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97
497
# 편성 확정
인천 공항 출국장.
여행용 캐리어를 한 손에 든 소현이 여주인공을 보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들어가 볼게.”
“그래. 몸조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언니한테 연락해.”
“아이 참. 이제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평소에 덜렁거리니까 그러지.”
“쳇.”
볼을 부풀린 채 입술을 삐죽이던 소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했다.
“언니도 이제 그만 도민 오빠 마음을 받아 줘.”
그러자 여주인공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도민 씨 이야기를 왜 꺼내?”
“언니도 도민 오빠를 사랑하잖아.”
“아, 아냐.”
“거짓말하지 마. 언니도 이제 감정에 솔직해져 봐. 도민 오빠 없이 살아갈 수 있겠어?”
“…….”
“오빠가 비밀로 해 달라고 했지만, 지난번에 언니가 독감에 걸려서 혼자 있을 때 대구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달려와서 병원에 데려가고 내가 올 때까지 도민 오빠가 옆을 지키고 있었어.”
처음 듣는 이야기에 여주인공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이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아무튼 너무 늦기 전에 마음을 표현해. 알았지? 그럼 난 이제 들어간다.”
소현이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멍하니 서 있던 여주인공이 이내 몸을 돌려서 공항 밖으로 뛰어 나갔다.
모니터로 그걸 지켜보던 김진 PD가 컷을 외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았어!”
“잘 찍혔어요?”
여주인공 역을 맡은 조미연이 옆으로 다가오면서 물었다.
드라마가 막바지로 가면서 거의 휴식 없이 매일 철야 촬영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인지 상당히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재촬영 없이 끝내도 되겠어.”
“다행이네요.”
“이제 3회만 더 찍으면 마지막 회니까.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
“쪽대본 촬영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기진 PD가 조미연을 다독이고 있을 때 소현이 앞으로 와서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 소현 씨도 고생 많았어. 이번 신이 마지막이었지?”
“네.”
아직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지만 여동생 역을 맡은 그녀는 모델로 성공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는 걸로 마무리가 돼 더 이상 촬영이 없었다.
처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신인치고는 연기력도 나쁘지 않고 톡톡 튀는 감초 노릇을 잘해 줬기에 한숨만 나오게 하는 손주아하고 달리 김진 PD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편집하면서 보니까 조금 어색했던 것도 점점 나아지더라. 연기 수업을 열심히 들었나 봐.”
“다른 분들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야. 입만 산 녀석들도 많은데 소현 씨 정도면 양반이지.”
그러면서 김진 PD는 한 손에 말아 쥔 대본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음 작품도 함께하자고.”
“정말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소현이 인사하자 옆에 있던 조미연도 웃으면서 그녀를 봤다.
“소현 씨, 진짜 고생 많이 했어.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은 부분도 많았을 텐데. 촬영이 완전히 끝나려면 아직 조금 남았지만 나중에 쫑 파티할 때 꼭 봐.”
“네, 선배님!”
‘여러모로 신세 많이 졌습니다.’ 하고 김진 PD와 조미연에게 인사한 소현은 촬영장을 돌면서 장비를 챙기고 있는 나머지 스태프들에게도 그동안 감사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촬영하는 내내 스태프들에게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서 원래도 평이 좋았지만, 손주아라는 상대적으로 깽판을 치고 다니며 구설수를 몰고 다니는 비교 대상이 여전히 건재하다 보니 개중에는 가지 말라고 붙잡는 이도 더러 있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일들을 뒤로하고 마침내 긴 촬영을 끝낸 소현은 런웨이를 끝내고 내려올 때와는 또 다른 성취감과 후련함에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낯선 분야로의 도전을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 정도면 나름대로 합격점을 줘도 되지 않을까?
소현은 조심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며 벅찬 가슴을 안고 마지막으로 촬영장을 돌아본 후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떠났다.
