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94
594
#예멘
상대적으로 이름 있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빠른 전개와 호기심을 유발하는 스토리로 ‘이 세상에 하나뿐인 당신’은 방송 시작 일주일 만에 시청률 8%를 기록하는 큰 성과를 거두면서 순항했다.
“몇 시 비행기라고 했지?”
혁권의 물음에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넥타이까지 맨 성석호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오후 2시에 인천공항에서 출발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바로 공항으로 가야 되겠군.”
“아마도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다시 그리스로 돌아가는 기분이 어때?”
“두려운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폭력 조직에 잡혀 심하게 구타를 당하면서 목숨의 위협을 받았으니 두려움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설레는 것도 있습니다. 이제는 태일물산 직원이 아니라 모든 걸 새로 시작하는 거니까요.”
“그래.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을 거야. 이거 한 가지는 약속하지, 난 내 밑에 들어온 사람은 끝까지 책임져.”
“알고 있습니다.”
이미 몸으로 직접 경험을 했기에 그를 바라보는 성석호의 눈동자에는 믿음이 가득했다.
“이제부터 아테네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운송하는 업무를 전담하게 될 거야. 여태까지 해 왔던 일이니까. 잘해 내리라 생각해.”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8만 유로야. 가지고 있다가 필요한 곳에 써.”
한화로 1억이 훌쩍 넘는 거금에 성석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양했다.
“너무 많습니다.”
“앞으로 일을 하다 보면 이리저리 들어가는 돈이 많을 거야. 그러니까 가지고 있어.”
잠깐 망설이던 성석호는 상황에 따라서 뇌물도 쓰면서 여태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해야 된다는 걸 상기하곤 돈 봉투를 챙겨 넣었다.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도착하면 함단이 해야 될 것들을 알려 줄 테니까 서로 잘 협력하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해.”
“예.”
“공항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이제 그만 가 봐.”
“그러면 일어서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성석호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공항으로 떠났다.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던 혁권은 어느새 커피가 차갑게 식어 있자 다시 내려놓고는 뒤에 서 있는 하킴을 돌아봤다.
“진하게 한 잔 다시 가져와.”
“네.”
커피 머신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하킴을 보며 소파에 기대 앉아 있을 때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처음 보는 번호에 살짝 미간을 찡그린 혁권은 잠깐 망설이다가 엄지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존슨 씨 맞으십니까?
낯선 목소리에 그는 약간 경계심을 나타내며 말했다.
“누구십니까?”
-기억 하실지 모르겠군요. 예전에 런던 샤보이Savoy 호텔에서 제가 모시던 분과 함께 처음 만났지요.
“……!”
기억을 더듬던 혁권은 잊고 지내던 한 조각을 떠올리고는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쥐었다.
“혹시 만수르 회장님…….”
-맞습니다. 전 그분의 비서실장인 자드란이라고 합니다.
풀네임이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인 만수르는 아랍에미리트(UAE)를 구성하는 여러 토호국 중에 하나인 아부다비의 왕자이자 부총리까지 지낸 인물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호로 유명했다.
과거 혁권은 트리폴리 정부의 의뢰로 일명 카다피 콜렉션이라고 불리는 미술품들을 은밀하게 처분하는 과정에서 만수르하고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별다른 접점이 없었기에 잊고 지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으니, 놀랍고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오랜만이군요. 그런데 제 번호는 어떻게 안 겁니까?”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알아냈습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하지요.
“아닙니다.”
만수르의 비서실장정도 된다면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었기에 혁권은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은 한 겁니까?”
-사업상 저희 회장님께서 존슨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데, 시간이 되십니까?
“절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싱가포르에 머물고 계신데 괜찮으시다면 이쪽으로 와 주셨으면 합니다.
“용건이 뭔지 알 수 있을 까요?”
-죄송합니다만 그건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을 하실 겁니다.
말을 아끼는 걸로 봐서 뭔가 중요한 일인 것이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혁권은 돈과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만수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나쁠 것이 없었기에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그리로 가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도착하신 후에 연락을 주십시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그는 만수르가 자신을 왜 만나자고 하는지 골똘히 생각을 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커피를 가져 왔습니다.”
원두 향이 진한 커피를 탁자에 올려놓으며 하킴이 말하자 상념에서 깨어난 혁권이 입을 열었다.
“저녁에 싱가포르로 갈 거니까. 전용기를 대기시켜 놔.”
“옛.”
하킴이 대답과 함께 물러간 후 혁권은 하얀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입가에 대며 잠깐 생각했다.
앞으로도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이동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항공사에서 비즈니스 제트기를 빌려 놓으라고 하려니 꽤 번거롭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참에 한 대 사 놓을까.”
마치 슈퍼에 장보러 갔다가 물건 담는 것처럼 가볍게 중얼거린 혁권은 호로록 소리를 내며 커피를 홀짝였다.
한국을 떠난 지 몇 시간 만에 싱가포르에 도착한 혁권은 부하들과 함께 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잘 정비된 도로와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보도는 언제 봐도 구미歐美 선진국의 계획도시 같은 느낌을 줘서, 때로는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뉴욕이나 런던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탁 트인 고속도로를 달려 시내로 진입한 차량은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시가지 중심부에 자리한 초고층 빌딩 앞에 멈춰 섰다.
