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09
509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자밀 의장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는군. 미지급 채권을 가지고 동결된 카다피 비자금을 빼낸 놈이 맞지?”
“그렇습니다.”
“그때 저격을 시도했을 때 죽여 버렸어야 되는 건데.”
악연을 떠올린 자밀 의장이 이를 갈자 바셋이 눈치를 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정보에 의하면 이자가 라스라누프에 주둔하고 있는 아부카 여단에 대량의 보급 물자는 물론이고 전차와 장갑차 여러 대를 공급했다고 합니다.”
“아주 골고루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는군.”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자꾸만 신경을 거스르는 혁권의 행동이 자밀 의장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선 다시는 눈에 띄지 않도록 만들어 버리고 싶었으나 어쨌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군.
자밀 의장은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제일 먼저 처리하겠다고 다짐하며 애써 혁권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다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눈동자를 바셋에게 향한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하마드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설마…… 의장님!”
무언가 떠올렸는지 바셋이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무하마드는 IS하고 연관된 과격 이슬람 무장 세력인 이슬람 형제단의 주요 간부였다.
“놈을 끌어들이는 게 나도 마뜩지는 않아.”
“그럼 왜……?”
“하지만 지금으로선 제일 유효한 방법이기도 하지.”
바셋은 여전히 흐린 낯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지금보다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자네가 뒷수습을 하든가!”
앞에 있는 탁자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면서 소리치는 자밀 의장에게 바셋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기 때문에 자밀 의장의 결정에 뭐라 할 처지조차 못 되었다.
“스스로 해결책을 짜내지 못할 거면 입 다물고 시키는 일이나 해!”
“……알겠습니다.”
바셋은 참담한 기분으로 고개를 떨궜다.
“됐으니까 나가 봐!”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얼굴을 홱 돌려 버리는 자밀 의장의 태도에 바셋은 입술을 꽉 깨물고 인사를 한 후 조용히 그의 방에서 물러났다.
한편 혁권은 가까운 몰타Malta로 가서 이반을 원래 있던 라이베리아로 보내고는 전용기를 빌려 아테네에 잠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갔다.
김포 공항에 도착하자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조수석에 탄 하킴의 물음에 그는 오랜 비행에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바로 집으로 가.”
“알겠습니다.”
혁권이 탄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밴은 뒤를 따라 오는 경호 차량과 함께 줄을 지어 천천히 공항 청사를 빠져나왔다.
리비아에서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자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반쯤 누워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혁권을 룸미러로 힐끔 쳐다본 하킴은 그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도로 라디오를 교통정보 프로그램에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조용한 채널로 바꾸고 음량을 낮췄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얕은 잠이 들려던 찰나, 휴식 시간을 방해하려는 것처럼 품속의 스마트폰 진동이 부웅 울렸다.
“쯧…….”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찡그리며 안주머니를 뒤적거린 혁권은 상대방을 확인하지도 않고 곧장 귀에 위성전화기를 갖다 댔다.
-혁권이니?
평소와 달리 떨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혁권은 가죽 시트에서 몸을 떼며 말했다.
“어디 아프세요?”
-그건 아니고…… 안 바쁘면 이리로 좀 와 줄 수 있겠니?
“어딘데요?”
-강남병원 응급실이야. 아버지께서 많이 다치셨어.
이야기를 듣는 순간 혁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바로 갈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래.
전화를 끊은 그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지병하를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강남병원으로 가! 급하니까 최대한 밟아.”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지병하는 대답과 동시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발에 힘을 줬다.
부우우웅.
차선을 바꿔 빠르게 달려가는 가운데 혁권은 이런저런 핑계로 그동안 부모님한테 너무 신경을 못 쓴 걸 자책하면서 제발 큰일이 아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비상 깜빡이를 켠 채 정신없이 내달린 밴은 타이어 갈리는 소리를 내면서 병원 입구에 멈추어 섰다.
차 문을 열고 내린 혁권은 곧장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응급실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집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급히 나왔는지 평소 입는 옷에 카디건 하나만 걸친 어머니를 발견하곤 얼른 가까이 다가갔다.
“어머니!”
“어, 왔니.”
양옆으로 커튼이 쳐진 침대에 아버지가 여기저기 멍이 들고 피가 난 얼굴로 팔에 링거를 꽂은 채 누워 있는 걸 본 혁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니, 어쩌다가 이렇게 되신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가 애써 울음을 참으면서 대답했다.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온 거라 나도 자세한 잘 몰라.”
답답한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은 어머니의 모습에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등을 두드리면서 안심을 시켜 드렸다.
“괜찮을 테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야지. 일을 좀 줄이고 집에서 쉬라니까 왜 밤에 택시를 끌고 나가서는…… 흑흑.”
결국 참지 못하고 어머니가 눈물을 뚝뚝 흘리자 그걸 지켜보는 혁권의 가슴도 찢어질 듯 아팠다.
어머니를 겨우 달래 진정시킨 그는 마침 응급실 당직 의사가 지나가는 걸 붙잡고 아버지의 상태를 물었다.
“타박상이 심하시네요. 다행히 뇌나 장기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지만 이빨이 두 개 부러지고 꼬리뼈에 골절이 있어서 당분간은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진통제를 놔서 주무시고 계신 거니까 조금 있으면 깨어나실 겁니다.”
