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43
443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
의심이 갔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오추현은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뭐, 좋아요. 그건 그렇다고 치고 안젤라 배역을 작가한테 상의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바꾸는 것이 어디 있어요!
시퍼렇게 날이 선 말투에 굳이 직접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김진 PD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태프들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서둘러 자리를 옮기면서 말했다.
“저번에 이야기를 했잖아.”
-한번 생각을 해 보자고 그랬지, OK한 건 아니었잖아요!
이미 캐스팅이 다 끝나고 촬영까지 상당한 분량이 진행된 상황에서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배역을 교체한다니, 캐릭터에 맞춰 글을 쓰던 작가 입장에서는 황당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배역 교체가 확정됐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됐으니 더 화가 났을 터였다.
내키지 않는 일에 뒤처리까지 떠안아야 되는 상황에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방송을 앞두고 작품을 망칠 수는 없었기에 김진 PD는 애써 상대를 달랬다.
“미안해. 며칠 뒤부터 안젤라가 나오는 장면을 찍어야 되는 상황이라 빨리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그냥 원래대로 갔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을 해 줬잖아. 솔직히 나도 이것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어.”
엄살이 아니라 진짜였다.
김진 PD의 의지가 아니라 윗선에 내려온 지시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기에 가운데 끼어 고생하는 것이 측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를 다 가라앉힌 건 아니었다.
“오 작가, 두 눈 딱 감고 한번만 나 좀 살려 주라. 요즘 내가 이 일 때문에 아주 스트레스가 쌓여서 죽겠어.”
-누군 속이 편한 줄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싹싹 빌잖아.”
벌써 배역 교체가 됐고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닌 데다 김진 PD가 연신 사과를 하자 오추현 작가도 흥분했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앙금이 아직 남아 있는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배역을 바꾸는 건 그냥 넘어가더라도 안젤라 비중을 억지로 늘리는 건 절대 동의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오추현 작가의 이야기에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양보를 해 주면 안 되겠어.”
-절대 안 돼요. 그러면 기껏 만들어 놓은 줄거리를 다 갈아엎어야 되는 건 물론이고 캐릭터 사이에 균형이 전부 깨져 버린다고요!
애초에 안젤라 역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불필요하게 장면을 늘린다면 드라마가 산으로 가거나 자칫 지루해질 위험성이 있었다.
김진 PD 역시 이걸 모르지 않았지만 송영문 국장의 지시가 워낙 강경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몇 장면이라도 좀 늘려 주면 안 될까?”
-난 못하니까 김 PD님이 직접 대본을 쓰시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사납게 쏘아붙인 오추현 작가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오 작가! 정말 미치겠네.”
한쪽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면서 김진 PD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가득이나 시간적 여유가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가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면 대책이 없었다.
이대로 가자니 분명 국장이 난리를 칠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작가를 바꿀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드라마를 망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오추현 작가를 설득하는 방법뿐이었다.
신인도 아니고 방송 10년 차로 고집이 센 베테랑 작가를 설득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후우.”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빨리 대본을 수정하지 않으면 며칠 뒤부터는 촬영을 중단해야 될지도 몰랐기에 그는 후배 PD한테 현장을 맡기고 오추현 작가를 만나러 갔다.
경쾌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사방이 유리로 된 연습실에서 소현은 후배 모델들과 워킹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 둘, 엉덩이에 더 탄력을 주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더 당겨야지. 그래 좋아. 거기서 턴!”
손뼉을 치면서 수강생들의 움직임을 체크하던 정미정이 잠시 휴식을 외쳤다.
“10분 휴식! 화장실 갈 사람은 가고, 쉬는 사이에 스트레칭도 빼먹지 말고 해 놔.”
각자 흩어지는 모델 수강생들 사이에 섞여 소현은 연습실 입구 쪽 선반에 놔 뒀던 물통을 들어 마른 목을 축였다.
“후~.”
역시 이 분위기가 좋다.
배우로서 드라마 촬영을 하는 것도 신선하고 재밌었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몸을 담아 왔던 모델계이니만큼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소현이 의자에 앉아 종아리를 마사지하고 있을 때 강사인 정미정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때, 할 만해?”
“선배.”
“어허, 여기서는 강사님이라고 불러야지.”
정미정이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혀를 차면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녀는 소현이 모델로서 막 데뷔했을 때 이미 은퇴를 생각하고 있던 베테랑이었다.
일반인들이 이름을 알 만큼 유명하진 않았지만, 국내에서 열리는 패션쇼에는 거의 빠지질 않았고 청바지 브랜드의 전속 모델도 맡았을 정도였으니,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안고 은퇴한 셈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손주아도 선배님들 눈치를 보느라 그렇게 무리를 지어 활개치고 다니지 못할 시기였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가 갓 들어왔는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정미정이 엄청 귀여워해서 그녀가 은퇴하고 모델 학원의 강사로 일을 시작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그 인연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네, 강사님.”
“그래그래, 잘했어.”
선을 그으려는 듯한 말과는 다르게 소현의 머리를 슥슥 문지르는 손짓이 매우 친근했다.
“듣자니 요즘 배우 활동 하느라 모델 일은 잠시 쉬고 있다며. 아예 그 쪽으로 전업하려고?”
