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51
551
# 함부로 들이대다가 뒈진다
우웅.
밴 뒷좌석에 앉아 있던 채상우는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을 꺼내 소현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죄송하지만, 사적인 연락은 안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예쁜 여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콧대 높게 튕기는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딱딱한 태도를 보이진 않을 터였다.
관심을 끌고 싶어서 일부로 밀고 당기는 거라고 여기던 행동들이 사실은 진심으로 그와 만날 생각이 없어 거부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채상우의 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것도 이제 갓 연예계에 데뷔한 새파란 신인한테 차였다는 사실이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 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지호가 채상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러자 채상우는 스마트폰을 안주머니 안에 넣으면서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야?”
“그렇다니까.”
하루 이틀 함께 다닌 것도 아니고 채상우의 표정에서 뭔가 일이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더 캐물으면 화를 낼 것 같았기에 김지호는 일단 모르는 척하고 넘어갔다.
대신에 괜한 사고를 치지 않도록 확실히 주의를 줬다.
“중요한 때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쓸데없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지 않게 처신을 조심하도록 해.”
“쯧. 알았다니까.”
계속되는 잔소리에 귀찮다는 얼굴로 채상우가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진즉에 매니저를 갈아 버리고 싶었지만, 오래 함께한 만큼 자신을 가장 잘 알고 무엇보다 바깥에 드러낼 수 없는 이런저런 일들을 조용히 잘 처리해 줬기에 이렇게 가끔씩 짜증을 나게 만들어도 같이 다니는 거였다.
“그건 그렇고. 조태석 감독님하고 있는 자리에 날 부르는 걸 보면 이야기가 잘된 모양이지?”
화제를 바꾼 채상우가 기대 섞인 시선으로 물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저쪽에서도 널 차기작 주인공에 캐스팅하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나 봐.”
“그래, 바로 이거지.”
주먹을 꽉 움켜쥔 채상우는 잔뜩 들뜬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쌍천만 기록을 세우면서 연달아 작품을 히트시키고 있는 조태석 감독은, 차기작이 아직 촬영에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업계와 관객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거기다가 대만과 일본 쪽 배급사하고 선 판매 계약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있어서 배우들 사이에서는 서로 배역을 따내려고 여기저기 줄을 대는 상황이었다.
영화에 출현만 한다면 시들어져 가던 인기를 다시 끌어 올릴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국내를 벗어나 한류 스타 대열에 합류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러니까 오늘 가서 조태석 감독님한테 눈도장을 확실하게 받아 놓으라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염려하지 마.”
다 맡겨 놓으라는 듯 채상우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그는 눈을 감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한류 스타가 되어 몇십억, 몇백억을 손쉽게 벌며 부와 인기를 동시에 거머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환상일 뿐일지라도 얼마 후면 현실이 될 수도 있을 만큼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는 미래였다.
경기도에 위치한 야외 사격장.
한 구역을 통째로 빌린 혁권은 즐겨 사용하는 글록 권총을 손에 쥐고는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과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탕!
거리가 꽤 먼 데다 소총에 비해서 조준점을 잡기도 어려웠지만 거의 대부분의 총탄이 빗나가지 않고 과녁 안에 들어갔다.
철컥.
열다섯 발을 모두 쏴 탄창이 비자 공이가 허공을 치는 쇳소리가 나며 슬라이드가 뒤로 젖혀졌다.
짧게 숨을 내뱉으면서 자세를 바로 한 혁권은 탄창을 빼서 총알이 없는 걸 확인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하킴이 쌍안경으로 과녁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실력이 많이 느신 것 같습니다. 열다섯 발 중에 열두 발이 과녁 안에 들어갔습니다.”
“세 발이나 빗나갔군.”
아쉬운 표정을 짓자 하킴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하신 겁니다. 다 맞히신다면 여기 계실 것이 아니라 올림픽에 나가셔야죠.”
“자네도 농담을 할 줄 아는군.”
입가에 얇은 미소를 짓는 하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혁권은 몸을 뒤로 돌렸다.
“잠깐 쉬지.”
커다란 파라솔 밑에 있는 간이 의자로 가서 앉은 혁권이 생수로 목을 축이자 백성균이 가까이 다가와서는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야?”
“지난번에 보스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봉투를 열어 보자 하와이행 퍼스트클래스 비행기 왕복 티켓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호텔은?”
“와이키키 해변에 위치한 특급호텔 스위트룸으로 잡아 놨고 여행을 도와 드릴 가이드와 통역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수고했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티켓을 다시 봉투에 넣어서 챙겼다.
괜찮다고 하시지만 지난번 사건으로 심신이 크게 힘들었을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겸 바람이나 좀 쐬며 쉬고 오시라고 해외 여행을 보내 드릴 생각이었다.
조금 있으면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하니까 핑계도 적당했다.
원하신다면 세계 일주라도 시켜 드릴 능력이 됐지만 보나 마나 싫다고 하실 테니, 일단 하와이 여행부터 보내 드려 차근차근 인생을 즐기면서 사실 수 있도록 해 드릴 계획이었다.
생수병을 간이 테이블에 내려놓은 혁권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백성균을 보며 입을 뗐다.
“참. 도도 엔터테인먼트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어?”