서울로 치면 마치 여의도 같은 느낌으로 각종 금융 회사나 글로벌 기업들의 지사들이 한 군데 몰려 있어, 어딜 가나 탑처럼 높은 빌딩들이 즐비한데, 혁권이 만수르 회장을 만나기로 한 장소도 그중 한 군데였다.
“오셨습니까.”
차에서 내려 새 것처럼 반짝거리는 로비에 발을 들이자마자 낯익은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혁권이 손을 내밀어 먼저 악수를 청했다.
“존슨 씨는 여전하시군요. 들어오는 발걸음이 힘차고 기세가 남달라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과찬입니다. 그러는 자드란 씨야말로 전보다 훨씬 활력이 넘치는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까, 하며 자드란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미 중장년을 지나 노년에 접어든 나이라 행동거지는 느릿했으나 경험에서 우러나온 노련한 처세와 화술은 다른 사람이 절대 흉내 내지 못할 그만의 것이었다.
아마 갑자기 미국 대통령을 접대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자드란이 얼굴 표정을 무너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혁권은 조심스레 그를 평가했다.
“절 따라오십시오.”
가볍게 인사를 끝낸 자드란이 VIP 전용 엘리베이터로 일행을 안내했다.
자드란이 맨 꼭대기 층을 누르는 것을 보고 혁권이 잠시 의아한 눈을 했으나 일단은 별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였으므로 맨 위층을 통째로 빌리기라도 했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에도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계단을 올라가야 한다고 하자 그제야 혁권이 물었다.
“설마 회장님이 옥상에서 기다리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하하, 그렇진 않습니다.”
자드란은 대답대신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을 열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찡그린 혁권은 이미 이륙 준비를 다 마치고 태울 사람을 기다리는 헬리콥터의 모습에 저걸 타고 가야 하냐고 묻는 표정으로 자드란을 쳐다보았다.
“행선지는 조종사가 알고 있으니 타시기만 하면 됩니다.”
“내 부하들은…….”
“다는 태우지 못하니 믿을 만한 사람만 몇 명 고르셔야겠군요.”
여기까지 와서 싫다고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혁권은 할 수 없이 하킴과 백성균만을 태우고 나머지는 예약해 둔 호텔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뒤 일행을 태운 채 빌딩 옥상을 이륙한 헬리콥터는 일정 고도를 유지하며 빠르게 시가지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두두두두.
머리에 쓰고 있는 헤드셋 사이로 로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가운데 혁권은 방풍창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시가지를 벗어나 바다 위를 날아가고 있는 모습에 그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자드란을 보며 말했다.
“도대체 어딜 가는 겁니까?”
그러자 자드란이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한쪽 팔을 들어 상대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푸른 바다에 온통 새하얗게 칠해진 요트 한 척이 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요트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규모의 배였다.
“토파즈Topaz호입니다.”
“아. 저게 그 유명한 요트군요.”
그때서야 정체를 알아차린 혁권이 짧게 감탄성을 내뱉자 자드란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총길이가 146미터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개인 요트이지요.”
독일의 럭셔리 요트 제조 업체인 루르센Lurssen에서 건조한 배로 크기도 대단했지만, 무려 7억 달러, 한화로 7천억 원이 훌쩍 넘어가는 가격으로 한동안 많은 화제가 됐던 기억이 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조금 있으면 만나게 될 만수르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 수 있었다.
요트 위를 한 바퀴 크게 선회한 헬리콥터는 천천히 고도를 낮춰 후반 갑판에 있는 헬리포트에 안정적으로 내려앉았다.
옆문이 열리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혁권은 일행과 함께 자드란을 따라 헬리콥터에서 내렸다.
실내로 들어간 자드란은 그를 한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요트 안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내부 장식 또한 원목과 대리석을 써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자 헤엄을 쳐도 될 만큼 큰 야외 수영장이 나왔다.
시원한 비키니 차림을 한 금발 미녀 세 명이 선배드에 나란히 누워 있는 가운데 흰 티에 반바지를 입고 셔츠를 위에 걸친 중동 사내가 양손으로 골프채를 쥐고는 티샷을 날리고 있었다.
딱! 쉬이이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앞으로 한참을 날아간 골프공은 이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바다에 빠졌다.
최고급 요트 위에서 골프 연습을 하는 호사를 부리고 있는 사내는 바로 만수르 회장이었다.
“회장님, 존슨 씨를 모시고 왔습니다.”
자드란의 말에 고개를 돌린 만수르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짓고는 두 팔을 벌리면서 다가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반갑소. 여기까지 오느라 불편하지는 않았소.”
“덕분에 편히 왔습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만수르는 그를 한쪽에 있는 소파로 데려갔다.
“샴페인 한 잔, 어떻소?”
“좋습니다.”
만수르는 직접 얼음통에 들어 있는 샴페인을 꺼내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잔과 함께 가지고 와 옆자리에 앉았다.
페리에 주에 벨 에포크 2000년산이었는데 한 병에 4,166유로, 한화로 660만 원이나 하는 최고급 샴페인이었다.