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45
445
김종원 회장은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용산 드림 타워 프로젝트는 잘 진행되고 있는 거냐?”
눈길을 받은 김성균 사장은 허리를 바로 펴면서 대답했다.
“네. 다음 달에 건축 승인이 떨어지면 곧장 지반 공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주변 주민들하고 시민 단체에서 시끄럽게 군다고 하던데 불필요하게 공사가 지체되는 일은 없겠지?”
“공사 예정 부지와 시청에서 환경 영향 평가를 다시 하라고 데모를 벌이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미 승인을 내주기로 시장 측하고 이야기가 다 되어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동안 시장한테 먹인 돈이 얼만데 당연히 그래야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은 김종원 회장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놨다.
“옛날하고 달리 여론이 안 좋게 흐르면 사업을 하기가 힘들어지니까 괜히 더 귀찮아지기 전에 손을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하찮은 주민들과 시민 단체 따위를 왜 신경 쓰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룹 경영권을 꽉 움켜쥐고 있는 아버지의 지시였기에 김성균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였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김종원 회장의 눈에 거슬렸다.
선대와 함께 온갖 고생을 하면서 그룹을 키워 온 자신과 달리, 날 때부터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어려운 것 하나 없이 주위에서 떠받들리며 자라서 그런지 독선적이고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나이가 들면 철이 들겠지, 하고 방관하던 것이 잘못되었나 이제 와 새삼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자식들 중에선 그나마 나은 놈이 저 모양 저 꼴이니 김종원 회장은 혀를 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는 속으로 화를 삭이며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데 이제 와 화를 내려니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박 실장.”
“예.”
“그걸 넘겨줘.”
김종원 회장의 말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박상빈 비서실장이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USB 스틱을 하나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거기 비자금 계좌하고 OTP가 들어 있어.”
턱으로 USB를 가리키면서 김종원 회장이 말을 이었다.
“천대업 의원하고 미리 이야기가 다 되어 있으니까 거기서 돈을 찾아 넘겨주도록 해.”
천대업 의원이라면 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집권 여당의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는 정권 실세였다.
10조 원이 넘는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하려고 금융권과 협상 중인 프로젝트 파이낸싱 일명 PF 대출을 받기 위한 뇌물이라는 걸 김성균은 바로 눈치챘다.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명이니까. 이번 기회에 만나서 친분을 잘 다져 놓도록 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심복인 박상빈 실장을 시켜도 되는 일이었지만 굳이 아들한테 맡기는 건, 실세인 천대업 의원과 끈을 만들어 주려는 의도였다.
김성균이 USB를 챙겨 넣자 김종원 회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네 동생처럼 실수하지 말고 똑바로 처리하란 말이야.”
스위스 은행에 넣어 둔 비자금을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몽땅 털려 버린 김인철의 일을 거론하자 김성균은 자신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 막내하고 다릅니다.”
“그래. 두고 보도록 하마.”
작게 머리를 끄덕인 김종원 회장은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면서 그만 나가 보라는 듯이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일을 끝내고 결과를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자 닫힌 문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종원 회장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면서 혀를 찼다.
“쯧. 저놈은 다 좋은데 너무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것이 문제야.”
그러자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준 박상빈 실장이 김성균을 두둔하듯 말했다.
“소극적인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많은 부하 직원들을 거느리고 회사를 이끌어 가는 오너라면 저런 자신감이 오히려 득이 될 겁니다.”
“하긴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시큰둥하게 대꾸하던 김종원 회장은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밖으로 내친 막내아들의 근황을 물었다.
“인철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나?”
형제들 가운데 제법 똘똘하고 욕심도 있던 막내였다.
하지만 비자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가 큰 사고를 치고는 교도소에 잠깐 들어갔다가 특사로 풀려난 이후 쫓아내듯 미국에 보내 놓긴 했지만, 그 성질머리에 얌전하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조용히 근신하고 계십니다.”
“정말이야?”
김종원 회장의 얼굴에 못 믿겠다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많이 반성하고 있나 봅니다.”
“허!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하지 그러나. 그놈 성깔이 어떤 성깔인데 이제 와서 반성은 무슨. 그런 척만 하는 거겠지.”
“아무리 막내 도련님이라도 회장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는 거겠죠.”
그것도 다 돈줄을 내가 쥐고 있으니 그렇지, 하고 김종원 회장은 속으로 삐딱한 생각을 하며 비웃듯 입술 끝을 비틀었다.
“이제 슬슬 불러들이는 걸 고려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평생 연을 끊을 것도 아닌데 계속 미국에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냐는 식으로 박상빈 실장이 김종원 회장을 설득했다.
“아냐. 그놈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아직 일러.”
그래도 김종원 회장의 뜻은 완강했다.
그는 담뱃재를 털면서 박상빈 실장에게 엄한 눈빛을 던졌다.
“자네도 괜히 막내 놈한테 헛바람 넣지 말게. 불쌍한 척해도 속아 넘어가지 말란 말이야.”
이번에 단단히 버릇을 고치겠다는 그의 다짐은 굳건한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자식 단속이라도 하려는 건지 뒤늦게 훈육을 하려는 모양새였지만, 머리통이 굵을 대로 굵어진 아들들이 과연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까 싶었다.
“안녕하세요.”