“혹시 오주호가 해코지를 할지도 몰라서 도도 엔터테인먼트로 옮겨 간 모델들을 전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놨습니다. 내일 지 변호사님하고 함께 찾아가 일을 모두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문제가 되기 전에 미리 손을 써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기껏 부탁을 받아 일을 처리했는데 유미해와 이적해 간 모델들의 신변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소현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 일은 알아서 처리하고 다 마무리되면 결과만 보고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총탄 구멍이 나 있는 담배 케이스를 꺼내 한 개비를 막 입에 물었을 때 하킴이 한 손으로 송화기를 막은 채 위성전화기를 내밀었다.
“보스, 스파이서입니다.”
스파이서라면 유명한 헤지 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 산하에 있는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를 운영하는 총괄이사였다.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속해 있는 헤지 펀드 책임자라고 해도 한 번에 수십억 달러를 움직일 수 있는 거물이었다.
서로 전혀 접점이 없는 사이였지만 카다피 시절 발행한 채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와 엮이게 됐다.
“이리 줘 봐.”
혁권은 몸을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면서 건네받은 위성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이거, 오랜만에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요.”
-요즘 뉴스를 들으니 그동안 잠잠하던 리비아 내전이 다시 격화되고 있는 것 같던데, 하시는 사업은 괜찮은지 모르겠군요.
“내전이야 계속되어 오던 것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것보다, 무슨 일입니까?”
-좋은 소식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스파이서의 이야기에 짐작되는 것이 있었던 혁권은 눈을 반짝였다.
“법원에서 판결이 떨어진 모양이군요?”
그러자 위성전화기 너머에서 스파이서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채권 원금에 이자를 합쳐서 지급하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동결된 카다피 비자금이 예치되어 있는 은행에서도 판결에 승복하고 상고를 포기했고 말입니다.
채권 원금뿐만 아니라 그동안 쌓인 이자까지 다 받아 냈다는 이야기에 그는 내심 깜짝 놀랐다.
자신은 이자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것까지 놓치지 않고 전부 챙기다니, 스파이서와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돈이 되는 거라면 먼지 한 톨까지 다 쓸어 간다는 악명 높은 헤지 펀드다웠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일을 마무리 지었군요.”
-다 미스터 존슨이 먼저 선례를 만들어 놓은 덕분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판결이 나오는 데 시간이 꽤 필요했을 겁니다. 아. 그리고 트리폴리 정부의 위임장도 한몫 단단히 했고 말입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요.”
-말씀하신 계좌에 미스터 존슨의 몫을 송금했으니까 확인해 보십시오.
“이거, 얼마나 들어왔는지 궁금하군요.”
수화기 너머에 있는 스파이서가 자신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도 흡족하실 만한 액수일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더 궁금해지는군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얼만지 알려 드리고 싶지만 이런 건 직접 확인해 보는 게 기쁨이 더 클 테니 참도록 하겠습니다.
“애가 타서 빨리 확인해 봐야지 안 되겠군요.”
-그러십시오. 아무튼 만족스러운 거래였습니다. 다음에도 함께할 일이 있으면 좋겠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바쁘실 테니 이만 끊도록 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혁권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케이스와 함께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스텐저 변호사한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가고 얼마 있지 않아서 스텐저 변호사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전화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오늘 계좌로 입금된 돈이 있을 텐데. 지금 확인이 되겠소?”
-오렐리우스 매니지먼트에서 송금한 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소.”
-오전에 2억 1천만 달러가 존슨 씨 개인 계좌로 들어왔습니다.
원금에다가 이자까지 얹어서 받아 냈으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액수가 많을 거라 짐작했지만 2억 달러가 넘는다는 이야기에 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배당금 일부를 가지는 대신 트리폴리 정부에 수천만 달러는 현금으로 준 것이 몇 달 만에 몇 배로 커져서 되돌아 온 거였다.
말 그대로 잭팟을 제대로 터트린 거였다.
-일반 계좌에 그냥 넣어 두기에는 액수가 상당히 큰데, 어쩌시겠습니까?
은근히 기대가 섞인 물음에 상대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혁권은 입가에 얇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투자처라도 있소.”
그러자 스텐저 변호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이야기를 했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한테 자금 운영을 맡겨 주신다면 최고의 수익률을 올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장 돈을 쓸 곳이 없는 데다 L&S 코퍼레이션의 서비스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기에 그는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1천만 달러는 그냥 계좌에 놔두고 나머지는 다른 자금과 함께 그쪽에서 운영을 해 주시오.”
무려 2억 달러나 되는 거금을 한꺼번에 유치하는 실적을 올리게 된 스텐저 변호사는 크게 반색했다.
-감사합니다. 믿고 맡겨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해 자금을 운용토록 하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소.”
모처럼 들려온 좋은 소식에 혁권의 기분이 단숨에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는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키고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좋아, 한 판 더 해 볼까.”
사격대에 선 그가 옆으로 손바닥을 내밀자 하킴이 총알이 가득 채워진 새 탄창을 건네줬다.
능숙한 동작으로 권총에 탄창을 꽂아 넣은 혁권은 두 손을 들어 올려 전방에 위치한 과녁을 겨냥하고는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