“아직 잘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꿈꿔 왔던 일이니만큼 모델이란 것에 애착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외적인 요인 때문에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라, 솔직히 말하자면 소현도 제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뭐 이것저것 경험해 보는 게 좋아. 인생이란 게 어느 쪽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나저나, 하면서 정미정이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성실하기도 하지. 바쁠 텐데 모델로서 감을 잃기 싫다고 굳이 학원에까지 나오고 말이야.”
“그야 당연하죠.”
“아냐, 이 학원에 비싼 수강료 내놓고선 땡땡이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 그런 애들에 비하면 소현이 너는 엄청 기특한 거야.”
대놓고 하는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소현이 에헤헤, 하고 웃었다.
“실례합니다~. 아, 마침 쉬는 시간이었네.”
매니저 도형석이 문가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정미정이 먼저 인사하자, 옷을 보고 강사인 것을 깨달은 매니저가 자기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수업하시는 데 죄송합니다.”
“아뇨, 말씀대로 쉬는 시간이었으니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죠?”
젊고 예쁜 여자들이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연습을 하는 곳이니만큼 혹시 다른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길까 봐 매니저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밑에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을 해 놓은 터였다.
“소현 씨한테 전해 줄 것이 있어서요.”
그러면서 매니저가 한 손에 든 종이 뭉치를 흔들었다.
“다음 회 차 대본이에요.”
“벌써 나왔어요?”
“예, 근데 수정된 부분이 좀 많다고 하던데요.”
소현은 받아 든 대본을 빠르게 훑어보다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네요. 특히 이 안젤라라는 배역, 원래는 이렇게 대사가 많은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그렇죠?”
남자 주인공의 약혼자이자 재미교포라는 설정이라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던 캐릭터였다.
분명 시놉시스에선 조연이라 이름 붙이기에도 힘들 정도로 거의 단역에 가까운 역할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대사는 물론이고 출연 분량이 확 늘어나 있었다.
“쓰다가 작가님 마음이 중간에 바뀌셨나…….”
“그게 말이죠, 사실은…….”
도형석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배역을 맡은 연기자 말이에요, 낙하산이랍니다. 그것도 뒷배가 엄청 빵빵하다던데요.”
“정말요?”
옆에서 놀란 것처럼 속닥인 것은 정미정이었다.
혹시 연예계 비화라도 나올까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건지 엄청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진짜 그런 일이 있구나.”
“어휴, 엄청 많아요.”
매니저가 말도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저처럼 완전 신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소현처럼 오디션을 보고 배역을 딴 케이스가 있는가 하면 주연 배우가 소속된 기획사에서 신인을 키울 목적으로 단역에 밀어 넣는 경우가 있는데, 따지자면 후자가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같은 신인이고 하니 혹시나 촬영장에서 마주치면 먼저 다가가서 친해져 볼까, 하던 생각을 하던 찰나라 소현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어어, 그것도 아직 말 안 했네요. 걔를 빼고 새로 들어온 게 낙하산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미 배우가 정해졌는데 그게 가능해요?”
“아직 촬영을 시작한 것도 아니니까, 찍은 분량이 없으니 직전에 배우가 교체되는 것도 이 바닥에선 아주 없는 일은 아니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갑작스럽게 작품에서 빠지게 된 신인 여배우 입장에선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억울할 터였다.
“당연히 기획사 측에서 피디한테 항의를 하긴 했는데, 어느새 말이 쏙 들어갔다 이겁니다. 그쪽 사장님 성격도 만만치 않은데 그걸 잠잠하게 만들 정도니, 뒷배가 보통이 아닐 거라고 소문이 난 거죠.”
“누군지는 알아요?”
“그걸 모르겠는데……. 뭐, 조만간 촬영장에 등장할 테니 그때 보면 알지 않겠어요.”
어쩐지 불안한 예감에 소현은 가슴께가 꽉 옥죄어 오는 듯했다.
뭘까, 이 불쾌한 기분.
그때 정미정이 일어나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자, 휴식 시간 10분 지났어! 다들 모였으면 다시 연습 시작하자.”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매니저가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뒤로 빠지면서 문을 닫고 나갔다.
“소현아?”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갑자기 멍하게 있어서 놀랐네. 네 매니저도 금방 나갔어.”
“잠깐 더워서 머리가 안 돌아갔나 봐요.”
정미정이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흔들었다.
“에어컨 잘 나오는데, 온도를 더 낮춰 줄까?”
“이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다른 사람들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연습 시작해야죠.”
소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밝게 미소 짓고는 잡념을 떨쳐 버리려는 것처럼 거울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서울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오전, 혁권은 샤라빌 대통령의 측근인 모함메드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원유 판매 대금이 들어왔소?
뭐가 그렇게 급한지 인사도 생략한 채 다짜고짜 묻는 말에 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오늘 저녁이나 돼야 유조선이 입항하니까. 내일쯤 대금을 받게 될 겁니다.”
트리폴리 정부 몫은 정부군이 쓸 각종 탄약과 보급품 그리고 병사들한테 월급으로 지급할 소액권 달러로 바꿔서 항공 수송을 통해 가져다주기로 되어 있었다.
배로 운송하는 것과 비교해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갔지만 수도인 트리폴리 한복판에서 여전히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여기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네. 서둘러 일을 처리해 주게.
다급해 보이는 모함메드 장관의 목소리에 다른 정보를 듣지 못한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변수라도 생긴 겁니까?”
그러자 모함메드 장관이 이를 부드득 갈면서 말했다.
-박쥐 같은 ADDI 놈들이 결국 트리폴리로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했소.
“……!”
이야기를 듣는 순간 혁권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