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05
505
내전이 벌어지기 전에는 리비아 국영석유회사(National Oil Corporation of Libya)의 지사로 사용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부카 여단의 지휘소로 변해 있었다.
사륜구동 차에서 내린 혁권은 자말과 하킴만 대동한 채 1층에 있는 후세인 대령의 집무실로 갔다.
자리를 권한 후세인 대령이 협탁 위의 위스키 병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한잔하겠소?”
“주시면 감사히 받죠.”
후세인 대령은 낮게 웃으면서 유리로 된 술잔을 꺼내 반쯤 채웠다.
“자.”
“고맙습니다.”
주는 것을 받아들자 대령이 소파에 앉아 한쪽 무릎을 꼬았다.
이슬람 율법으로 술을 마시는 걸 금하고 있었지만 서양 문화에 익숙한 후세인 대령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란이나 파키스탄에서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과 달리 오랫동안 리비아를 통치해 온 카다피가 주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 쪽으로는 유연하게 적용을 했기에 드러내 놓고 마시지는 못해도 몰래 음주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후세인 대령은 그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주변 경계를 좀 더 철저히 시켰어야 되는데 어제 있었던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괜찮습니다. 어찌 됐건 이렇게 무사히 도착했지 않습니까.”
“그리 말해 주니 고맙소. 그런데 공격이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거요?”
CIA에서 정보를 줬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적당히 둘러댔다.
“사업을 하다 보니까 여기저기 알고 지내는 이들이 많은데, 그중 한 명이 출발 전에 귀띔을 해 줬습니다.”
“그렇구먼. 어찌 됐건 격추된 비행기에 타고 있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깊이 따지고 들 마음이 없었는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넘어간 후세인 대령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트리폴리에서 어떤 제안을 했는지 보따리를 풀어 보시오.”
자말하고 나란히 앉은 그는 맞은편에 있는 후세인 대령과 측근인 아세르 소령을 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트리폴리 정부는 대령님과 관계가 악화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그리고 대령님을 부하들과 떼어 놓으려고 한다는 건 전혀 근거가 없는 오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해라…….”
말끝을 흐리면서 뒤로 등을 기댄 후세인 대령은 이내 정색을 하며 그를 쳐다봤다.
“존슨, 당신도 그게 정녕 오해라고 생각하시오?”
정말 난감한 물음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혁권은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샤라빌 대통령과 완전히 등을 돌리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라면 그냥 적당히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서로를 위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후세인 대령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맞는 말이오. 어디 무슨 제안을 했는지 계속 이야기를 해 보시오.”
“우선 추가로 생산된 원유를 가지고 아부카 여단에서 필요한 보급 물자와 군비軍費를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걸 용인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단 물량은 한 달에 200만 배럴로 제한하겠다고 했습니다.”
200만 배럴이면 VLCC급 유조선 한 척에 가득 실을 수 있는 물량이었다.
불만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후세인 대령은 내색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쌓은 전공을 인정해서 준장으로 진급을 시킴과 동시에, 현재처럼 아부카 여단에 대한 지휘권을 계속 인정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모함메드 장관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으음.”
후세인 대령은 속으로 미심쩍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혁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이쪽에 유리한 조건이 아닌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일방적으로 퍼 주는 거래는 하지 않을 터였다.
“아무래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군.”
“어째서 그러십니까? 이만큼 좋은 이야기는 찾기 힘들 텐데요.”
“그러니까 더 그런 거요. 분명 과분할 정도로 괜찮은 조건이긴 하지. 그게 문제란 말이오.”
후세인 대령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자 혁권은 역시, 하면서 어깨를 크게 으쓱였다.
그러고는 상대와 눈을 맞춘 채 사뭇 진지한 얼굴로 가장 예민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신 대령님이 직접 트리폴리로 와서 샤라빌 대통령한테 새로운 계급장을 수여받는 것이 상대의 요구 조건입니다.”
말을 듣자마자 후세인 대령이 와락 표정을 구겼다.
옆에 있던 아세르 소령 역시 발끈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대령님, 이건 보나 마나 놈들이 파 놓은 함정입니다. 절대 트리폴리로 가시면 안 됩니다.”
애초에 샤라빌 대통령하고 관계가 틀어진 원인이 후세인 대령을 트리폴리로 억지로 불러들이려고 한 것이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역시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걸 각오하고 있었기에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만.”
한쪽 손을 들어 아세르 소령의 입을 다물게 한 후세인 대령은 여전히 묵묵한 태도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혁권에게 찌르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이제 보니 협상을 할 생각이 아니었군. 날 모욕할 셈이었어.”
“그건 아닐 겁니다.”
“그러면 방금 한 이야기는 뭐요! 그딴 제안을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오?”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치면서 후세인 대령이 소리치자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자칫 한마디라도 이야기를 잘못한다면 그대로 협상이 결렬되는 건 물론이고 상황이 더욱 나빠질 판이었지만 혁권은 침착하게 상대를 설득했다.
