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84
584
“방금 100만 유로를 더 준다고 했소?”
상체를 살짝 숙이면서 상대가 관심을 보이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혁권이 턱짓을 하자 뒤에 서 있던 백성균이 손에 들고 있던 은색 알루미늄 가방을 탁자에 올려놓고는 내용물을 볼 수 있도록 활짝 열었다.
가방 안에는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500유로짜리 신권 뭉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돈뭉치를 본 케카스 장관의 얼굴에 탐욕이 번들거렸다.
“100만 유로입니다. 부탁을 들어 주신다면 이걸 먼저 드리도록 하지요.”
“으음.”
냉큼 받아들이기엔 아무래도 체면이 걸리는 건지 케카스 장관은 잠깐 생각하는 것처럼 짐짓 고민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마침내 큰 결단을 내리는 양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내가 한번 힘을 써 보겠소.”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존슨 씨니까 들어주는 부탁이오.”
와중에도 생색을 내는 걸 잊지 않는 케카스 장관의 말에 혁권은 그의 속내를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케카스 장관한테 100만 유로를 더 주고 반값도 안 되는 금액에 아기오스 토마스 섬을 소유할 수 있게 됐으니 큰 이득이었다.
“그리고 개발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각종 규제도 함께 풀어 줬으면 합니다.”
“그건 염려하지 마시오.”
믿고 맡기라는 듯이 자신있게 말하는 케카스 장관의 모습에 그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총선 후보 등록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 케카스 장관은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해 만남을 가진지 며칠 뒤에 바로 매입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손을 써줬다.
매입액은 500만 유로였고 여기다가 케로스 장관의 주머니로 간 300만 유로를 합쳐 전부 800만 유로(한화 102억 원)에 아기오스 토마스 섬을 소유할 수 있게 됐다.
설계 사무소에서 보내온 조감도鳥瞰圖를 넓은 테이블에 펼쳐 놓고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을 때 상의 안쪽에 넣어 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우웅.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에 표시된 발신번호를 확인한 혁권은 엄지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야.”
그러자 어쩐지 들떠 보이는 정동식 이사의 밝은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정동식 이사입니다, 대표님. 바쁘신데 제가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소파로 걸어간 혁권은 등을 뒤로 기대고 앉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그런데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건 아니고 드라마 제작 상황을 보고드리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판권 판매 계약을 공식적으로 언론에 발표했다고 그랬지.”
-예. 그것 때문에 요즘 사무실 전화기에 불이 나고 있습니다. 서로 PPL을 넣으려고 말입니다.
“그거 듣기 좋은 소식이군. 하지만 너무 과도한 PPL은 작품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표제은 작가하고 상의를 해서 최대한 자연스러우면서도 가장 조건이 좋은 광고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잘했어.”
이미 중국 지방 방송사들과의 판권 계약을 통해 제작비 상당 부분을 충당한 데다 애초에 이번 드라마로 수익을 거두겠다는 기대 자체를 하지 않았기에, 혁권은 굳이 시청자가 거북하게 느낄 정도로 무리해서 PPL 광고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KBN 측에서 연락이 왔는데 문영표 국장이 언제 시간이 나면 대표님하고 식사나 한번 하시자고 합니다.
드라마 제작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방송국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기에 그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귀국하면 적당한 날짜를 골라서 만나 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을 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촬영은 큰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기한 안에 사전 제작분 촬영을 모두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일정에 맞추려고 너무 빡빡하게 일을 진행시키진 말도록 해. 그러다가 배우나 촬영 스태프 들이 지치면 큰일이니까 말이야.”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 채상우는 좀 어때?”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을 꺼내자 스마트폰 너머에서 정동식 이사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얌전합니다. 아무래도 호되게 당하고 나니 콧대가 좀 납작해진 모양이지요. 덕분에 매니저만 매일 웃고 다닌답니다. 그놈 뒤치다꺼리 하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뭐 두루두루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혁권은 그래도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냉랭한 투로 말했다.
“제 버릇 못 고친다고 나중에 가서 또 사고를 칠 수도 있으니까 항상 주시하도록 해. 괜히 이상한 기사라도 나서 드라마 방송하기도 전에 남자 주인공 이미지가 망쳐지면 작품에도 영향이 가니까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지난번에는 소현이 때문에 그 정도로 참고 넘어갔지만 또다시 심기를 건드린다면 그때는 다시는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버릇을 단단히 고쳐 줄 생각이었다.
그 뒤로도 몇 가지 더 업무에 대한 보고를 받은 혁권은 수고하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잠시 쉬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백성균이 안으로 들어와 꾸벅 머리를 숙였다.
“보스, 미스터 성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예.”
다시 밖으로 나간 백성균이 금방 성석호를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이제 성 주임이라고 불러야 되나?”
그러자 성석호가 쑥스러운 얼굴로 혁권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그냥 편한 대로 불러 주십시오.”
“후후후. 그래.”
머리에 든 건 많았지만 막상 실전에서 어리버리했던 모습을 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주임 직급을 달고 어엿한 상사맨이 된 것이 대견한 혁권은 성석호를 소파로 데려가면서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줬다.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댄 혁권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이야기를 했다.