“다른 검사는 안 해 봐도 되겠습니까?”
“오시자마자 엑스레이를 찍어 봤지만 딱히 의심스러운 부분은 없었습니다. 아침에 담당 선생님이 오시면 그때 상담을 해 보시고 추가로 검사를 진행하든지 하십시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준 의사는 차트를 침대 한쪽에 걸어 두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일단 큰 이상이 없다는 말에 그나마 한숨을 돌린 혁권은 초췌한 안색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마른 등을 감싸 안았다.
“방금 의사 얘기 들으셨죠? 지금 당장은 괜찮다니까 어머니도 좀 쉬세요.”
“아니다. 아버지 곁에 내가 있어야지.”
그러면서 어머니는 침대 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아버지의 손을 잡고 꼼꼼히 이불로 덮어 주고는 오히려 혁권을 걱정했다.
“너도 갑자기 연락받고 놀랐을 텐데 집에 들어가서 옷이라도 좀 갈아입으렴. 머리카락 흐트러진 것 봐라.”
“아무도 안 보는 데요, 뭘.”
아무리 말해도 어머니가 도통 움직일 기색이 없자 혁권은 자기도 옆에 앉아 함께 병실에서 아버지를 돌볼 생각으로 몸의 긴장을 조금 풀었다.
이럴 때 어머니 혼자 병원에 놔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곁에 있다가 조금이라도 무리하는 조짐이 보이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쉬게 할 작정이었다.
놀라실까 봐 일부러 바깥에서 기다리게 한 부하들 중 한 명을 먼저 보내서 갈아입을 옷가지라도 들고 오게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직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는데 운동화의 닳은 밑창이 바닥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
“실례합니다.”
혁권이 고개를 들자 어두운 색의 점퍼에 활동성이 좋아 보이는 바지를 입은 사내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김범수 씨 보호자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상대를 살피니 사내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신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혁권이 한발 나서서 사내를 상대했다.
뒤에서 영문을 모르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단은 이 수상한 사내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먼저였다.
“강남경찰서 정태민 형사입니다.”
품속을 뒤져 신분증을 꺼낸 형사가 혁권을 향해 보라는 듯이 들어 보였다.
“형사?”
눈썹을 꿈틀거린 혁권은 손을 내밀어 요구했다.
“제가 자세히 확인해 봐도 될까요?”
“신중한 분이시군요.”
“요즘 사고가 나면 경찰을 사칭해서 나쁜 수작을 걸려는 무리도 많지 않습니까. 아, 물론 형사님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요즘 세상이 좀 그렇다 보니…….”
언뜻 정중한 것 같으면서도 대범한 그의 행동에 정태민은 꽤 강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물론입니다. 주의해서 나쁠 건 없죠.”
그러면서 선선히 신분증을 넘겨주는 것을 받아 든 혁권은 재빨리 그의 이름과 사진, 그리고 소속을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눈으로 본 정보를 머릿속으로 외우기엔 충분했다.
다시 경찰 신분증을 돌려준 혁권은 형사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여긴 무슨 용건으로?”
“김범수 씨 일로 몇 가지 물을 게 있어 왔습니다.”
원래는 그가 묻고 대답을 들어야 하는 상황인데 거꾸로 질문을 받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저기…… 뭐라도 잘못된 게 있나요?”
뒤에서 어머니가 불안한 듯이 물었다.
평범한 교통사고라면 그냥 제복을 입은 경찰이 올 줄 알았는데, 갑자기 형사라고 하니 놀란 것일 터였다.
“그냥 절차일 뿐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어머니.”
형사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입을 막은 혁권은 문을 향해 눈짓했다.
“저는 형사님이랑 잠시 얘기 좀 하고 올게요. 여기 계속 서 있으면 사람들 오가는 데 괜히 방해만 될 테니까.”
그러고선 따라오라는 듯 먼저 앞장서는 혁권의 등을 보고 형사는 헛웃음을 흘렸다.
여태껏 많은 사람들을 만나 봤지만 저렇게 독특한 기질을 가진 인물은 그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응급실을 나온 두 사람은 복도 끝에 위치한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아무도 없어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시죠.”
습관적으로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던 혁권은 한쪽 벽에 금연 표시가 붙어 있는 걸 보곤 다시 집어넣었다.
“김범수 씨하고 어떤 관계이십니까?”
“아들입니다.”
“그러시군요.”
짐작했다는 듯이 작게 머리를 끄덕인 정태민 형사는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들면서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운전 중에 시비가 붙어서 싸움을 벌인 건 알고 계시지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는 정색을 했다.
“교통사고가 아니라 폭력 사건이라는 겁니까?”
“이런,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정태민 형사는 입맛을 다시면서 사건 경위를 간략하게 이야기해 줬다.
“아버님께서 택시를 몰고 가시다가 다른 운전자하고 언쟁이 벌였는데, 그게 커져서 주먹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말씀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평생 남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시고 올곧게 살아오신 아버지가 싸움을 했다니, 도대체 믿기지가 않았다.
“싸운 이유가 뭐랍니까?”
“상대편이 경찰서에서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신호 대기 중일 때 아버님이 먼저 욕을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말도 안 되는…….”
혁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