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44
444
ADDI가 자밀 의장과 손을 잡은 건 알고 있었지만, 서쪽 국경만 봉쇄한 채 주와라 지역에 못 박혀 있어서 크게 걱정은 하고 있지 않았다.
눈치를 보다가 전황이 샤라빌 대통령 쪽으로 기울면 다시 줄을 갈아탈 거라 생각했었는데, 병력을 움직이다니 정말 뜻밖이었다.
-그것 때문에 자밀 의장 측 거점인 트리폴리 대학을 치려고 준비 중이던 병력 일부를 급히 서부로 돌리고 있는 상황이오.
배후를 위협 받으면서 공격에 나설 수는 없을 테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자밀 의장 세력을 트리폴리에서 완전히 밀어 내고 전세를 굳히려던 계획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놈들을 막아 트리폴리를 지켜 내려면 더 많은 보급품이 필요하오.
표정을 굳힌 혁권은 잠시 고심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공항은 아직 안전하겠지요?”
-물론이오.
“그럼 보급품과 달러를 실은 수송기를 오늘 오후에 출발시키도록 하지요.”
-정말 그렇게 해 줄 수 있겠소?
“원래는 대금을 다 받고 움직여야 되지만, 급하다니 사정을 봐 드려야지요.”
그러자 어려움에 처해 있던 모함메드 장관은 크게 감격했다.
-고맙소. 미스터 존슨이야말로 진실한 파트너요.
“과찬이십니다. 말씀하신 것들은 늦지 않게 도착할 테니 안심하고 계십시오.”
-알겠소. 아, 참, 그리고 조만간 미스라타 민병대가 전투에 가담할 거요.
“그거 반가운 소식이군요.”
알할부시 사령관이 지휘하는 미스라타 민병대는 잘 훈련된 수천 명의 병력과 질 좋은 장비를 갖추고 있어 같은 편이 된다면 상당히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ADDI의 공세만 잘 막아 낸다면 블랙워터 용병과 미스라타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간악한 자밀 의장을 완전히 끝내 버릴 수 있을 거요.
“저도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요.”
샤라빌 대통령을 지지하면서도 병력을 움직이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미스라타 민병대가 왜 갑자기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모함메드 장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내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 분명했다.
통화를 끝낸 혁권은 즉시 그리스에 남아 있는 함단한테 연락해서 보급품을 트리폴리로 수송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반을 비롯해 임대한 수송기 3대가 루마니아에서 대기하고 있었기에. 화물을 실어서 가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소파에 등을 붙인 채 앞으로 전황이 어떻게 변할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탁자에 올려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방갑수의 이름이 떠 있는 걸 확인한 혁권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알아봤나?”
특유의 능글능글한 목소리로 방갑수가 이야기를 했다.
-손주아 이년이 생각보다 수완이 좋더군요. 뒤를 봐주는 스폰서가 아주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게 누구야?”
-김성균 태일건설 사장이었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자 그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김종원 회장의 장남인 그 김성균 사장을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으음.”
-모델을 교체하는 대신 태일건설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 아울렛 쇼핑몰 여섯 곳에 울츠 매장을 입점시켜 주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태일건설에서 운영하는 아울렛 쇼핑몰은 해외 명품을 위주로 운영했기에, 꽤 규모가 있는 SPA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울츠는 매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델 교체를 조건으로 입점을 시켜 주겠다고 하자 울츠 경영진에서 냉큼 요구를 받아들인 거였다.
-그리고 조사를 하면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게 뭐야?”
-태일건설에서 이번에 새로 방영되는 드라마에 제작 지원을 하고 광고도 두 편이나 붙인다고 합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혁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짐작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손주아가 그 드라마에 조연으로 출연한다고 합니다. 제목이 스타일이라고 하더군요.
울츠 모델에 이어서 드라마까지 끼어들다니 이 정도면 노골적으로 소현을 괴롭히려는 거였다.
혁권은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했어. 따로 말할 때까지 사람을 붙여서 계속 손주아를 감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혁권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필이면 김성균 사장이 손주아의 스폰서였다니 태일그룹하고는 정말 악연인 것 같았다.
재계 서열 상위권에 들어가는 태일 그룹을 배경으로 둔 김성균 사장의 존재가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괴롭히는 걸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설사 태일그룹 직계인 김성균 사장하고 싸움을 벌여야 된다고 해도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결심을 굳힌 혁권은 서늘한 안광을 번득이면서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설프게 힘자랑을 하다가 어떻게 되는지 곧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지.”
샤워를 마친 김성균이 밖으로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알몸에 가운만 걸친 손주아가 미끈한 다리를 드러낸 채 샴페인을 들고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즐겨 마시는 돔 페리뇽이었다.
진한 향과 특유의 툭 쏘는 맛이 나른해진 몸에 다시 생기를 돌게 만드는 것 같았다.
김성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쪽 팔을 손주아의 어깨에 둘러 가까이 끌어당기고는 가운 안으로 손을 넣어 탐스러운 젖가슴을 만지면서 입을 뗐다.
“새로 맡게 된 배역은 어때? 맘에 드나?”
그러자 손주아가 그에게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네, 그럼요. 제가 얼마나 드라마를 하고 싶어 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그러니까 자리 하나 만들어 줬잖아.”
“후훗. 아.”
얼굴을 부비며 아양을 부리던 손주아의 입에서 얕은 교성이 터져 나왔다.