“물론 수용하기 어렵겠지요. 하지만 상대가 먼저 여러 가지를 양보한 만큼 대령님도 샤라빌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보고 사지死地나 마찬가지인 트리폴리로 가라, 이거요?”
후세인 대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날 선 목소리로 말을 내뱉자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처음에는 엉뚱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대령님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러면 자밀 의장만 좋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아세르 소령이 불신 가득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가 있소. 막말로 거짓말로 대령님을 꾀어 내 트리폴리로 끌어들인 다음 살수殺手를 쓰면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오!”
“샤라빌 대통령이 그 정도로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대령님이 트리폴리로 갈 결심을 한다면, 미국 정부가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언질이 있었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후세인 대령이 눈을 부릅뜨고는 혹시라도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지금 미국 정부하고 했소?”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 일에 왜 개입하는 거요?”
살짝 반감이 어린 말투에 그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벵가지로 물러났지만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자밀 의장이 아직 건재하고 IS와 연계된 이슬람형제단이 다시 세력을 키우는 상황에서 양측이 충돌하는 건, 미국 정부로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니까요.”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수긍이 되는 이야기였기에 후세인 대령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협상이 틀어지면 결국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는 건 자밀 의장입니다. 대공미사일까지 쏘며 만남을 방해하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말만 믿고 대령님을 위험천만한 트리폴리로 가시게 할 수는 없소!”
아세르 소령이 여전히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정부군에서 가장 강한 군대가 바로 아부카 여단입니다. 자밀 의장이 시도한 쿠데타로 트리폴리에 있던 병력 상당수가 죽거나 다친 상황에서 아부카 여단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요. 그걸 알기에 샤라빌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이 혹시라도 대령님이 다른 마음을 품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겁니다. 자밀 의장 역시 가장 큰 위협으로 느끼고 있을 테고요. 이런 든든한 병사들이 대령님을 따르고 미국 정부까지 신변 안전을 보장하겠다는데, 도대체 뭐가 겁이 나시는 겁니까.”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대번에 아세르 소령이 인상을 쓰면서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앞에 있는 후세인 대령을 쳐다봤다.
“중간은 없다는 걸 대령님도 잘 아실 겁니다. 이게 싫다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샤라빌 대통령하고는 완전히 척지게 될 것이고, 트리폴리 정부와 자밀 의장 사이에 끼여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흥! 어떻게 그리 확신하시오. 자밀 의장하고 손을 잡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요.”
콧방귀를 뀌면서 아세르 소령이 반박하자 혁권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 그럴 가능성을 배재하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그건 최악의 선택이 될 겁니다.”
“어째서 그렇소?”
“자밀 의장하고 손을 잡는 순간 트리폴리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의 첫 번째 제거 목표가 될 테니까요. 그리되면 저 역시 대령님과 더 이상 함께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후세인 대령을 통해서 얻는 이득이 꽤 쏠쏠했지만 그렇다고 미국 정부와 척질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미국 정부가 작정을 하고 방해에 나서면 후세인 대령이 아무리 원유를 많이 퍼 올린다고 해도 판로 자체가 다 막혀 버릴 터였다.
이런 걸 후세인 대령 역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맛살을 찌푸린 채 낮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참 어려운 문제를 가져온 것 같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군요.”
보여 줄 수 있는 카드는 모두 꺼냈기에 그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후세인 대령의 결정을 기다렸다.
하지만 자신은 물론이고 아부카 여단 전체의 생사生死가 걸린 중요한 일이었기에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참 고민을 거듭하던 후세인 대령은 이내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참모들과 좀 더 심사숙고를 해 봐야 되겠소.”
“그러십시오.”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 테니 그쪽도 푹 쉬고 나중에 다시 얘기합시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보이는 후세인 대령에게 혁권은 순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잘 곳은 내 부하가 안내해 줄 거요.”
그렇게 말한 후세인 대령은 손끝을 튀겨 문 쪽을 지키고 서 있던 부하 장교를 불렀다.
“존슨 씨를 숙소로 모셔다 드리게.”
“예.”
따라오라는 듯이 부하 장교가 문을 열고 기다리자 혁권은 일어나 후세인 대령에게 목 인사를 건넸다.
“편히 쉬시오.”
“감사합니다. 가급적 빨리 결정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후우. 알겠소.”
혁권이 던져 준 문제를 고민하느라 오늘 하루는 정신이 없을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그런 후세인 대령한테서 몸을 돌려 방을 나서자 하킴과 자말이 그림자처럼 뒤로 따라붙었다.
밖으로 나온 혁권은 일행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타고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콘크리트 건물로 이동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린 혁권이 회색 페인트칠이 된 4층 건물을 둘러보자 자말이 얼른 설명을 했다.
“예전에 이곳 저유소에서 근무하던 리비아 국영석유 회사 직원들의 숙소인데, 지금은 아부카 여단 장교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소위 계급장을 단 장교는 일행을 3층으로 데려가서는 나란히 붙어 있는 방 3개를 사용하도록 조치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