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93
593
81층이나 되는 높이 덕분에 바로 옆 창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화려한 불빛에 휩싸인 도시의 야경은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무수히 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다.
피아노 연주가 잔잔하게 흐르는 가운데 혁권은 소현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어 입안에 넣은 소현은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 맛에 탄성을 내뱉었다.
“으음. 스테이크 맛이 정말 좋지 않아요?”
“미슐랭 3스타를 받은 특급 쉐프가 운영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재료 하나하나가 절묘하게 잘 요리가 된 것 같아.”
“그러게 말이에요.”
옆에 놓인 와인 잔을 집어 한 모금 마시고는 그녀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까 너무 행복한 것 같아요.”
“나도 그래.”
애정이 듬뿍 담김 시선으로 마주 앉아 있는 소현을 바라보던 혁권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옆에 놔둔 작은 소핑백을 그녀 앞에 내려놨다.
“참, 이거 받아.”
“뭐예요?”
“직접 풀어 봐.”
소현은 궁금하다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고는 예쁘게 매듭 지어져 있는 리본을 풀고 소핑백에 든 상자를 열었다.
“와, 예뻐라.”
브로치를 보고 소현이 감탄을 터트리자 표정을 살피던 혁권이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에 들어? 어머니가 여행 가서 사 오신 건데.”
“어머, 어디서요?”
“하와이.”
그러면서 그는 혹시나 싶어 말을 덧붙였다.
“현지에 있는 쇼핑몰에서 살까 하다가 그래도 하와이 특색이 묻어나는 게 좋겠다 싶어서 고르셨다는데.”
“괜찮은데요, 디자인도 독특하고.”
소현은 천연석이 박혀 있는 부분을 손끝으로 쓸면서 기쁜 듯이 대꾸했다.
“한쪽은 파란색이고, 다른 쪽은 녹색이 섞여 있어서 딱 하와이가 떠오르는 색감이네요. 게다가 여기 둥글게 박힌 큐빅도 꽤 좋은 물건이에요. 말은 핸드메이드라도 저렴한 스톤을 쓰는 곳이 많은데, 어머니가 사신 가게는 주인이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만드는 곳인가 봐요.”
“그래?”
말을 듣고 보니 큐빅이 섬세하게 물결 모양처럼 둘러져 있는 것이 밝은 빛 아래에 있으면 반짝반짝 예쁘게 빛날 듯했다.
“요즘 아가씨들은 브로치를 잘 안 쓴다고 걱정하시던데.”
“무슨 소리예요? 브로치는 클래식한 기본 아이템이죠.”
자신 있는 분야가 나오자 소현의 눈이 생기를 띠었다.
“정장에 잘 어울려서 격식 있는 자리에 우아한 맛을 더해 주기도 하고, 심플한 블랙 드레스에 달면 얼마나 화려한데요. 원 포인트 코디에 딱이에요.”
“그, 그런 거야?”
“뭐, 확실히 조금 까다로운 악세사리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난 좋아해요, 귀족적인 느낌이고.”
“잘됐네.”
구체적으로 뭐가 잘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소현이 좋아하니까 되었다 싶었다.
“어머님께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그럴게.”
어머니가 신경 써서 구입해 온 선물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니 혁권 역시 기분이 좋았다.
“내일부터는 촬영 일정이 더 빡빡해진다고 그랬지?”
“예정보다 일찍 방영을 하게 됐으니까 어쩔 수 없죠. 그것 때문에 새로운 촬영 스태프들도 많이 보충됐어요.”
다 보고받았던 일이었기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힘들겠지만 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오빠 때문에라도 열심히 해야 되겠네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알았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디저트까지 먹으면서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조금 더 데이트를 즐기고 싶었지만 다음 날도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었기에 그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소현을 오피스텔로 데려다줬다.
일주일 뒤.
주연 배우의 음주운전 스캔들이 터지면서 온갖 비난에 시달리던 KBN 아침 드라마가 조기 종영되고 빈자리에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에서 제작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당신’이 들어가 방영을 시작했다.