“어때, 할 만해?”
“어휴. 말도 마십시오. 본사에서 새로 보낸 신입들이 얼마나 버벅거리는지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아주 죽겠습니다.”
“예전에 너 같은 모양이군.”
“전 그래도 기본은 했지 않습니까.”
“뭣도 모르고 나대다가 옴팡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화물선을 임대할 뻔했지.”
놀리듯 말하자 예전의 실수가 떠오른 성석호는 멋쩍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한창 바쁠 텐데 갑자기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한 거야?”
자세를 바로 한 성석호는 얼굴을 굳히면서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사실은 선배님께 조언을 구할 것이 있어서 뵙자고 한 겁니다.”
“뭔지 이야기를 해 봐.”
“얼마 전에 새로운 바이어를 하나 개척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산 도자기 30만 달러 어치를 일본으로 수입해 가는 건데, 매입처도 다 정해져 있어서 저희는 검수檢水와 통관 절차만 대행해 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도자기는 올리브 오일과 함께 그리스의 주요 수출품 가운데 하나인 데다 소규모 수입상 같은 경우에는 현지에서 오래 머물며 수입 절차를 진행하기가 어려웠기에, 이런 식으로 약간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일을 맡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어제 신입 한 명하고 검수를 하다가 컨테이너 안쪽에 도자기 말고 다른 물건이 숨겨져 있는 걸 찾아내게 됐습니다.”
“혹시 매입처에서 엉뚱한 걸 컨테이너에 실어서 사기를 치려고 한 거야?”
“그건 아니고…….”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에 혁권이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성석호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릿하게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언뜻 보기에 흔한 감기약처럼 보이는 하얀 알약이었다.
그냥 걸어가서 약국에서 살 수 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약처럼 보였으나 그런 거였다면 컨테이너 안쪽에 숨겨 놓을 리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설마 이건…….”
혁권은 알약을 집어 조심스럽게 겉면을 확인했다.
아무런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아 확인이 불가능했으나 손에 놓고 보니 더욱 속이 술렁거리는 것이 어째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성석호의 이야기를 들은 그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찝찝한 느낌에 뭔지 알아보니까 캡타곤이라고 하더군요.”
“으음.”
암페타민과 카페인이 주성분인 캡타곤은 원래 과잉행동 장애나 기면증, 우울증 치료를 위해 처방되던 의약품이었다.
하지만 며칠이라도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각성 효과와 중독성에 지금은 대다수의 국가에서 사용이 금지됐다.
최근에 IS가 조직원들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대량으로 사용하면서 다시금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마약이기도 했다.
대번에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린 혁권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신용도가 높아 세관 검사를 까다롭게 받지 않는 상사를 이용해서 마약을 몰래 밀수하려고 한 모양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컨테이너에 숨겨져 있는 캡타곤 양이 얼마나 돼?”
“정확하게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100만 정은 넘어 보였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양에 그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라면 시중에서 못해도 수십억 원 치는 되는 거였다.
혁권은 마주 앉아 있는 성석호를 쳐다보면서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게 고민이라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찾아온 겁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까요?”
다른 것도 아니고 마약에 대한 문제였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자 혁권은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일 거야.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현지 경찰에 신고하든가 아니면 이대로 모르는 척하고 화물을 바이어한테 보내는 거야.”
성석호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랬다가 세관에서 캡타곤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회사뿐만 아니라 저도 처벌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가는 밀수를 하려던 놈들이 앙심을 품고 보복할 수도 있고……. 후우. 정말 이것 때문에 피가 바짝바짝 마를 것 같습니다.”
“고민이 되겠지만 어느 쪽이든 서둘러 선택을 하는 것이 나을 거야. 캡타곤이 숨겨진 화물 선적 날짜가 언제지?”
“내일입니다.”
“그럼 더욱 빨리 결정을 내려야 되겠군.”
“선배님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쎄…….”
잠시 뜸을 들인 혁권은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줬다.
“이걸 가지고 한몫 잡을 생각이 없다면 일단 지사장한테 보고를 한 다음에 그 결정을 따르겠어. 물론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면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휴가를 얻어 잠깐 귀국해 있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신청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렇게까지 해야 될까요?”
피신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대답을 들은 성석호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그로서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범죄자처럼 이리저리 숨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더군다나 이제 막 주임으로 승진한 데다 그동안 그리스 지사에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이 있으니 그 모든 걸 버리고 떠나야 된다는 것이 아까울 터였다.
하지만 일의 심각성을 아는 혁권은 성석호가 가볍게 생각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 봐 일부러 정색하며 말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 목숨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을 수 있는 놈들이야. 쉽게 생각했다가는 큰 곤혹을 치를 수도 있다는 걸 절대 잊지 마.”
“…….”
혁권의 경고에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은 성석호는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며 한탄을 쏟아 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오더를 받는 것이 아니었는데 정말 후회가 되는군요.”
“지금부터라도 잘 수습을 하면 되니까 너무 자책은 하지 마.”
“일단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에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을 하도록 해.”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애써 웃음을 지은 성석호는 고민에 찬 얼굴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