소현이 한창 드라마다 화보다 바쁜 와중에도 두 친구들은 여행 계획을 착착 준비하고 있던 모양인지, 이제 촬영이 다 끝났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바로 며칠 뒤에 KTX를 타고 출발하니 역에 집합하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때마침 회사에서도 큰일을 하나 끝냈으니 집에서 좀 쉬라며 스케줄을 비워 준 덕에 소현은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갈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여행에는 역시 삶은 계란이지.”
‘먹을래?’ 하면서 지수가 건넨 계란을 소현이 받아 들었다.
“원래 기차로 여행할 때 먹는 거 아니었어?”
“KTX는 기차 아니니.”
“하긴.”
지수가 준 계란은 속이 촉촉하게 되어 있고 약간 간이 되어 있어서 밥 대신 먹어도 좋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런데 우리 호텔은 어디로 예약했어? 나 하나도 들은 게 없는데.”
“백사장 바로 앞에 있는 거.”
스마트폰으로 부산 맛집을 검색하고 있던 도연이 대답했다.
“도연이 얘 취향이 워낙 까다롭잖아. 난 그냥 바다가 보이는 방이면 비즈니스호텔이라도 괜찮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펄쩍 뛰더라.”
“잠은 좋은 데서 자야 된다고.”
“5성급 호텔이니까 당연히 잠은 솔솔 오겠지.”
호텔 이름이고 여행 일정이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몸만 덜렁 따라온 소현은 처음 듣는 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와, 돈 많이 쓴 거 아냐?”
“생각보다는 쌌어. 성수기도 지났으니까 값이 내려갔거든.”
“저번에 지수가 말한 대로네.”
“대신 해수욕은 못할 것 같지만. 이럴 거면 뭐 하러 부산까지 내려가나 몰라.”
“아, 왜? 호텔에 따뜻한 물 나오는 야외 스파도 있다니까 거기서 놀면 되지.”
지수는 놀러 가는 것이 마냥 좋은 듯 실실 웃는 얼굴로 도연의 말을 가볍게 흘러 넘겼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약 2시간 30분.
역에서 내려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찾은 일행은 곧장 해운대 바닷가로 향했다.
“차창 좀 열어 봐 봐. 오, 벌써 바다 냄새난다!”
지수가 짧게 자른 단발머리를 흩날리며 불어오는 바람 냄새를 킁킁 맡았다.
“진짜네. 바람에서 소금기가 느껴져.”
뒷좌석에 일행의 짐과 함께 앉은 소현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풍경에 들뜬 시선을 던졌다.
해운대는 서울의 강남이나 여의도 같은 최고 번화가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도심지라 높게 쭉쭉 뻗은 빌딩들과 더불어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게다가 성냥갑처럼 특색 없는 건물이 아니라 건축 디자이너의 독특한 설계가 들어간 신기한 모양의 빌딩도 보였다.
해변 끝자락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저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밤에 보면 등대처럼 멋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왜 굳이 부산까지 내려오냐며 삐딱하게 굴던 도연이도, 막상 도착하니 여행을 왔다는 실감이 나는 듯 평소보다 약간 높아진 음색으로 지수와 신나게 대화를 나누며 호텔까지 기분 좋게 드라이빙을 했다.
진입로로 들어와 호텔 입구에 차를 세우니 제복을 차려입은 직원이 차 문을 열어 주며 일행이 내리는 것을 도왔다.
“트렁크에 짐이 더 있습니까?”
“아뇨, 이것뿐이에요.”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기 때문에 각자 하나씩 든 캐리어를 제외하면 다른 짐은 없었다.
직원에게 주차를 맡기고 로비로 들어온 일행은 제법 넓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호텔 내부를 둘러보면서 괜찮네, 하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연이 체크인을 하고 카드키를 받아서 돌아오자 세 사람은 로비를 배경으로 야무지게 인증 샷까지 찍은 다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몇 층이야?”
“13층. 코너 쪽에 있는 제일 큰 방이야.”
