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96
496
날이 밝아 올 때쯤 혁권과 부하들은 친러시아계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도네츠크 시에 도착했다.
야밤인 데다 샛길로만 이동해서 그런지 다행스럽게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마주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휴전 중이지만 이곳이 교전 지역이라는 걸 알려 주듯 도시 외곽에 설치된 반군 검문소에는 삼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러시아제 장갑차인 BMP-3 한 대가 언제든지 불을 뿜을 수 있게 100mm강선포로 전방을 겨누고 있었고,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진지에는 완전무장 한 반군 병사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인데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멀리서 전조등 불빛을 발견하고는 비상이 걸린 모양이었다.
“정지! 정지!”
AK47 자동소총을 든 반군 병사 한 명이 길 가운데 서서 큰 소리로 외치자 알아바디는 검문소를 5미터쯤 남겨 두고 사륜구동 차를 멈추어 세웠다.
여러 개의 라이트 불빛이 일행을 향해 비추자 혁권은 눈가를 찡그리면서 부하들과 함께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자 반군 병사 네다섯 명이 일행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 뭐라고 소리를 쳤다.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양쪽 팔을 들어 보인 혁권은 그런 반군 병사들을 보면서 영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바실리 소령을 불러 주시오! 존슨이 왔다고 하면 알 거요.”
“지금 바실리 소령님이라고 했나?”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정색을 한 채 병사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렇소.”
혁권을 위아래로 훑어본 장교는 러시아 억양이 강한 영어로 투박하게 물었다.
“소령님과 무슨 관계지?”
“사업상 개인적인 친분이 있소.”
“흐음.”
낮게 침음을 흘리면서 장교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혁권이 재차 이야기를 했다.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연락을 해 보시오.”
도네츠크에 있는 반군 사령관인 바실리 소령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나 혁권의 당당한 태도에 정말로 친분이 있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홀대를 했다가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기에 잠시 고민하던 장교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처음보다 정중해진 모습으로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장교는 일행을 검문소 뒤편에 위치한 군용 천막으로 안내하고는 혁권이 부상을 입은 걸 보곤 위생병을 불러 간단히 응급조치까지 해 줬다.
“다행히 총알이 박히지 않고 관통했습니다. 일단 급한 대로 지혈제를 뿌리고 소독을 했지만 빨리 제대로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겁니다.”
“고맙소.”
피로 흠뻑 젖은 손수건 대신 깨끗한 붕대로 부상 부위를 꼼꼼하게 감아 준 위생병이 구급가방을 챙겨 천막을 나가자 하킴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만하길 다행입니다.”
입술이 바짝 마른 혁권은 상처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살짝 눈가를 찌푸리면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방향이 조금만 옆으로 비껴나가 급소를 맞았다면 정말 위험했을 겁니다.”
정색을 하며 하킴이 말하자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붕대를 감아 놓은 팔뚝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바실리 소령이 보스를 만나 줄까요?”
텐트 안에 일행뿐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낮춘 하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혁권이 허리를 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압둘라흐만을 통해서 이야기를 해 놨으니 염려할 필요 없어.”
농장을 빠져나온 혁권이 러시아계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도네츠크로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위성전화로 압둘라흐만과 통화를 하는 거였다.
무턱대고 반군 점령지로 들어가기보다는 이쪽 바닥에 연줄이 많고 그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압둘라흐만을 통해 미리 안전을 확보해 두려는 생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도네츠크 주둔 반군 사령관인 바실리 소령하고 연결되어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고 편의를 제공받기로 약속이 됐다.
30여 분쯤 지났을까 검문소 책임자인 장교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턱수염을 더부룩하게 기른 사내 한 명과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내는 단단한 체격에 눈빛이 아주 날카로웠는데, 어깨에 붙은 계급장을 보고 상대가 바실리 소령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일행을 스윽 훑어본 바실리 소령은 혁권한테서 시선을 멈추고는 투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미스터 존슨이오?”
“그렇습니다.”
혁권은 상대를 똑바로 마주 보면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작게 머리를 끄덕인 바실리 소령이 먼저 한쪽 팔을 내밀며 말했다.
“바실리요.”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압둘라흐만 씨한테 들으니 이쪽에서 꽤 알아주는 거물이라고 들었소.”
“그냥 밥벌이나 하는 정도입니다.”
혁권의 대답에 바실리 소령은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타고 온 차를 보니까 어디서 한판 거하게 일을 치르고 온 모양이오.”
“사업상 약간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대충 둘러대자 바실리 소령은 애초에 크게 관심이 없었는지 깊이 따져 묻지 않았다.
“뭐,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고, 차를 가져왔으니 함께 갑시다.”
바실리 소령을 따라 천막을 나온 일행은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제 군용 고기동 차량인 GAZ-2975에 나눠 탔다.
어느새 날이 완전히 밝아진 가운데 드러난 도네츠크 시의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곳곳에 부서지고 깨진 채 내부 철근을 그대로 드러낸 건물들이 흉물스럽게 서 있었고, 도로에는 불에 시커멓게 탄 차량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도로도 온전치 않아 차가 수시로 덜컹거리면서 흔들렸다.
부상 부위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애써 참고 있을 때 바실리 소령이 안주머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필요한 물품 내역이오.”
혁권이 종이를 받아 펼쳐 보자 각종 의약품 이름과 수량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바로 그를 도와주는 대신 주기로 약속한 대가였다.
