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98
498
킥킥 웃으면서 속닥이는 지수의 말에 소현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진짜 지수 네 말대로 휴가철을 피해서 온 게 괜찮은 선택이었던 거 같아.”
소현은 아래쪽에선 김이 뜨끈뜨끈 올라오는 따뜻한 물 덕분에 노곤하게 풀어지는 몸과 반대로 찬 바람을 쐬어서 서늘해진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여름에 왔으면 완전 이열치열이잖아.”
“그치? 야외 수영장이 따로 있긴 해도 한참 성수기라 애들이랑 섞여서 제대로 수영도 못 했을 거 아냐. 그리고 역시 온천은 추울 때 즐겨야 제맛이지.”
“모처럼 비키니까지 새로 샀는데 제대로 뽐내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혁권 오빠는 요즘 뭐 해?”
“또 외국 갔어.”
“어휴. 진짜 엄청 바쁜 오빠네.”
그때 멀찍이서 칵테일을 벌써 한 잔 마셔 버리고 또 새로 사 온 도연이 친구들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얘기해?”
“불쌍한 혁권 오빠 이야기.”
“그 오빠가 왜?”
“여자 친구가 모처럼 새 비키니를 입었는데 멀리 가 있어서 구경도 못 하잖아.”
“아하.”
도연이 알겠다는 것처럼 흐음, 하고 코웃음을 흘렸다.
“아쉬운 기회를 놓쳤네.”
“어휴, 너희들 진짜 이럴래?”
소현이 자꾸 놀리지 말라고 물방울을 튕기자 지수가 막 웃으면서 도망갔다가 야, 야, 하면서 다시 돌아왔다.
“나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뭔데.”
“혁권 오빠한테 인증 샷 보내 주자. 여름은 지났어도 이런 예쁜 비키니를 입었는데, 달콤한 추억 정도는 하나 있어야지.”
“뭐야, 그게~.”
“자, 자, 튕기지 말고.”
포즈를 취해 보라고 강요하는 지수 덕에 결국 소현이 이기지 못하고 살짝 바깥쪽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자세를 잡았다.
“좀 더 요염하게!”
“이, 이렇게?”
“좋아. 혁권 오빠가 당장이라도 뛰어올 것같이 섹시한 포즈를 취하는 거야.”
갑자기 프로 사진작가에 빙의된 듯 몸을 이리저리 꼬면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 대는 지수와 엉겁결에 떠밀려 모델이 되어 버린 소현을 멀리서 도연은 멀리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보았다.
“저, 혹시 무슨 촬영 하나요? 저분, TV에 나오는 거 본 것 같은데…….”
우연히 지나가다가 소현을 알아본 사람이 물어본 말에 도연은 그림에 그린 듯한 미소로 답했다.
“글쎄요. 일행이 아니라 모르겠네요.”
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랍니다, 하고 도연은 야외 스파에서 때아닌 사진 쇼를 벌이고 있는 친구들을 단호하게 외면했다.
“앞으로 5분 뒤에 이륙할 예정입니다.”
스튜어디스의 말에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하킴이 준 브랜디로 목을 축였다.
이제 한국까지 오랜 비행시간을 견뎌야 했으니 술을 먹고 일찌감치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보스,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음.”
총격전 때 어깨에 맞은 총상이 신경 쓰이는 듯 하킴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상처 부위를 다 꿰매고 진통제를 잔뜩 먹어서 가끔씩 욱신거리는 것 외엔 그다지 불편한 점이 없었으나,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도 안 될 말이라 혁권도 제일 먼저 병원에 들러 제대로 다시 치료를 받을 생각이기는 했다.
다행히 로스토프 온 돈에서 상처를 봐 준 의사가 실력이 제법 좋은지 덧나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마 붕대를 풀어서 꿰맨 부위가 잘 아물고 있는지 확인하고 항생제와 진통제를 처방해 준 뒤 심신의 안정을 취하라는 말을 들을 확률이 매우 높긴 했지만 말이다.
혁권은 회복력이 빠른 편이라 아마 1, 2주 정도면 팔을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편한 자세로 비행기 시트에 기대 잠이 들 준비를 하고 있던 혁권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스마트폰을 꺼냈다.
우크라이나에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동안 소현과 연락도 못 했는데, 무슨 메시지라도 들어와 있지 않을까.
약간 기대를 가지고 스마트폰을 켠 혁권은 여섯 건의 메시지가 차례로 뜨는 것을 보고 흐뭇하게 웃다가 금방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액정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비키니를 입고 수줍게 웃고 있는 소현이었다.
야외 수영장 같은 곳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발끝은 살짝 물에 담그고 양 볼이 발그레하게 익어 이쪽을 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지만, 그보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노출이 심한 소현의 비키니였다.
높이 틀어 올린 머리카락 덕분에 길고 가는 소현의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물 때문에 촉촉이 젖은 살결이 무척이나 하얗고 섹시했다.
그 뒤로도 몇 장은 각도와 자세를 바꿔 소현을 찍은 사진이었고, 나머지는 친구들과 나란히 호텔 로비에서 찍은 것이나 스파에 몸을 담그고 칵테일을 마시면서 놀고 있는 장면들이었다.
-여자들끼리의 밤이에요!
마지막으로 손으로 브이 사인을 그리면서 귀여운 잠옷으로 갈아입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진까지 본 혁권은 진지한 얼굴로 하킴에게 말했다.
“이봐, 하킴.”
“예.”
“한국에 도착하면 별다른 일정은 없지?”
“하루 이틀은 푹 쉬실 수 있을 겁니다. 병원도 가셔야 하니까요.”