푹신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복도를 지나 가장 끝에 있는 1314호 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다가 보일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실내는 두꺼운 커튼을 쳐 놔 어두컴컴했다.
“야, 불 켜, 불!”
왜 이리 어두워, 하고 툴툴거리던 지수는 제일 먼저 안에 들어간 소현이 거실 쪽에 있는 커다란 커튼을 활짝 젖히자 드러난 풍경에 입이 쏙 들어갔다.
“멋있다!”
“와! 진짜 바다가 한눈에 보이네.”
길이가 긴 산책로와 피서객들이 줄어든 덕분에 한층 깨끗해진 백사장, 그리고 시야에 가득 담기는 바다를 보자마자 흥분한 지수와 도연이 창문에 바싹 달라붙어 구경했다.
물론 소현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들뜬 눈으로 해운대 백사장을 보면서 진짜 휴가를 왔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느꼈다.
“저기 커다란 강아지 좀 봐. 아이, 귀여워.”
털이 북슬북슬한 대형견이 주인과 함께 산책하는 것을 발견한 지수가 우웅, 하고 연신 귀엽다는 말을 남발했다.
생긴 것처럼 성격도 얌전한 편인지 보통은 대형견이 주인을 운동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인데, 저 개는 다른 강아지를 보아도 짖지도 않고 가끔은 느리게 따라오는 주인을 기다려 주기도 했다.
“이 근처 사는 주민이겠지?”
“저만한 덩치라면 차 안에 욱여넣어도 안 들어갈 걸. 원래 해운대에 부자들이 많이 산대.”
“그러고 보니 연예인 누구더라, 저기 마린 시티 쪽에 아파트를 사 놓고 여름용 별장처럼 쓴다는 말도 들었는데.”
“아, 정말? 누군데?”
“몰라. TV보다가 대충 들었어.”
“소현이 너도 이번 드라마로 뜨면 한 채 사면 되겠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먼저 창문에서 떨어진 도연은 밖의 먼지가 묻었으니 샤워부터 하겠다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 사람 중 제일 성실한 축인 소현이 짐을 풀고 냉장고를 열어 안의 생수와 종류별로 갖춰진 티백 등을 보며 방을 살피는 동안, 지수는 바깥 구경을 다 끝내고 호텔 측에서 준비해 준 웰컴 초콜릿을 우물거리면서 빈둥거렸다.
“그런데 방이 꽤 넓네. 호텔에서 3인실은 드문데.”
“2인실은 더 싼 게 많았는데, 그럼 엑스트라 베드를 써야 하잖아. 도연이가 차라리 돈 좀 더 줘도 제대로 된 침대가 있는 게 좋다면서 직접 전화로 예약했어.”
“그건 도연이 말이 맞는 거 같아. 잠은 편하게 자야지.”
“그래그래, 아무렴 어때. 으아~ 침대 진짜 푹신푹신하다.”
깔끔하게 주름 하나 없이 각이 잡힌 시트 위를 지수가 마구 뒹굴어 흩어 놓았다.
아마 겨울에 눈이 내리면 제일 먼저 발자국을 남기겠다며 뛰쳐나가는 것도 지수가 아닐까.
1시간 정도 객실에서 잠시 쉰 다음, 밖에서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은 일행은, 밤이 되자 각자 준비한 수영복을 입고 호텔이 자랑하는 야외 스파에 뛰어들었다.
곳곳에 달려 있는 주홍빛 조명이 은은하게 빛을 밝혔고, 스파 안에서는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근 채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바다를 구경할 수도 있었다.
저녁에는 제법 바람이 차가워 두툼한 가운을 두르고 스파로 입장한 일행은 안쪽에 있는 바에서 만들어 주는 칵테일을 하나씩 들고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너희 그거 아니, 여기 물이 온천수래.”
“어머, 정말?”
소현이 처음 들었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데서도 온천이 나오는구나.”
“피부에 좋다니까 오래 놀다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