“소현 씨, 그새 더 예뻐진 것 같아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밴에서 내린 소현은 촬영장에 들어서자마자 활짝 웃는 얼굴로 분주하게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스태프들을 찾아다니면서 한 명 한 명 반갑게 인사를 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이런 싹싹함에 스태프들과의 거리를 상당히 좁힐 수 있었고 그녀에 대한 평가도 아주 좋아졌다.
“소현 씨, 일찍 나오셨네요.”
작은 슬링백을 어깨에 멘 조연출이 알은척을 하자 소현이 살짝 머리를 숙였다가 바로 하며 말했다.
“예. 그런데 PD님은 안 보이시네요?”
“아, 그게 일이 조금 있으셔서 늦게 나오실 겁니다.”
말을 머뭇거리면서 살짝 얼굴을 굳히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소현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다.
“30분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메이크업을 받고 계세요.”
“네.”
대기실로 이동한 소현은 전속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최현정이 도구들을 늘어놓는 동안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거울을 바라봤다.
환한 조명이 달린 거울에 본능적으로 얼굴을 체크하고 있던 소현은 ‘시작할게요.’ 하는 최현정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순순히 눈을 감았다.
조명에 화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베이스를 몇 겹이나 얇게 까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만 해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파우더를 묻힌 큰 브러쉬로 얼굴 전체를 쓸어 준 후 마지막으로 픽서를 뿌린 채현정은 이제 눈이랑 입술 색조만 하면 끝난다며 소현을 위로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힘들죠? 물이라도 줄까요?”
“네, 주세요.”
촬영 전에 식사는 금물이었으므로 거의 굶은 것이나 다름없는 몸에 수분 보충이라도 열심히 해 줘야만 했다.
“입가에 화장이 지워지면 안 되니까 빨대 꽂아 드릴게요.”
소현은 최현정이 건네주는 콜드컵을 고맙게 받아 들고 마른 목을 축였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대기실 문이 열리면서 남자 주인공 어머니역을 맡고 있는 중견 배우인 임은성이 매니저와 함께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소현이 먼저 인사를 하자 그사이 제법 친해진 임은성이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지난번에 준 마스크 팩 고마웠어. 붙이고 있으니까 피부가 한결 깨끗해지는 기분이더라고.”
“혹시 트러블 같은 건 없으셨어요?”
“괜찮던데.”
“그럼 다행이네요.”
임은성은 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소현의 옆자리로 가서 앉으며 대화를 계속 이어 갔다.
“오늘 첫 신 촬영이지?”
“네.”
“지난번에 보니까 처음 대본 리딩 때 봤던 것보다 연기가 훨씬 좋아졌더라.”
“정말이세요?”
“나 빈말 못하는 거 알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랫동안 연기를 해 온 대선배한테 잘한다는 칭찬을 듣자 소현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느낀 대로 이야기를 해 주는 건데 뭘.”
마음과 달리 무심하게 말을 내뱉던 임은성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이야기를 했다.
“참, 얼마 전에 스칼렛 역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지.”
“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촬영을 코앞에 두고 배역을 교체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몰라.”
고운 이마를 살짝 찡그린 채 불만을 드러내는 모습에 말을 거들기도 애매했던 소현은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그러고 보니까 새로 배역을 맡은 사람이 모델 출신이라고 하던데 잘하면 아는 사이일 수도 있겠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소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델 출신이라고요?”
“그렇다던데. 얼마 전까지 모델 활동을 했었다고 들었어.”
모델 출신들이 꽤 많았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에 여자 배우는 몇 명 되지 않았기에 소현은 누군지 궁금해졌다.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대기실 문이 열리면서 아까 봤던 조연출이 안으로 들어왔다.
“소현 씨, 5분 뒤에 촬영 들어가니까, 나와서 준비하세요.”
“네. 선배님, 저 먼저 나가 볼게요.”
“그래. 잘하고 와.”
개인 스태프들과 함께 대기실을 나온 소현은 한쪽에 세워진 세트장으로 가다가 한쪽에 서서 조연출하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진 PD를 발견하곤 얼른 다가가 인사를 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 소현 씨, 대본은 다 외워 왔지?”
“예.”
“이번 신은 NG가 나면 다시 찍기가 쉽지 않으니까 가급적이면 한 번에 가자고.”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지만 신인이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소현은 일부러 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럴게요.”
“좋아. 조명 세팅만 다 끝나면 바로 슛 들어갈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
“예.”
스태프들이 움직이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한쪽 구석에 물러나려고 하던 찰나, 조감독이 김진 PD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PD님, 저기 손주아 씨가 왔는데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우뚝 발을 멈춘 소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조감독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보니, 손주아가 소속사 사장인 도정인과 함께 촬영장 안으로 막 들어서는 중이었다.
“……!”
설마 손주아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소현은 아까 대기실에서 임은성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자신이 원해서 배역을 교체한 것이 아니었기에 손주아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김진 PD는 대번에 얼굴을 구기며 짜증을 냈다.
“쟤는 오늘 촬영도 없는데 왜 나온 거야?”
“그, 글쎄요.”
그때 도정인 사장이 미소를 가득 띤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PD님, 여기 계셨군요.”
그러자 김진 PD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촬영이라고 전달했을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냥 오늘은 감독님한테 인사도 드리고 겸사겸사 현장 분위기를 익히라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