새로 옮긴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 사옥 대표실 가죽 소파에 앉아 혁권은 위성 전화기로 리비아에 있는 자말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작업은 다 끝났나?”
-네. 두 척 다 합쳐서 모두 230만 배럴을 선적했습니다.
“유조선 저장탱크가 완전히 만재滿載됐겠군.”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몰라서 수용 가능한 한계까지 최대한 원유를 실었습니다.
“잘했어.”
-유조선 두 척은 먼저 출항했고 전 가져온 물자 하역이 모두 끝나면 화물선을 타고 아테네로 갈 예정입니다.
“마지막까지 실수가 없도록 하고 출발할 때 다시 전화를 해.”
-그러겠습니다.
위성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웃음기를 띤 얼굴로 자랑스레 서류철을 내놓는 걸 보니 아무래도 좋은 소식을 들고 온 모양이었다.
“첫 방송 시청률 집계표가 나왔습니다.”
“이리 줘 봐.”
혁권은 정동식 이사에게서 서류철을 받아 펼쳤다.
내용을 천천히 훑어본 혁권은 고개를 들어 왼편에 앉아 있는 정동식 이사를 보면서 말했다.
“4.2%라…… 아무리 아침 드라마라지만 시청률이 상당히 낮군.”
같은 시간에 방영되는 경쟁 방송사 드라마 시청률이 10% 정도였으니 그리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혁권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있자 정동식 이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아무래도 바로 앞에 방영됐던 드라마가 시청률이 저조한 데다 스캔들로 급히 종영된 영향을 받아 어렵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첫방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직 공식 집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오늘 방송된 2회 시청률이 5% 이상 나올 것으로 예상돼 이 정도면 괜찮은 출발일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그때서야 굳어 있던 얼굴 표정을 풀었다.
“이번에 조기 종영된 드라마 마지막 시청률이 얼마였지?”
“2.4%였습니다.”
“흐음. 확실히 그걸 감안하면 그리 나쁜 출발은 아닌 것 같군. 그렇다고 해도 초반에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면 뒤로 갈수록 더 힘들어지니까 언론 기사를 통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게 손을 쓰도록 해.”
“안 그래도 홍보팀에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 우호적인 기사를 온, 오프라인으로 내보내 이슈를 만드는 건 가장 흔한 홍보 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리면서 혁권이 말했다.
“KBN 쪽 반응은 어때?”
“워낙 상황이 안 좋다는 걸 방송국에서도 알다 보니 애국가 시청률로 떨어지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분위기입니다.”
입맛을 다신 혁권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큰 기대가 없었다 이거군.”
정동식 이사도 뭐라 말하기 어려운 표정을 띤 채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아주 최악은 아냐. 기대치가 낮은 만큼 우리도 시청률에 그리 큰 부담을 질 필요가 없지 않나.”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하고 있다가 신데렐라처럼 시청률을 끌어 모으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더 드라마틱해서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지.”
혁권의 머릿속엔 이대로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따위 안중에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서류철을 다시 덮어 정동식 이사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
“인터내셔널 매니지먼트에서 처음으로 제작하는 드라마인 만큼 어딜 가더라도 당당하게 내놓을 있을 정도의 성적을 올릴 수 있게 노력하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두 손으로 서류철을 건네받고는 자신있게 대답하는 정동식 이사의 모습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회사 업무는 정동식 이사한테 모두 맡겨 둔 상태였기에 딱히 할 일이 없었던 혁권은 잠시 뒤, 사옥을 나와 그랜드 워커힐 호텔로 향했다.
차에서 내린 혁권은 하킴과 백성균만 대동한 채 곧장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평일 오후라 로비에 있는 커피숍은 테이블이 반도 안 차 있었고, 엘리베이터도 이용객의 수가 적어 뜻하지 않게 쾌적한 느낌이었다.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엘리베이터를 타고 목적한 층에 도착하자 백성균이 혁권 대신 객실의 벨을 눌렀다.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건장한 사내가 한 명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심인성의 심복인 최기혁이었다.
서로 안면이 있었기에 일행을 쓰윽 쳐다본 최기혁은 옆으로 비켜서면서 짧게 말했다.
