬드를 활용한 제품을 선보이며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있었다.
정빛나 실장은 홍콩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온 희귀한 블루 다이아몬드를 미리내 브랜드의 상징으로 만들려는 거였다.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은데…… 블루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쉽게 보기 어려운 보석이라고 해도 7.4 캐럿은 조금 임팩트가 약하지 않을까?”
“…….”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정빛나 실장을 향해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도 미리내를 상징하는 물건이 될 텐데, 최소한 10캐럿은 넘어야 되지 않겠냐 이 말이야.”
“아쉽게도 액수도 엄청나지만 경매에 나와 있는 보석들 가운데 그 정도 크기는 없더군요. 그렇다고 일반 다이아몬드로는 웬만한 크기가 아니라면 이슈를 끌기가 어려울 테고요.”
“만약에 20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가 있다면 어쩌겠나?”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정빛나 실장은 이어진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2, 20캐럿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끄덕이는 혁권을 보며 정빛나 실장이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말 그런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계시다는 거예요?”
“우리 회사가 시에라리온에 다이아몬드 광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흠집 하나 없는 최고 등급에 세공까지 끝낸 중량이 정확히 20캐럿이야. 경매에 내놓은 적은 없지만, 최소한 3천만 달러 이상 넘어가는 물건이라 확언할 수 있어.”
설마 그런 대단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정빛나 실장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존재만으로 빛을 발하는 엄청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그녀의 손으로 이 세상에 하나뿐인 주얼리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될 정도로 흥분됐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혁권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어때 그걸로 작품을 만들어 볼 생각이 있나?”
도도하고 시크한 이미지를 가진 정빛나 실장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걸 깨뜨리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을 반짝이면서 대답했다.
“맡겨만 주신다면 최고로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에서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였기에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정빛나 실장은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이미 마음속으로 다이아몬드를 맡길 생각을 가지고 있던 혁권은 흔쾌히 머리를 끄덕였다.
“며칠 안으로 다이아몬드를 보내 줄 테니까 어디 한번 마음껏 실력을 발휘해 보도록 해.”
“절대 실망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기대하도록 하지.”
의욕을 불태우는 정빛나 실장을 보며 그는 신뢰가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NG!”
모니터를 보고 있던 김진 PD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서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감정이 안 살잖아. 대사만 내뱉지 말고 표정으로도 연기를 하라고!”
“죄송합니다.”
“쯧.”
짧게 혀를 찬 김진 PD는 옆에 있던 조연출을 보며 소리쳤다.
“바로 세팅 다시 해!”
“예.”
스태프들이 재촬영을 위해 바닥에 떨어진 소품들을 다시 정리하는 동안 자리로 돌아온 김진 PD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동안 끊었던 담배였지만 송영문 국장을 만나고 난 뒤에 다시 피우게 됐다.
결국 국장의 요구대로 하기로 했지만 현실에 굴복해서 스스로 작품에 흠집을 냈다는 생각에 화가 나고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그러다 보니 화를 자주 내면서 촬영을 하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걸 알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잘되지 않았다.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자 스마트폰을 꺼내 든 김진 PD는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곤 이맛살을 찌푸렸다.
바로 스타일의 작가인 오추현의 전화였다.
보나 마나 갑자기 배역을 교체한 걸 따지려고 전화를 한 것이 분명했다.
피하고 싶은 마음에 그냥 넘기려고 하다가 이미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들어와 있는 걸 보곤 작게 한숨을 내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대자 마자 잔뜩 뿔이 난 오추현 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내 전화를 피하는 거예요!
내심 뜨끔했지만 김진 PD는 얼른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그럴 리가 촬영 중이라서 폰을 꺼 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