“서울에 착륙하지 말고 부산으로 전용기를 돌릴 순 없나? 어떻게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
영문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던 하킴은 혁권의 스마트폰 액정에 뜬 사진을 힐끔 보고는 엄한 말투로 못을 박았다.
“일단 병원부터 가야 됩니다, 보스.”
“아니, 그래도…….”
“병원부터요.”
“치료는 조금 뒤로 미뤄도 돼. 어차피 어제 오늘 생긴 부상도 아니고…….”
“보스.”
억지를 부리는 혁권에게 하킴은 단호히 대꾸했다.
“절대 안 됩니다.”
“제길.”
아쉬운 투로 혀를 차는 혁권을 보면서 알아바디가 한마디 첨언했다.
“상처만 안 생겼어도 괜찮았을 텐데 말입니다. 아쉽게 되셨군요.”
“……젠장.”
우크라이나에서 일이 꼬이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소현의 비키니 차림을 볼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물론 그것 때문이 아니어도 여자 친구들끼리만 가는 여행이니 처음부터 혁권이 낄 자리는 없었지만, 아무튼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부산으로 기수를 돌릴 수 있었지만 혼자도 아니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데, 다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던 혁권은 아쉬움을 달래면서 몇 시간 뒤 김포 공항에 착륙했다.
전용기 이용 고객을 위해 별도로 마련된 게이트로 입국장을 빠져나와 막 지병하가 운전하는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뒷좌석에 올라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하자 심인성 과장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걸로 국정원에서 자신의 출입국을 체크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쯧.”
짧게 혀를 찬 혁권은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면서 전화를 받았다.
“보기와 달리 성격이 급하신 것 같군요.”
뼈가 있는 말에 심인성 과장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흠흠. 윗분들의 관심이 큰 사안이다 보니까 이해를 해 주십시오.
불쾌하긴 했으나 말이 통하는 데다 우호적인 관계였기에 혁권도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물건을 확보했는지 궁금한 겁니까?”
-뭔가 성과가 있는 겁니까?
어지간히 급한 모양인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묻는 모습에 그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화로는 좀 그러니까 만나서 이야기를 마저 끝내도록 하지요.”
-지난번에 봤던 일식집에서 1시간 뒤에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피곤했지만 귀찮은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바로 약속을 잡았다.
-그럼 조금 있다고 보시죠.
통화를 끝낸 혁권은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로부터 1시간 뒤, 혁권은 시내 모처에 위치한 일식당 별실에서 심인성 과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벨을 눌러 주십시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공손하게 말한 여종업원이 미닫이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상에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가득 놓여 있었지만 심인성은 손을 댈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걸 보니 좋은 소식이 있는 모양이요.”
상대가 웃는 얼굴로 묻자 어차피 알려 줄 거였기에 혁권은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밤에 화물기편으로 로켓엔진 완성품이 도착할 겁니다.”
배로 운송할 수도 있었으나 워낙 민감한 물건이라서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혁권은 엔진을 루마니아로 가져간 뒤에 다시 화물기로 옮겨 실었다.
다행히 로켓엔진 크기가 폭 1미터, 높이 2미터 정도에 불과해서 화물기에 충분히 실을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로켓엔진을 구해 오자 심인성은 반색을 하며 그를 추켜세웠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국가를 위해서 정말 큰일을 하신 겁니다.”
“거래한 대로 물건을 구해 줬을 뿐입니다.”
혁권이 딱 잘라 말하자 심인성은 예상했다는 듯 쉽게 물러났다.
“물론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약속이었으니.”
북한이 새로운 탄도 미사일 엔진으로 사용하고 있는 RD-250 액체 로켓엔진 실물을 확보함으로써 얻게 될 여러 가지 효과를 생각하면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물론 너무 과한 요구를 한다면 곤란하겠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수용할 용의가 있었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대로 700만 달러면 되겠습니까?”
혁권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1천만 달러. 협상은 없습니다.”
액수를 듣자마자 심인성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엔진을 구하느라 애를 쓴 건 알지만 그렇다고 300만 달러나 올리는 건 조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관련 기술 자료와 북한이 사용하는 다운그레이드형이 아닌 이중연소 타입의 원형 엔진 설계도까지 함께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심인성이 눈을 부릅뜨며 그를 쳐다봤다.
“원형 엔진 설계도라니 지금 한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깜짝 놀란 상대와 달리 혁권은 느긋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작은 USB를 하나 꺼내 상에 올려놨다.
“자료 일부를 넣어 뒀으니 가져가서 확인해 보십시오.”
“으음.”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행동하는 걸 보며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몇백만 달러를 더 받아 내려고 국정원을 상대로 꼼수를 부려서 혁권한테 득 될 것이 없었다.
목이 타는지 앞에 있던 정종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심인성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 참, 정말 사람을 놀라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자료가 필요 없다면 앞서 말한 가격에 엔진만 넘기도록 하지요.”
그러자 심인성이 피식 웃으면서 USB를 집어 들었다.
“이런 걸 던져 놓고 엔진만 가져가라니, 의외로 짓궂은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겁니까?”
심인성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 정도 가치가 있는 거라면 말한 액수를 지급토록 하겠소. 하지만 윗선의 결재를 받아야 되니 조금 시간을 주시오.”
“엔진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요. 대답이 없으면 거절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럽시다.”
어차피 기술 자료가 진짜로 확인된다면 윗선에서도 혁권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로켓 관련 기술 자료와 엔진 설계도까지 확보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생각할 때 300만 달러는 헐값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얼굴에 웃음을 지은 심인성이 그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역시 김 사장한테 일을 맡기길 잘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잘 지내도록 합시다.”
혁권은 별다른 대답 없이 술잔을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