“들어가시죠.”
혁권과 부하들이 객실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최기혁은 복도를 살펴보고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어서 오시오.”
객실 소파에 앉아 있던 심인성이 몸을 일으켜 한쪽 손을 내밀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뭐요?”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는 그가 바로 용건을 묻자 심인성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급하시오. 일단 차부터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심인성이 눈짓을 주자 한쪽에 서 있던 최기혁이 커피포트에 전원을 넣고 커피를 준비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으면 입을 열 것 같지 않은지라 혁권은 어쩔 수 없이 심인성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한 대 피우겠소?”
그는 마뜩지 못한 표정으로 심인성이 내민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었다.
자연스레 불까지 붙여 주니 편하긴 했지만 이상스레 친근한 척 구는 것이 아무래도 편한 자리는 못 될 것 같았다.
상대가 몸을 뒤로 기댄 채 하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제작한 드라마를 봤는데 꽤 재미있는 것 같았소.”
“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소이다.”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그래도 아는 사람이 만드는 건데 한 번쯤을 보는 것이 예의 아니겠소. 듣기로는 중국에 판권까지 팔았다고 하던데, 처음 손대는 분야인데도 그런 성과를 내다니 역시 사업적인 능력이 대단한 것 같소.”
무슨 꿍꿍이인지 혁권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번에 판권 계약을 하면서 중국 신문출판광전국 부국장인 백수광하고 친분을 맺게 됐다고 하던데, 맞소?”
상대가 백수광의 이름을 거론하자 그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건 뭣 때문에 묻는 거요?”
그러자 심인성이 자세를 바로 하고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백수광은 우리 쪽에서도 오래전부터 주목하고 있던 인물이오.”
“…….”
“중국의 중요 방산 업체인 중국 정밀 기계 수출입 공사(CPMIEC)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테고, 비교적 젊은 나이라 신문출판광전국 부국장직에 있지만 최고 권력자인 시진핑 주석의 측근 중에 한 명이오.”
실력자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진핑 주석의 측근이라는 사실은 몰랐던 혁권은 내심 깜짝 놀랐다.
“아마 이번에 개최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이후에 공산당 중앙 서기처로 자리를 옮기게 될 거라는 정보도 있소. 그러면 말 그대로 권력 핵심이 되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 가는 거라고 볼 수 있을 거요.”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이오?”
심인성이 입가에 흐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앞으로 중국의 차기 권력 실세 중에 한 명이 될 테니 친분을 잘 유지한다면 사업을 하는 데 득 될 것이 많을 거요. 그리고 이왕이면 한국 정부와 백수광을 은밀히 연결해 주는 다리가 되어 줬으면 좋겠소.”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많을 텐데…….”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백수광이 신뢰하고 드러내기 곤란한 이야기도 편히 나눌 수 있는 인물은 그쪽뿐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오.”
“거기다가 문제가 생겼을때 도마뱀 꼬리처럼 쉽게 잘라 내 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겠지.”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묻자 심인성이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그런 걸 뻔히 알면서 내가 왜 그쪽 요구를 들어줘야 되는 거요?”
심인성이 잠깐 뜸을 들이다 혁권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국심 때문이라고 하면 믿어 주겠소?”
“훗.”
여태까지 진지한 자세로 대화를 나눴던 것이 무색하게 혁권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걸로 날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것이라 믿소.”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심인성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어느새 필터 끝까지 타들어 간 담재를 재떨이에 비벼서 끄며 말했다.
“백수광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그쪽도 나쁠 것이 없을 거요. 아니, 앞으로 중국에서 할 사업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친밀하게 지내야 되지 않겠소.”
대놓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심인성의 말투에서 백수광이 혁권한테 한국 영상물 수입 권한을 주기로 한 걸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일을 도와줄 때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챙겨 주는 걸로 합의를 보는 건 어떻소?”
잠시 머릿속으로 제안을 따져 본 혁권은 딱히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에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심인성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했소.”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난 이만 가 보겠소.”
“나중에 또 봅시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혁권은 심인성을 뒤로하고 객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