“대략 40만 달러어치 정도가 될 거요.”
한화로 5억이 조금 안 되는 돈이었지만, 그와 부하들의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아깝지 않았다.
종이를 다시 접어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그가 말했다.
“약속대로 일주일 안에 물품을 보내도록 하지요.”
바실리 소령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믿고 기다리겠소. 임시 활주로에 로스토프 온 돈Rostov-on-Don으로 가는 수송기를 붙잡아 뒀으니 바로 그걸 타고 여길 떠나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잠시 뒤 양쪽의 치열한 교전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도네츠크 국제공항 한쪽에 마련된 임시 활주로에 도착한 혁권과 부하들은 대기 중이던 쌍발 프로펠러 수송기에 올라탔다.
수송기는 곧장 이륙해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충분한 고도까지 올라가 수평 비행에 들어가자 혁권은 그때서야 긴장을 조금 풀었다.
키예프 보안국 청사.
“로켓 완성품과 기술 자료를 회수하지 못했다는 거야!”
버럭 고함을 내지른 부쉬코프 방첩 국장이 앞에 있는 책상을 세게 내려쳤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도네츠크에서 돌아오자마자 부쉬코프에게 결과 보고를 한 아놉카 대위는 죄인인 양 어깨를 늘어뜨린 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누가 그딴 말을 듣고 싶다고 했어!”
“바로 추격을 했습니다만 반군 점령지로 넘어가 버리는 바람에…….”
“영악한 놈들.”
우크라이나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반군 점령지로 도망치다니, 보안국 입장에서는 제대로 허를 찔린 거였다.
부쉬코프 부장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야몰렌코의 은신처에서 도주한 혁권을 붙잡는 건 불가능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불도그처럼 찡그린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던 부쉬코프 부장은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태도로 고개를 쳐들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으면 어쩔 수 없지.”
“어쩔 생각이십니까?”
아놉카 대위의 물음에 부쉬코프 부장은 한숨을 쉬며 앉아 있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부에 올릴 보고서에서 존슨에 대한 부분을 빼고 야몰렌코가 훔쳐 낸 엔진 완성품과 기술 자료는 교전 중에 훼손된 걸로 하도록 해.”
지시를 들은 아놉카 대위가 눈을 크게 뜨며 부쉬코프 부장을 쳐다봤다.
“보고서 내용을 조작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그건…….”
머뭇거리면서 말끝을 흐리자 부쉬코프 부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책상 앞에 서 있는 아놉카 대위를 사납게 쳐다봤다.
“자네가 일을 똑바로 처리했으면 이럴 필요가 없었을 거 아냐!”
“…….”
따가운 질책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아놉카 대위는 다시금 머리를 아래로 떨궜다.
그 모습에 부쉬코프 부장이 애써 화를 가라앉히면서 말을 이었다.
“이대로 보고서를 올린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야몰렌코를 사살했지만 결과적으로 엔진 완성품과 기술 자료 유출을 막지 못한 것이 되니, 자네는 물론이고 나까지 문책을 면하기 어려울 거야.”
지금까지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아니, 어쩌면 최악의 경우 책임을 지고 옷을 벗게 될지도 몰랐다.
아놉카 대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걸 본 부쉬코프 부장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필요 없이, 엔진 완성품과 기술 자료는 교전 중에 소실燒失된 걸로 하고 이번 일을 묻자고.”
“그랬다가 나중에 외부로 유출된 것이 밝혀지면 어떻게 합니까?”
처음과 달리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부쉬코프 부장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면서 걱정할 것 없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RD-250 로켓엔진은 우리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전이 벌어지기 전에 러시아로 250개가 넘게 수출됐으니, 그쪽에서 유출된 거라고 하면 되니까 염려하지 마.”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충분한 변명거리가 있는 데다 특히 러시아와는 불편한 관계이니만큼 그쪽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새로 보고서를 만들어 와.”
“알겠습니다.”
아놉카 대위가 몸을 돌려 나가자 부쉬코프 부장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처음 가져왔던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쓸데없는 수고를 했군.”
그렇게 자조적인 말과 함께 부쉬코프 부장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서는 보고서를 문서 분쇄기에 집어넣었다.
종이가 갈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담배 연기를 후 내뿜었다.
며칠 뒤 세바스토폴 항구.
신형 볼보 승용차 한 대가 시멘트로 지어진 창고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곳에 멈추어 서더니 혁권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여기야?”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혁권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묻자 하킴이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가 보자고.”
발걸음을 뗀 혁권은 부하들과 함께 페인트로 25라고 숫자가 적힌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뿌연 먼지가 가득한 창고에는 이런저런 잡동사니들과 함께 컨테이너 박스 하나가 보관되어 있었다.
“열어 봐.”
혁권의 말에 알아바디와 라미가 준비해 온 절단기로 자물쇠를 잘라 내고는 컨테이너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파란색 방수포를 걷어내자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꼼꼼하게 포장된 RD-250 로켓엔진 완전품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로군.”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엔진 완성품을 만져 본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하킴을 보며 말했다.
“괜히 귀찮은 날파리들이 꼬이기 전에 화물을 배에 실어.”
“알겠습니다.”
그날 오후 엔진 완성품이 숨겨진 컨테이너는, 창고에서 꺼내 대기 중이던 화물선에 실려 세바스토폴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