가슴을 주무르는 그의 손놀림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한 탓이었다.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송충이가 지나다니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지만, 손주아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교태를 부리면서 하얗고 가느다란 손으로 능숙하게 김성균의 하체를 자극했다.
김성균의 호흡이 가빠지고 다시 한 번 방 안이 뜨겁게 달아오르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분위기를 깼다.
따르릉. 따르릉.
얼굴을 구긴 김성균은 수화기를 집어 들고는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쉬고 계신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본가로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그렇습니다.
고동욱 비서실장의 이야기에 화를 내려던 김성균은 살짝 굳은 표정을 지으면서 손주아의 허리를 잡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물었다.
“갑자기 부르시는 이유가 뭐야?”
일흔이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룹 경영권을 꽉 움켜쥐고 있는 김종원 회장의 호출에, 김성균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별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용산 드림 타워 문제로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으음.”
드림 타워 프로젝트는, 예전 용산 철도 정비창의 부지 442,000㎡를 매입해 대규모 쇼핑 센터와 금융 허브 그리고 초고층 아파트 두 동을 짓는 대형 건축 사업이었다.
땅값만 8조 원에 총사업비가 20조 원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는데, 태일그룹이 사활을 걸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바로 나갈 테니까 차를 대기시켜 놔.”
-알겠습니다.
김성균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몸을 일으키자 옆에 있던 손주아가 아쉬운 듯 말했다.
“가시는 거예요?”
“갑자기 일이 생겼어.”
“그럼 어쩔 수 없죠.”
손주아는 마치 갓 결혼한 새색시처럼 옷걸이에 걸어 둔 바지와 윗도리를 가져와서는 정성스럽게 챙겨 줬다.
넥타이를 맨 김성균은 가운을 입은 채로 서 있는 그녀를 가볍게 한번 안아 주며 부드럽게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또 연락하지.”
“기다릴게요.”
다소곳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는 손주아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한 그는 마지막으로 시선을 한번 던지고 문을 나섰다.
“…….”
문이 닫히고 마침내 혼자 남은 순간, 손을 흔들면서 김성균을 배웅하던 손주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싹 굳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김성균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거칠게 닦아 냈다.
“짜증 나.”
‘나이도 많아 가지고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 주제에.’
손주아는 얼마 전까지 그가 끈질기게 달라붙은 탓에 울긋불긋하게 남은 울혈들을 살피면서 입술을 비틀었다.
“모델에게 이런 자국을 남기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맘에 드는 구석이 없다.
기왕 몸을 섞을 거라면 잘생기고 젊은 남자가 좋은데 말이지.
하긴 그런 사내라면 굳이 돈으로 여자를 사는 짓 따윈 하지 않을 테다.
손주아는 몸에 남은 김성균의 흔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워 버리려는 듯 가운을 벗어 던지고 재빨리 샤워실로 들어갔다.
김종원 회장의 저택은 서울에서도 재벌 총수들이 모여 사는 걸로 유명한 이태원 부촌이었다.
사설 경비원이 근무하는 입구를 지나가 널찍한 골목 양쪽으로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담이 높다란 저택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김종원 회장의 저택은, 대지만 600평이 넘고 연면적 300평 규모로 지하 3층, 지상 2층으로 지어진 단독주택이었다.
태일건설에서 최고급 내부 장식과 외장재를 사용해서 지었는데, 공시지가만 100억 원이 훌쩍 넘어갔다.
김성균 사장을 태운 고급 세단이 입구 앞에 멈춰 서자 담벼락에 달린 CCTV로 신원을 확인하고는 육중한 철문이 한쪽으로 열렸다.
고급 세단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자 지체 없이 다시 철문이 닫혀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차 문을 열고 내린 김성균이 현관으로 들어서자 박상빈 비서실장이 서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박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직급은 낮았지만 회사 직원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김종원 회장을 모신 가신家臣 같은 존재였기에 김성균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일이 바쁘신 건 알지만 본가에 자주 들르십시오. 그러면 회장님께서도 많이 기뻐하실 겁니다.”
“노력하도록 하지요.”
“한참 전부터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작게 머리를 끄덕인 김성균은 고동욱을 남겨 두고 박상빈 비서실장을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 깔린 두툼한 융단을 밟으면서 서재로 들어서자 호사스럽게 꾸며진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 저택에나 있을 법한 거대한 샹들리에 같은 조명이 천장에 매달려 있고, 벽 한쪽 편과 책상 뒤까지 이어진 책장엔 척 보기만 해도 비쌀 것 같은 두꺼운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개중엔 오래되어 요즘엔 구하기 힘들 것 같은 영어 원서들도 꽤 있었으며, 대부분 새 책보다는 어느 정도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장서들이 많았다.
한쪽 벽에는 사냥을 갔다가 잡은 사슴 머리 박제가 전리품처럼 걸려 있었다.
고집스러운 얼굴의 김종원 회장이 값비싼 마호가니 소파에 혼자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곤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긴장한 채 서 있는 김성균을 아래위로 쳐다본 김종원 회장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오라고 한 지가 언젠데 뭘 하느라 이제야 도착한 거야!”
“죄송합니다.”
얼굴을 보자마자 김종원 회장이 화부터 내자 김성균은 머리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쯧. 거기 앉아.”
“예.”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박상빈 비서실장이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